남한 – 해방전쟁인가, 억압전쟁인가?
2020년 12월 7일
혁명적 패전주의 깃발 아래서 반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자 곧바로 반론이 나왔다. 우리의 반제투쟁은 “민족해방투쟁”인데 이 해방투쟁의 패배를 위해 싸우라는 게 말이 되느냐? 라고.
남한이 동남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남반구 반식민지 나라들을 금융 종속의 그물로 얽어매고 자본수출로 해당 인민들을 초과착취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 국가인데, 이러한 남한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노동자계급은 그러한 반식민지 나라와의 충돌·분쟁에서나, 또는 같은 제국주의 국가와의 충돌·분쟁 (예를 들어 2019년 한일 무역전쟁 같은)에서나 항상 ‘자’국의 패배를, 그리고 이 분쟁을 국내 계급투쟁 강화로, 국내전/내란으로 전화시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남한 측에서 이 분쟁은 어떤 측면에서도 노동자·피억압자의 “해방전쟁”이 아닌, 제국주의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억압전쟁”이기 때문이다.
맑스·레닌 이래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전쟁을 구별해왔다. 억압 전쟁과 해방 전쟁이 그것이다. 억압 전쟁은 지배계급의 전쟁으로, 그들의 반동적 이해를 타자를 희생시켜 관철하려는 (경쟁국 지배계급에 대해서든, 아니면 노동자계급 및 피억압 인민에 대해서든) 전쟁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러한 억압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사회주의자들이 지지해야 할 유일한 전쟁은 해방 전쟁이다. 그러한 전쟁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의 이해를 방어하는 전쟁이다. 그러한 전쟁은 내란·국내전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6-39년 스페인 내란, 카슈미르 인민과 인도의 전쟁, 체첸 인민과 러시아의 전쟁, 2011년 이래 시리아 내전이 그것이다. 또 그러한 전쟁은 국가 간 전쟁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혁명 러시아에 대한, 또는 반식민지 나라들 (아프간, 이라크 등)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들이 그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억압 인민을 지지하고 반동 진영의 패배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의무다.
트로츠키는 1932년 반전 대회 성명에서 전쟁에 관한 맑스주의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자본주의 강도들은 언제나 ‘(조국)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일본이 상하이를 향해 진군하고 프랑스가 시리아나 모로코를 향해 진군하고 있을 때조차도 말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구별하는 것은 오직 억압 전쟁과 해방 전쟁 간의 구별 뿐이다.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외교적 날조가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계급이 누구인가, 이 전쟁에서 그 계급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다.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은, 그 핑계와 정치적 수사와는 별개로 억압적인 성격을, 반동적인, 그리고 인민에게 적대적인 성격을 갖는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억압 민족들의 전쟁만이 해방 전쟁으로 성격규정 할 수 있다...”
레닌 이래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피억압인민 진영을 방어하는 강령을 “방위주의”라고 부르는 한편, 반동 진영을 패퇴시키는 강령을 “패전주의”라고 부른다. 트로츠키는 전쟁의 진정한 성격을 인식하고 올바른 강령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혁명 조직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혁명 문제 다음으로 전쟁 문제는 혁명적 당의 시금석이다. 여기에는 어떤 모호함도 허용되지 않는다. 원칙 있는 결정은 이미 사전에 명확하다. 방위주의와 패전주의는 물과 불처럼 양립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진리를 당원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장 일반적인 정의에서 맑스주의적 패전주의 강령은 혁명가들이 제국주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노동자·피억압자의 계급투쟁을 전쟁 시에 계속해서 이어가며 계급적 적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가들은 전쟁 조건들을 활용하여 계급적 적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패퇴시키기를 바란다. 레닌의 패전주의 노선을 계승한 좌익반대파가 스탈린주의적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투쟁하는 가운데 1927년 공식 문서에서 패전주의의 핵심을 정식화한 것이 여기 있다.
“패전주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당의 과거 역사 전체에서 패전주의는 외부 적과의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라는 것, 그리고 내부의 혁명적 투쟁에 의해 그러한 패배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물론 자본가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도 패전주의를 같은 뜻으로 제시했다. “패전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적(敵) 계급의 수중에 있는 ‘자국’ 국가의 패배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이다.”
제4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 1938년에 스탈린주의 비밀경찰 게페우(GPU)에 의해 살해당한 루돌프 클레멘트는 혁명적 패전주의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따름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시에 자신의 계급투쟁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건넨 새로운 수단을 가지고 계속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 나라에서 전쟁에 의해 초래된 군사적 패배와 연결하여 가차 없이 자신의 사회혁명을 준비, 실행해서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자’국 부르주아지의 약화를 활용할 수 있고, 또 활용해야만 한다. 혁명적 패전주의로 알려진 이 전술은 우리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의, 그리고 그와 함께 역사 진보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 중 하나다.”
제국주의적 적(敵)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혁명가들은 각각의 위기 ㅡ 경제공황과 정치위기, 군사충돌 ㅡ 를 활용하여 노동자계급 · 피억압 대중의 투쟁력과 의식을 강화시키며 지배계급을 타격, 약화시키고 나아가 타도하기를 바란다. 제국주의 전쟁을 어떻게 제국주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혁명적 전쟁으로 전화시킬 것인가? 오늘 남한에서 반식민지 나라와의 분쟁, 또는 경쟁국 제국주의 지배계급과의 분쟁을 어떻게 남한 제국주의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혁명적 계급투쟁으로, 내란으로 전화시킬 것인가?
우리가 “민족자주” “조국방어” 깃발이 아니라 혁명적 패전주의 깃발 아래서 반제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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