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키예프스키에게 보내는 회답

                   

<자료>

                  키예프스키에게 보내는 회답[1]

 
                                V. I. 레닌, 19168-9
 
 전쟁은, 개인의 생애 및 민족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위기가 그러듯이 어떤 사람들은 억누르고 망가뜨리며, 다른 사람들은 단련하고 계몽한다.

이 진리는 전쟁에 대한, 전쟁과 관련한 사회민주주의적 사고 분야에서도 뚜렷이 발현되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에서 성장해 나온 제국주의 전쟁의 원인과 의의, 그러한 전쟁과 관련한 사회민주주의적 전술,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 위기의 원인 등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그러나 전쟁 때문에 사고가 억눌리고 전쟁의 끔찍한 인상과 고통스러운 결과나 양상의 무게에 짓눌려 판단과 분석을 그만두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일이다.
이와 같이 전쟁으로 인해 인간 사고가 억눌리거나 짓밟힌 하나의 형태는 민주주의에 대해 제국주의적 경제주의가 취하고 있는 경멸적인 태도다. P. 키에프스키는 전쟁이 불러일으킨 이러한 억눌림, 이러한 두려움, 이러한 분석하길 거부하기가 한 가닥 붉은 실과 같이 자신의 논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그토록 끔찍한 대학살의 와중에 있는 마당에 조국 방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도처에서 대놓고 교살이 자행되고 있는 마당에 민족들의 권리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민족의 자결과 독립’, 그러나 그 자결과 독립이 독립국그리스에서 무엇을 이루어놓았는지를 보라! 군국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도처에서 권리들이 유린당하고 있는 마당에 권리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가장 민주주의적인 공화제와 가장 반동적인 군주제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는 마당에, 전쟁이 차이의 혼적마저도 지워버린 마당에 공화제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키에프스키는 민주주의 일반을 거부할 정도로 두려움에 굴복했다는 지적을 받으면 몹시 화를 낸다. 그는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민주주의적 요구에만 반대할 뿐이다. 그러나 키에프스키가 기분이 상했더라도, 그리고 자신이 결코 민주주의에 반대하지않는다고 우리를(그리고 아마 그 자신을 또한) ‘설득할지라도, 그의 논리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그의 논리의 끝없는 오류들정반대의 것을 증명한다.

조국 방위는 제국주의 전쟁에서는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민주주의적 전쟁과 혁명적 전쟁에서는 거짓말이 아니다. ‘권리에 대해 떠드는 모든 얘기들이 전쟁 중에 터무니없게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모든 전쟁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폭력으로 권리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역사상 과거에 다음과 같은 전쟁도 있었다(그리고 미래에도 아주 있을 법하고, 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모든 종류의 권리와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를 전시의 폭력으로 대체해 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적 내용과 함의에서는 민주주의의, 따라서 사회주의의 대의에 봉사한 전쟁들 (민주주의전쟁과 혁명전쟁) 말이다. 그리스의 사례는 일견, 모든 민족자결을 뒤집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멈춰 서서 문제를 생각하고 분석하고 신중히 고려한다면, 들리는 말들에 귀를 막고 스스로 외면하거나 악몽 같은 전쟁의 인상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위축되거나 하지 않는다면, 이 사례는 공화제에 대한 조소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가장 민주주의적인 공화국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 포르투갈, 스위스도 이 전쟁 중에 러시아와 똑같은 군국주의적 폭정을 이미 도입했거나 도입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화제를 조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지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전쟁이 공화제와 군주제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공화제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며, 전쟁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사고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군비철폐슬로건의 많은 지지자들(롤란트-홀스트, 스위스의 청년 사회민주주의자들, 스칸디나비아 좌파등등)[2]의 심적 상태이다. 그들은 넌지시 묻는다. 이 전쟁에서 공화제의 민병과 군주제의 상비군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마당에, 그리고 군국주의가 도처에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작업을 벌여나가고 있는 마당에 군대나 민병의 혁명적 이용에 대해 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은 모두 하나의 사고 트렌드이며, 키에프스키가 매번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하나의 동일한 이론적 · 실천적 정치 오류이다. 그는 자신이 자결에만 반대하여 논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결에만 반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논거에는, 동일한 이유에서 민주주의 일반에 반대하여 제시하지 못할 논거는 단 하나도 없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의 의지와 의식에 반하여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그의 모든 기이한 논리적 오류와 혼동 그런데 이것은 자결뿐만 아니라 조국 방위, 이혼, ‘권리일반에도 적용된다 의 진정한 근원은 전쟁이 그의 사고를 억누른 데 있다. 전쟁이 그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완전히 왜곡시키도록 한 것이다.

제국주의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이다. 제국주의는 진보적이며, 제국주의는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그러므로민주주의는 자본주의하에서 실현 불가능하다. 제국주의 전쟁은 뒤떨어진 군주제에서도, 앞서 나가는 공화제에서도 똑같이 모든 민주주의에 대한 극심한 파괴다. ‘그러므로’ ‘권리’(,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당(對當)’할 수 있는 것은 단지사회주의뿐이다. ‘출구는 사회주의밖에 없다. ‘그러므로우리의 최소강령 속의 민주주의적 슬로건들을 내거는 것은, 즉 자본주의하에서 이 슬로건들을 내거는 것은 사기 또는 환상이거나, 사회주의 혁명 슬로건을 모호하게 하는, 또는 뒤로 미루는 것이다.

비록 키에프스키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바로 이것이 그의 모든 불행의 진정한 근원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논리상의 오류이다. 이 오류는 그것이 기본적이라는, 그리고 저자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바로 그 때문에 펑크 난 자전거 타이어처럼 매 걸음마다 터져 나온다.이 때는 조국 방위 문제에서, 저 때는 이혼 문제에서, 또 이 때는 권리에 관한 언사 속에서, 권리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해묵은 노예제도의 파괴가 문제라고 하는 이 멋진(‘권리에 대한 그 심한 경멸로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심한 무능력으로나 어느 모로나 멋진) 언사 속에서 그 오류는 뜻하지 않게 튀어나오는것이다!

이와 같은 언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는, 특히 제국주의는 민주주의를 환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동시에 자본주의는 대중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열망을 낳고, 민주주의적 제도를 만들어내며, 제국주의의 민주주의 부정과 대중의 민주주의 지향 사이의 적대를 격화시킨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오직 경제적 혁명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지, 민주주의적 개조 가장 이상적인것일지라도 에 의해서는 타도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훈련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은행을 접수하지 않고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지 않고서 자본주의를 완전히 때려눕히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조치들은,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생산수단을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체 인민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전체 근로인민 대중을, 즉 프롤레타리아 · ()프롤레타리아와 소농민을 끌어들여서, 그들의 대열을, 그들의 힘을, 그들의 국가업무에의 참가를 민주주의적으로 조직하지 않고서는 실행될 수 없다. 제국주의 전쟁은 3중의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a. 모든 전쟁은 권리를 폭력으로 대체한다. b. 제국주의 자체가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c. 제국주의 전쟁은 공화제를 군주제와 아무 차이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반항의 각성과 성장은, 민주주의적 저항과 소요의 고조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있다. 사회주의는 모든 국가의 사멸을, 따라서 또한 모든 민주주의의 사멸을 가져오지만, 사회주의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주민 가운데 소수인 부르주아지에 대한 폭력과 민주주의의 완전한 발전 , 전체 주민 대중이 모든 국가 업무와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모든 복잡한 문제에 진실로 동등하게, 진실로 전면적으로 참가하는 것 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교의를 잊어버린 키에프스키가 스스로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바로 이들 모순에서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전쟁이 그의 사고력을 너무 억누른 나머지, 그는 제국주의를 포기하라라는 선동적 외침으로 모든 사고하는 노력을 대체해버린다. ‘식민지에서 손을 떼라라는 외침으로, 문명 민족이 식민지에서 손을 떼는것이 경제적 ·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대체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민주주의 문제의 마르크스주의적 해결책은,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준비하고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민주주의적 제도와 열망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용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경제주의자, 톨스토이주의자 등에게 그것은 키에프스키에게 금융자본 시대에민족자결에 대한 옹호가 부르주아적 견해에 대한 부당한 양보로 보이듯이 왕왕 부르주아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견해에 대한 부당한 양보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지에 의해 만들어져 왜곡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도의 이용을 거부하는 것을 통해 기회주의와 싸운다는 것은 기회주의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라고!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이라는 슬로건이야말로 제국주의 전쟁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출구를 안내해주며,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과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을 연결시켜준다. 내란 슬로건은 전시의 특수성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고, 전쟁이 일 시대(전쟁의 시대로) 되어버릴 기세를 보이고 있다 , 기회주의(그것의 평화주의, 합법주의, ‘국 부르주아지에 대한 영합과 함께)에 대립하는 우리 활동의 총체적 성격을 올바르게 고려하고 있는 단 하나의 슬로건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지에 대한 내란은 소수의 유산자를 적으로 하는 무산대중의, 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되고 민주주의적으로 수행되는 전쟁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내란도 불가피하게 권리를 폭력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과 권리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폭력은 완전히 별개의 성격을 가진다. , 그것은 착취자인 부르주아지의 권리를 짓밟으며, 그리고 군대와 후방을 민주주의적으로 조직하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내란은 일거에, 그리고 가장 먼저 은행, 공장, 철도, 대농장 등을 무력으로 수탈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인민에 의한 모든 관료와 장교의 선거제를 도입해야 하고,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를 주민 대중과 완전히 융합시켜야 하며, 식량의 공급, 생산과 분배 등의 관리를 완전히 민주화해야 할 것이다. 내란의 목적은 은행, 공장 등을 탈취하고 부르주아지의 모든 저항 가능성을 분쇄하고 부르주아지의 군대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전시 동안 우리의 군대 내부와 우리의 후방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확대하지 않는다면, 그 목적은 순 군사적 측면에서도, 경제적 측면에서도, 정치적 측면에서도, 어느 한 측면에서도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대중은 우리가 옳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저들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슬로건들로 위장한 전쟁에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위해 싸우게 하려고 여러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성취를 위해 부르주아지를 적으로 하는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전쟁을 수행해야 하고,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현 전쟁은 폭력과 금융적 종속을 수단으로 민족들을 연합체로 결합시키고 융합시키고 있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우리의 내란에서 우리는 루블의 힘이 아니라, 곤봉의 힘이 아니라, 폭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착취자에 대항하는 근로인민의 연대에 의해 민족들을 결합시키고 융합시킬 것이다. 부르주아지에게서 모든 민족의 동등한 권리 선언은 사기가 되어버렸다. 우리에게서는 그 선언이 모든 민족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고 가속화시켜줄 진실이 될 것이다. 민족 간의 민주주의적 관계를 실제로 조직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분리의 자유 없이는 모든 민족의 노동자와 근로인민 일반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내란은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용을 통해서,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적인, 수미일관하게 민주주의적인 조직화로 나아가는 것, 이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이 이외의 활로는 없다. 현실의 생활이 그것을 모르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이외의 다른 활로를 알지 못한다. 민족들의 자유로운 분리와 자유로운 결합을, 우리는 이 길 속에 품어야 한다. 그러한 분리와 결합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되며, 이로 인해 우리의 경제적 목표의 순수함더럽힐까봐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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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Y. L. 피야타코프 (P. 키에프스키)의 글 <금융자본 시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족자결권’>(19168)에 대한 회답으로 쓴 것이다. 이 글의 원고에는 자결에 관한 키에프스키의 논문과 레닌의 회답이라는 레닌의 여백 주가 달려 있다. 두 글 모두 <<스보르니크 소치알 데모크라트>> 3호에 싣기로 되어 있었다. 얼마 뒤에 레닌은 키에프스키에 대한 회답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는 또 하나의 글을 썼다.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3호는 발간되지 못했고, 이 글도 인쇄되지 못했다. 그러나 레닌의 이 글은 재외 거주 볼셰비키와 많은 좌익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초고 상태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2] 네덜란드의 좌파 사회민주당 당원인 롤란트-홀스트가 쓴 <민병이냐, 군비철폐냐?>군비철폐슬로건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글이다. 이 글은 스위스의 사회민주주의 잡지 <<노이에스 레벤>> 10, 11(191510, 11)12(1915I2)에 실렸다.

레닌이 스위스의 청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한 것은 스위스에서 발행된 국제 사회주의 청년조직 연합의 기관지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를 주로 염두에 둔 것이다.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는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좌파 세력을 대변했다. 이 잡지의 3호에 사설 <인민군이냐 군비철폐냐?>가 실렸다.

이 문제에 대한 스칸디나비아(스웨덴과 노르웨이)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태도는, 카를 킬봄(Karl Kilbom)의 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와 세계전쟁>과 아르비드 한센(Arvid Hansen)의 글 <현 시기 노르웨이 노동운동의 몇 가지 측면>에 제시되어 있다. 두 논문 모두 <<스보르니크 소치알 데모크라타>> 2호에 실렸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강령><‘군비철폐슬로건에 대하여>라는 글들에서 군비철폐슬로건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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