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문제
V. I. 레닌, 1915년 7월
사회주의자들에게 당면 행동강령으로서 평화 문제 및 이와 연관된 강화 조건 문제가 두루 관심사가 되어 있다. <<베르너 타그바흐트>>지가 이 문제를 예의 소부르주아 민족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제기하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평화를 바라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융커 정부의 정책과 단절해야 한다는 이 신문 73호의 편집국 논평 (<평화의 갈망>)은 훌륭했다. 또한 소부르주아적 관점에서 평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헛된 시도를 하고 있는 ‘무력한 웅변가들의 거만한 태도’에 대한 A. P .[안톤 파네쿡] 동지의 비판(73호 및 75호)도 훌륭했다.
이 문제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어떻게 제기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자.
평화 슬로건은 특정한 강화조건과 관련지어 제기될 수도 있지만, 특정한 구체적 평화를 위한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평화 일반(Frieden ohne weiters)을 위한 투쟁으로서 아무런 조건 없이 제기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비사회주의적 슬로건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의미와 내용이 없는 슬로건이다 이는 명백하다. 평화 일반에 대해서는 심지어 키치너, 죠프르, 힌덴부르크 [1차 대전 당시 각각 영 불 독의 육군 원수들], 그리고 피로 물든 니콜라이 황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전쟁의 종결을 바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 모두가 제국주의적인 (즉 타 인민들에 대해 약탈적이고 억압적인), 그리고 ‘자’ 민족에 유리한 강화조건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제국주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차이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슬로건이 제출되어야 하는 것이지, 완전히 다른 것을 ‘통일’시키는 공식을 끌어들여 두 개의 적대적인 계급과 두 개의 적대적인 정치노선을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특정한 강화 조건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단결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모든 민족에게 자결권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영토병합’의 포기, 즉 그러한 자결권에 대한 침해를 포기하는 것이 그 같은 강화조건에 무조건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결권이 몇몇 민족에게만 인정된다면, 그것은 특정 민족의 특권을 옹호하는 것이며, 이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와 제국주의자가 취하는 행동이다. 반면 이러한 권리가 모든 민족에게 인정된다면, 예컨대 벨기에와 같은 한 나라에게만 적용할 수는 없으며, 유럽의 모든 피억압 인민들(영국의 아일랜드인, 니스의 이탈리아인, 독일의 덴마크인, 러시아의 주민 57%, 등등)과 유럽 밖의 모든 피억압 인민들, 즉 모든 식민지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A. P. 동지가 이러한 피억압 인민들에 대해 주의를 잘 환기시켜 주었다. 영국 • 프랑스 · 독일은 인구가 합해서 약 1억 5천 만 명인데 이들 세 나라에 억압 받는 식민지의 주민 수는 4억이 넘는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는 전쟁인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은 새로운 민족을 억압하고 식민지를 분할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지구상의 주민 대부분을 점하는 많은 타 민족을 억압하는 선진국들이 일차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또한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이다.
벨기에의 점령을 정당화하거나 거기에 타협하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는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제국주의자, 민족주의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벨기에인 • 알자스인 • 덴마크인 • 폴란드인 • 아프리카 혹인 등등을 억압하는 독일 부르주아지 (또한 부분적으로는 독일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독일 부르주아지의 하수인이며, 독일 부르주아지가 타 민족을 약탈하는 데 협력하고 있는 부역자들이다. 그러나 벨기에 일국만의 해방과 배상을 요구하는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도 사실상 벨기에 부르주아지 — 계속해서 1천 5백만 콩고 주민을 약탈하고 다른 나라들에서 이권과 특권을 손에 넣고자 하는 벨기에 부르주아지 — 의 요구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벨기에 부르주아지의 대외투자는 약 30억 프랑에 달한다. 온갖 사기와 음모를 동원하여 이 투자로부터 얻는 이윤을 보호하는 것이 ‘용감한 벨기에’의 ‘민족적 이익’인 것이다. 동일한 내용이 훨씬 더 큰 정도로 러시아 • 영국 • 프랑스 • 일본에 적용된다.
따라서 민족의 자유라는 요구가 특정한 개별 나라들의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덮어 가리는 허위 문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 그 요구는 모든 나라 인민들과 모든 식민지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선진국에서 일련의 혁명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 요구는 명백히 공문구이다. 더욱이 성공적인 사회주의혁명 없이는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
이 얘기는 점점 더 많은 인민대중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평화 요구에 대해 사회주의자가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어도 괜찮다는 의미인가? 결코 아니다.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 전위의 슬로건과 대중의 자생적인 요구는 구별되어야 한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자본가계급이 군중을 호도하기 위한 ‘해방’ 전쟁, ‘조국 방어’ 따위의 부르주아적 기만과 거짓에 대해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징후 중의 하나이다. 사회주의자는 이 같은 징후에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대중의 평화 갈망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대중의 평화 갈망은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가? 사회주의자가 평화 슬로건을 인정하고 그 슬로건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무력한 (많은 경우 더욱 나쁘게는 위선적인) 웅변가들의 과장된 태도’를 조장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기존 정부가, 현 지배계급이 — 일련의 혁명에 의해 교훈을 ‘가르침 받지’ 않고서도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타도되지 않고서도) ㅡ 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을 어떤 식으로든 만족시킬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환상으로 인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런 기만보다 유해한 것은 없다. 어떤 것도 이보다 노동자의 눈에 재를 뿌리는 것은 없으며, 어떤 것도 이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모순이 깊지 않다는 기만적인 사상을 노동자에게 주입하는 것은 없다. 어떤 것도 이보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를 미화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대중이 평화로부터 기대하고 있는 혜택은 일련의 혁명 없이는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평화에 대한 갈망을 활용해야 한다,
전쟁의 종결, 모든 민족 간의 평화, 약탈과 폭력행위의 중지 一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이상이지만, 만약 이 이상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혁명적 행동에 대한 요구와 분리된다면, 오직 그럴 경우에만 부르주아 궤변가들이 이러한 이상을 가지고 대중을 유혹할 수 있다. 그러한 선전을 위한 기반은 준비되어있다. 이 선전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부르주아지의 동맹군, 즉 직접적으로든 (심지어 당국에 정보를 넘기기까지 하는) 간접적으로든 혁명적 작업을 방해하고 있는 기회주의자들과 단절하는 것이다.
민족자결 슬로건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시대와 연관하여 제기되어야 한다. 우리는 현상(status quo) 유지도, 전쟁에서 비켜 서 있는 속물적 유토피아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즉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지지한다. 제국주의는 다수의 타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이 억압을 확대 • 강화하고 식민지를 재분할하려는 지향을 그 속성으로 한다. 오늘 민족자결 문제가 억압 민족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에 달려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 (즉 자유롭게 분리할 권리)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 억압 민족 (영국 • 프랑스 • 독일 • 일본 · 러시아 · 미국 등등)의 사회주의자는 실제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배외주의자이다.
오직 이러한 관점만이 제국주의에 대한 위선적이지 않는 일관된 투쟁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민족 문제를 (오늘) 속물적으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적으로 접근하는 길이다. 오직 이러한 관점만이 모든 형태의 민족 억압에 맞서 싸운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억압 민족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불신을 제거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즉 완전한 민족 간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체제 — 자본주의 하의 모든 소국가 일반의 자유라는 속물적 유토피아와는 구별되는 바의 — 를 위한) 단결된 국제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것이 우리 당, 즉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결집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채택하고 있는 관점이다. 마르크스가 “타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르쳤을 때 그가 채택한 것도 바로 이러한 관점이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가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의 분리를 요구했을 때, 그것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해방운동만이 아니라 특히 영국 노동자들의 해방운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만약 영국의 사회주의자가 아일랜드의 분리 독립권을 인정하고 지지하지 않는다면, 만약 프랑스의 사회주의자가 이탈리아령 니스에 대해, 독일의 사회주의자가 알자스-로렌과 덴마크령 슐레스비히와 폴란드에 대해, 러시아의 사회주의자가 폴란드와 핀란드와 우크라이나 등등에 대해, 폴란드의 사회주의자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이와 같이 만약 모든 ‘대’국, 즉 대 강도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이 식민지에 대해 그러한 권리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들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제국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억압 민족에 속하면서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사회주의 정치를 실천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 것은 조롱거리 밖에 안 된다.
사회주의자는 위선적인 웅변가들이 민주주의적 강화의 가능성에 대해 공문구와 거짓 약속으로 인민을 기만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는 대중에게, 일련의 혁명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각각의 나라에서 ‘자’국 정부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적 강화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부르주아 정치가들이 민족의 자유 같은 담론으로 인민을 기만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는 억압 민족의 대중에게, 그들이 타 민족에 대한 억압의 부역자가 되어 그 타 민족의 자결권, 즉 분리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지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해방도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평화 문제 및 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사회주의적 정치 — 제국주의적 정치가 아닌 — 이다. 실로 이 정치는 대부분의 경우에 국가반역죄 처벌법과 양립할 수 없는 노선이다. 그러나 바젤 결의, 즉 억압 민족의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가 그리도 파렴치하게 배반한 그 바젤 결의 또한 이 법과 양립할 수 없다.
사회주의인가, 죠프르 원수와 힌덴부르크 장군의 법에 굴복인가? 혁명적 투쟁인가, 제국주의에 복종인가? 여기서 중도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은 ‘중도’ 정치의 위선적인 (혹은 우둔한) 장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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