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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셰 델로>> 1호에 A. 포트레소프 씨의 매우 특징적인 강령적 논문, <두 시대의 경계에서>가 발표되었다. 이전 잡지에 같은 저자가 쓴 논문과 마찬가지로 이 논문도 오늘날 중요한 초미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러시아 사상계의 부르주아적 조류 — 청산주의 — 의 기본사상을 개진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앞에 있는 이 글은 논문이 아니라 특정 유파의 선언문이다. 그리고 그 글을 주의 깊게 읽고 내용을 숙고해 본 사람은 누구든 우연적인 고려, 즉 순 문필 상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그런 류의 고려 때문에 저자의 사상이 (그리고 저자는 혼자가 아니므로 저자 동료들의 사상이) 성명이나 신조(credo)라는, 보다 적합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방해받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포트레소프가 말하는 요지는 현 시대의 민주주의 파가 두 시대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 그리고 민족적 고립으로부터 국제주의로의 이행에 구시대와 신시대의 근본적인 구별점이 있다는 것이다. 포트레소프가 말하는 현 시대의 민주주의 파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특징적인 민주주의 파, 즉 18세기 말에서 19세기의 1/3분기 및 2/3분기까지의 시기에 특징적인 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파와는 구별되는 바의 민주주의 파를 말한다.
언뜻 보면, 저자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맞는 듯이 보일 수 있고, 현대 민주주의 파 [여기서 레닌은 차르 치하의 검열을 고려하여,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러한 은어로 표현했다. 그리고 레닌은 이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현 시대에 사회배외주의적 분자와 혁명적 분자로 분열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옮긴이]를 지배하고 있는 민족적 자유주의 경향에 대한 반대자가 마치 우리 앞에 있는 듯이, 저자가 민족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마치 ‘국제주의자’인 듯이 보일 수 있다.
정말이지, 이러한 국제주의의 옹호야말로, 이와 같이 민족적 편협함과 민족적 배타성을 흘러간 구시대의 특징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현대 민주주의 파의 (보다 정확하게는, 그 공식 대표자들의) 질병인 민족적 자유주의 물결과의 단절이 아닌가?
언뜻 보면, 단절로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저자는 남의 깃발을 내걸고 자신의 화물을 운반하고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 어느 것이든 이 경우에는 중요하지 않은데 — 그는 ‘국제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민족적 자유주의라는 그의 밀수품을 이 깃발 아래 보다 안전하게 운반한다는 계략을 사용했다. 결국, 포트레소프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민족적 자유주의자이다. 그의 논문의 (그리고 그의 강령과 정책과 신조의) 본질은 이 얄팍한 — 원한다면, 심지어 악의 없는 — 계략의 사용에 있다. 즉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기회주의를 실어 나른 데 있다. 이 책략의 모든 세부적인 지점들까지 파고들어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문제가 무엇보다도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트레소프가 남의 깃발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그가 ‘국제주의’의 원칙으로 자신을 가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지지자를 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포트레소프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를 민족적 자유주의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 포트레소프는 카우츠키가 “변호사 놀음을 하고 있다”고, 즉 이때는 이 민족, 저 때는 저 민족의 자유주의를, 말하자면 각 민족에 특유한 색깔의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카우츠키를 ‘수정’하려고 한다. 포트레소프는 민족적 자유주의를 국제주의 및 마르크스주의와 대비시키려고 (카우츠키가 민족적 자유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의문과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애를 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잡색의 민족적 자유주의를 단색의 민족적 자유주의와 대비시키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종류의 민족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더구나 당면의 구체적인 역사적 정세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적대적이다.
이제 우리는 이 점을, 왜 그러한지와 함께 밝혀볼 것이다.....
* 전문은 상단에 첨부한 PDF 파일을 참조하시오.
<<나셰 델로>> 1호에 A. 포트레소프 씨의 매우 특징적인 강령적 논문, <두 시대의 경계에서>가 발표되었다. 이전 잡지에 같은 저자가 쓴 논문과 마찬가지로 이 논문도 오늘날 중요한 초미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러시아 사상계의 부르주아적 조류 — 청산주의 — 의 기본사상을 개진하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앞에 있는 이 글은 논문이 아니라 특정 유파의 선언문이다. 그리고 그 글을 주의 깊게 읽고 내용을 숙고해 본 사람은 누구든 우연적인 고려, 즉 순 문필 상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그런 류의 고려 때문에 저자의 사상이 (그리고 저자는 혼자가 아니므로 저자 동료들의 사상이) 성명이나 신조(credo)라는, 보다 적합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방해받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포트레소프가 말하는 요지는 현 시대의 민주주의 파가 두 시대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 그리고 민족적 고립으로부터 국제주의로의 이행에 구시대와 신시대의 근본적인 구별점이 있다는 것이다. 포트레소프가 말하는 현 시대의 민주주의 파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특징적인 민주주의 파, 즉 18세기 말에서 19세기의 1/3분기 및 2/3분기까지의 시기에 특징적인 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파와는 구별되는 바의 민주주의 파를 말한다.
언뜻 보면, 저자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맞는 듯이 보일 수 있고, 현대 민주주의 파 [여기서 레닌은 차르 치하의 검열을 고려하여,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러한 은어로 표현했다. 그리고 레닌은 이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현 시대에 사회배외주의적 분자와 혁명적 분자로 분열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 옮긴이]를 지배하고 있는 민족적 자유주의 경향에 대한 반대자가 마치 우리 앞에 있는 듯이, 저자가 민족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마치 ‘국제주의자’인 듯이 보일 수 있다.
정말이지, 이러한 국제주의의 옹호야말로, 이와 같이 민족적 편협함과 민족적 배타성을 흘러간 구시대의 특징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현대 민주주의 파의 (보다 정확하게는, 그 공식 대표자들의) 질병인 민족적 자유주의 물결과의 단절이 아닌가?
언뜻 보면, 단절로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저자는 남의 깃발을 내걸고 자신의 화물을 운반하고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 어느 것이든 이 경우에는 중요하지 않은데 — 그는 ‘국제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민족적 자유주의라는 그의 밀수품을 이 깃발 아래 보다 안전하게 운반한다는 계략을 사용했다. 결국, 포트레소프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민족적 자유주의자이다. 그의 논문의 (그리고 그의 강령과 정책과 신조의) 본질은 이 얄팍한 — 원한다면, 심지어 악의 없는 — 계략의 사용에 있다. 즉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기회주의를 실어 나른 데 있다. 이 책략의 모든 세부적인 지점들까지 파고들어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문제가 무엇보다도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트레소프가 남의 깃발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그가 ‘국제주의’의 원칙으로 자신을 가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지지자를 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포트레소프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주의를 민족적 자유주의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 포트레소프는 카우츠키가 “변호사 놀음을 하고 있다”고, 즉 이때는 이 민족, 저 때는 저 민족의 자유주의를, 말하자면 각 민족에 특유한 색깔의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카우츠키를 ‘수정’하려고 한다. 포트레소프는 민족적 자유주의를 국제주의 및 마르크스주의와 대비시키려고 (카우츠키가 민족적 자유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의문과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애를 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잡색의 민족적 자유주의를 단색의 민족적 자유주의와 대비시키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종류의 민족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더구나 당면의 구체적인 역사적 정세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적대적이다.
이제 우리는 이 점을, 왜 그러한지와 함께 밝혀볼 것이다.....
* 전문은 상단에 첨부한 PDF 파일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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