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강령
V. I. 레닌, 1916년 3월
사회민주주의 “평화강령” 문제는 “치머발트주의자들”의 2차 국제회의 의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이 문제의 핵심 사항들을 독자에게 주목시키기 위해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권위 있는 대표자이자 모든 나라 사회배외주의자들의 가장 권위 있는 챔피언인 카우츠키가 발표한 성명을 인용해보겠다."인터내셔널은 전쟁 시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평화의 도구다.... 평화를 위한 싸움, 평화 시에 계급투쟁이다." (<<신시대>>. 1914년 11월 27일). "인터내셔널에 의해 작성된 모든 평화강령들; 코펜하겐 대회, 런던 대회, 비엔나 대회의 강령들, 모든 요구, 그리고 당연히, 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인정. 이 요구 또한 현 전쟁에서 우리의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한다." (같은 글, 1915년 5월 21일)
이 몇 마디 단어들은 국제적인 사회배외주의적 통일단결 및 화해의 "강령"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쥐데쿰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이 비엔나에서 만나 전적으로 쥐데쿰의 정신에 따라 행동하며 "조국 방어"라는 명분 아래 독일 제국주의의 대의를 옹호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과 러시아의 쥐데쿰들은 런던에서 만나 같은 명분 아래 "자"민족 제국주의의 대의를 옹호했다. 런던과 비엔나의 사회배외주의 영웅들의 진짜 정책은 어느 민족 부르주아지가 타국을 강탈하는 데 우선권을 가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제국주의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정책이며, 프랑스 노동자들과 독일 노동자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정책을 감추기 위해,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해 런던 영웅들과 비엔나 영웅들 모두 다음 문구에 호소한다. 우리는 “민족들의 독립”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민족자결을 인정하고, 병합을 거부한다 등등.
이 "인정"이 빤한 거짓말이고 비열한 위선임이 너무도 명백한 이유는, 민족들을 독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화하기 위해 양측이 벌이고 있는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권위 카우츠키는 이 위선을 폭로하고 가면을 벗기고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위선을 신성시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배외주의적 배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노동자들을 속이기를 바라는 것이 카우츠키의 눈에는 평화 문제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통일성"과 활력의 증거다!!! 카우츠키는 노동자들의 눈에 명백히 보이는 민족주의적인 적나라한 노골적 위선을, 노동자들의 눈에 흙먼지를 씌우기 위해 계산된 국제적인 교묘한 은폐된 위선으로 전환시켜낸다. 카우츠키의 정책은 쥐데쿰의 정책보다 노동운동에 백배나 더 유해하고 위험하다. 카우츠키의 위선은 백배는 더 역겹다.
이것은 카우츠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같은 정책이 러시아에서 악셀로드, 마르토프, 치헤이제에 의해, 프랑스에서 롱게와 프레스망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트레비스에 의해 추구되고 있다. 객관적으로 이 정책은 부르주아 거짓말을 노동자계급 속에 조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르주아 사상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마음속에 주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데쿰과 플레하노프 모두 "자"국 자본가들의 부르주아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지만, 카우츠키가 이 거짓말을 신성시하고 이 거짓말을 "한마음 한뜻의" 인터내셔널의 "최고 진리"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다. 노동자들은 쥐데쿰들과 플레하노프들을 일시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권위 있는 한마음 한뜻의 "사회주의자들"로 여겨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것이다. 평화에 관한 위선적이고 한가한 어정쩡한 문구들을 통해 노동자들이 전시의 혁명적 투쟁으로부터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병합 없는 평화, 민주적 평화 등등에 대한 희망들로 노동자들이 진정되고 달래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것이 아닌가.
후이스망은 단지 카우츠키의 평화강령을 대중화시켰을 뿐이며 국제중재재판소, 대외정치의 민주화 등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평화강령의 첫 번째 근본적인 주안점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 영향력을 강화시켜주는 카우츠키주의 평화강령의 위선을 까발리는 것이어야 한다.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왜곡해온 사회주의 교의의 기본 전제들을 상기해보자. 전쟁은 전쟁 발발 오래 전부터 교전국 지배계급들이 추구해온 정치의 ㅡ 무력 수단에 의한 ㅡ 계속이다. 평화도 그 동일한 정치의 계속인 바, 군사 작전의 결과로 적대국들의 역관계에 생긴 변화들을 반영한다. 전쟁은 전쟁 이전에 정치가 발전해온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단지 이 발전을 가속화할 뿐이다.
1870-71년의 전쟁은 독일을 해방하고 통일하는 (수십 년 동안 추구된) 진보적 부르주아 정치의 계속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궤멸과 전복이 이 해방을 앞당겼다. 그 시대의 사회주의자들의 평화강령은 이 진보적 부르주아 결과물을 고려하여 민주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지를 제창하며 다음을 촉구했다. 프랑스 약탈 반대, 공화국과의 명예로운 평화를!
이 예를 1914-16년 제국주의전쟁 기간의 조건 속에서 맹목적인 노예근성으로 반복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광대 짓인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전쟁은 세계를 약탈해온, 식민지를 탈취해온 과숙한 반동적 부르주아지의 정치의 계속이다. 객관적인 상황 때문에, 현 전쟁은 부르주아 제 관계의 토대 위에서, 어떤 민주적 "진보"도 가져올 수 없다. 전쟁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현 전쟁은 억압 일반, 특히 민족억압의 강화와 연장을 가져올 수 있을 뿐이다.
그 전쟁 [1870-71년의 전쟁]은 민주적 부르주아-진보적 방향으로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그 전쟁은 나폴레옹 3세 전복과 독일 통일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쟁 [1914-16년 제국주의전쟁]은 오직 사회주의혁명의 방향으로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그때는 민주적 (부르주아적) 평화 강령이 객관적인 역사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 토대가 존재하지 않으며, 민주적 평화에 관한 모든 문구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부터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부르주아적 거짓말이다! 그때는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민주적 평화 강령으로, 수십 년 동안 스스로를 드러내온 (나폴레옹 3세 전복과 독일 통일을 위한) 대중의 근본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운동을 지지했다. 지금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제 관계에 토대를 둔 민주적 평화 강령으로 부르주아지가 인민을 속이는 것을 돕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를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유리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부르주아지에 의한 인민 기만을 말이다.
"조국 방어"에 관한 문구들이 대중의 머릿속에 거짓과 기만을 통해 민족해방전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듯이, 민주적 평화에 관한 문구들은 그 동일한 부르주아 거짓말을 빙빙 돌려서 주입한다.
"그것은 당신이 평화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신이 민주적 요구에 반대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카우츠키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존재하는 사회주의적 과제를 존재하지 않는 부르주아-민주주의적 과제로 바꿔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부주의한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카우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카우츠키주의자들에게 답한다. 우리는 민주적 요구에 찬성이며, 우리 혼자 민주적 요구를 위해 진심으로 싸운다. 객관적인 역사적 정세는, 사회주의혁명과의 연관 속에서가 아니면 우리가 민주적 요구를 내걸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카우츠키 일당이 노동자들에 대한 부르주아적 기만을 위해 집어든 "나침반"을 예로 들어보자.
쥐데쿰과 플레하노프는 그들의 “평화강령”에서 "한마음 한뜻"이다. 병합 타도! 민족들의 독립 지지! 그리고 이것에 주목하자. 쥐데쿰들이 폴란드, 핀란드 등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가 병합주의적 태도라고 말한 것은 옳다. 그리고 플레하노프가 알자스-로렌, 세르비아, 벨기에 등에 대한 독일의 태도도 병합주의적이라고 말한 것도 옳다. 둘 다 옳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카우츠키는 독일 쥐데쿰과 러시아 쥐데쿰들을 "화해시킨다"!!!
그러나 분별 있는 노동자들 누구나 카우츠키와 양쪽 쥐데쿰들 모두가 위선자라는 것을 바로 알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다. 사회주의자의 의무는 위선적인 민주주의와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어떻게 가면을 벗길 수 있는가? 아주 간단하다. 민족들의 독립에 대한 "인정"은 억압 민족의 대표자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모두, 자신의 "조국"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들을 위한 분리의 자유를 요구한 경우에만 진정성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요구만 맑스주의에 부합한다. 맑스가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이 요구를 내걸었던 것은 아일랜드의 자유를 요구했을 ㅡ 한편으로 그가 분리에 이어 연방이 바로 뒤따를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ㅡ 때였다. 다시 말해서 그가 분리의 권리를 요구한 것은 나라들을 분열시키고 고립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보다 항구적인 민주적 유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피억압민족과 억압민족이 존재하는 모든 경우에, 혁명적 민주주의 민족들을 반동적 민족들과 구별해주는 그런 특별한 사정이 없는 모든 경우에 (1840년대의 경우처럼), 아일랜드와 관련한 맑스의 정책은 프롤레타리아 정책의 모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제 민족이 억압민족과 피억압민족으로 나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시대다. 제국주의시대는 바로 이러한 억압민족과 피억압민족으로의 구분이 본질적이고 전형적인 구분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제 유럽에서 반동적 민족과 혁명적 민족을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일찍이 1913년에 우리 당은 민족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자결이라는 말을 여기에 담긴 의미로 적용하는 것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의무로 삼았다. 그리고 1914-16년의 전쟁은 우리가 옳았음을 완전하게 보여주었다.
1916년 3월 3일자 <<신시대>>에 실린 카우츠키의 최신 기사를 보자. 카우츠키는 배외주의적인 비엔나 <<노동자신문>>의 편집자인 오스트리아의 악명 높은 극렬 대독일 배외주의자 아우슈터리츠가 "민족의 독립은 민족의 주권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에 자신이 동의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즉, 피억압민족들에게는 “민족국가” 내의 민족자치로 충분하며, 피억압민족들의 동등한 정치적 독립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글에서 카우츠키는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국가를 고수하는 것은 필수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러시아는 "민족 국가"지만 폴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분리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곧 힌덴부르크, 쥐데쿰, 아우슈터를리츠 그리고 카우츠키 일당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폴란드인들이 독일로부터 분리할 자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바로 이 기사에서 카우츠키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을 통해 알자스-로렌의 자유를 성취하길 원함으로써 국제주의로부터 이탈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쥐데쿰 일당이 알자스-로렌의 독일로부터 분리할 자유를 요구하길 거부할 때는, 국제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니 뭐니 일절 말하지 않는다!
카우츠키는 명백히 사회배외주의를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민족국가”라는 문구 ㅡ 아일랜드와 관련하여 영국에, 폴란드, 알자스-로렌과 관련하여 독일에 적용할 수 있는 문구 ㅡ 를 사용한다. 그는 "병합에 맞서 싸우자"는 슬로건을 배외주의자들과의 "평화 [화해] 강령"으로 전환시켰다. 적나라한 위선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사에서 카우츠키는 그 입에 발린 달콤한 발언을 반복한다. "인터내셔널은 국경이 변경될 때 여기에 영향을 받는 주민의 동의권을 요구하길 결코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쥐데쿰 일당은 왜 독일에 병합되는 것에 대한 알자스인과 벨기에인의 "동의권"을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아우스터를리츠 일당은 왜 오스트리아에 병합되는 것에 대한 폴란드인과 세르비아인의 "동의권"을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러시아의 카우츠키주의자 마르토프는 어떤가? 그는 그보즈데프 잡지 <<나시 골로스>>(사마라)에, 민족자결이 제국주의전쟁에서 반드시 조국 방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자명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글을 썼다. 그러나 마르토프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가 대러시아인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들의 분리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결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마르토프는 알렉신스키들, 그보즈데프들, 포트레소프들, 플레하노프들에게 화해의 손을 뻗친다! 마르토프는 비합법 언론에서도 이 점에 대해 침묵한다! 그는 네덜란드인 호르터에 대한 반론을 편다. 호르터가 그릇되게도 민족자결 원칙을 부인하지만, 그럼에도 호르터는 네덜란드령 인도의 정치적 독립을 요구하고, 이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 네덜란드 기회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주의 배반을 폭로함으로써 민족자결 원칙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르토프는 이러한 호르터의 입장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토프는 1912-15년에 분리권과 자결권 일반을 부인한 청산주의 언론 유일 필자였던 그의 공동서기 셈코프스키에게는 반대하지 않는다!
마르토프가 카우츠키와 똑같이 위선적으로 자결을 “제창”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또 배외주의자들과 화해하려는 욕망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트로츠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전심전력으로 자결에 찬성하는 것 같지만, 그의 경우에도 자결은 내용 없는 공허한 문구다. 왜냐하면 그는 해당 민족의 사회주의자의 "조국"에 의해 억압받는 민족들의 분리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카우츠키와 카우츠키주의자들의 위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런 류의 "병합 반대 투쟁"은 노동자들을 속이는 것이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지 국제주의자들의 의무를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주의적 편견과 민족주의의 이기적 이익에 대한 양보이지 (“우리” 모두, 즉 부르주아 배외주의자들과 사회배외주의자들 모두 타 민족들에 대한 “우리” 조국의 억압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의 “평화강령”은 첫째로 평화에 관한 부르주아적 · 사회배외주의적 · 카우츠키주의적 언사들의 위선을 까발려야 한다. 이것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임무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본의든 본의 아니든 대중을 속이는 것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평화강령”은 이 문제에 대한 주요한 민주적 원칙 ㅡ 병합 거부 ㅡ 이 말로가 아니라 실천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그것이 민족적 위선의 선전이 아니라 국제주의의 선전을 촉진하는 데 봉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대중에게 병합 거부, 즉 자결의 인정이란 모든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민족에게 억압받는 민족들의 분리의 권리를 요구할 때만 진실 된 것임을 설명해야 한다. 하나의 긍정적 슬로건으로서, 즉 대중을 혁명적 투쟁으로 끌어들이고 “민주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혁명적 조치들의 채택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슬로건으로서 “국가부채 거부” 슬로건을 내걸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평화강령"은, 제국주의 열강과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평화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한 평화는 과거 속에서가 아니라, 비제국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반동적 공상 속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의 평등한 민족들의 리그 속에서가 아니라, 미래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혁명 속에서 추구되고 쟁취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를 기치로 한 혁명적 전투에 의하지 않고는 단 하나의 기본적인 민주적 요구도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결코 제대로 ㅡ 상당한 정도로나, 또는 어느 정도의 영속성으로나 일절 ㅡ 성취될 수 없다.
동시에 사회주의혁명을 설교하는 것 없이, 또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 ㅡ 지금, 전쟁 중에 진행되어야만 하는 투쟁 ㅡ 을 거부하면서 민족들에게 "민주적" 평화를 약속하는 자는 누구든 프롤레타리아트를 속이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 52호, 1916년 3월 25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