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군비철폐’ 슬로건에 대하여

                   

<자료>

             군비철폐슬로건에 대하여[1]
                                   
                                    V. I. 레닌, 191610
 
대부분이 소국이고 현 전쟁에 연루되지 않은 일련의 나라들 예를 들어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위스 에서 민병또는 인민무장이라는 기존 사회민주주의 최소강령 요구를 군비철폐라는 새로운 요구로 대체하는 것에 찬성하는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국제 청년 조직의 기관지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 3호에 군비철폐에 찬성하는 편집국 논설이 발표되었다.

스위스 사회민주당 대회를 앞두고 작성된, 군사 문제에 관한 그림(R. Grimm)의 테제에서도 군비철폐사상에 대한 양보가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스위스 잡지 <<노이에스 레벤 >>(1915)에서 롤란드 홀스트는 겉으로는 두 요구 간의 화해를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양보를 하고 있다. 국제적 좌파 기관지 <<포어보테>> 2호에 기존의 인민무장 요구를 옹호하는 네덜란드 마르크스주의자 바인코프의 논문이 실렸다. 스칸디나비아의 좌파는, 뒤에 발표된 논문들[2]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군비철폐를 받아들이고 있다. ‘군비철폐가 평화주의의 요소를 담고 있음을 간혹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군비철폐론자들의 입장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해보자.
 
                               I
 
군비철폐 찬성론의 기본 전제 중 하나 이 전제가 언제나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는 이렇다. ‘우리는 전쟁, 즉 모든 전쟁 일반에 반대하며, 우리의 이 견해를 가장 분명하고 명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군비철폐 요구다.’

이것이 왜 틀린 생각인지는 유니우스의 소책자에 대한 나의 논평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독자는 그 논평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3]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자임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전쟁 일반을 다 반대할 수는 없다. 현 제국주의 전쟁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국들 간의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에 전형적인 전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피억압 민족이 그들의 억압자에 대항하여 억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전쟁과 봉기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은 피할 수 없다. 한 나라에서 승리를 거둔 사회주의가 다른 부르주아적 또는 반동적인 나라와의 전쟁은 가능하다.

군비철폐는 사회주의의 이상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그 결과로 군비철폐가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사회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없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는 그 누구든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독재는 직접적으로 폭력에 기초한 국가권력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폭력이 문명 시대 일반에서 그렇듯이 주먹도, 곤봉도 아닌, 군대를 의미한다. ‘군비철폐를 강령에 넣는 것은 우리는 무기 사용에 반대한다고 전면 공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여기에는 일말의 마르크스주의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토론이 주로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독일어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온 군비철폐에 대해 독일어로는 두 개의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양자 간의 차이점을 러시아어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Abrüstung]는 본래, ‘군비축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카우츠키와 그 일파가 이런 의미로, 즉 군축의 의미로 쓰고 있다. 또 하나[Entwaffnung]는 본래, ‘군비철폐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좌파가 군사주의의 폐지, 모든 군사주의적 제도의 폐지의 의미로 쓰고 있다. 이 글에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후자의 요구인데, 일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현재 통용되고 있는 것도 이 후자의 군비철폐요구다.

제국주의 강대국 현 정부를 향한 카우츠키 파의 군축설교는 비속하기 짝이 없는 기회주의다. 그것은 실제로는 감상적인 카우츠키 파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혁명적 투쟁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평화주의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열강의 현 부르주아 정부들이 금융자본의 수천 타래의 실과 그들 정부 상호간의 수천, 수백의 이에 상응하는 (즉 약탈적, 강도적, 또한 제국주의적 전쟁을 준비하는) 비밀조약으로 얽어 매여 있지 않다는 생각을, 그러한 설교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려하기 때문이다.
 
                                    II
 
 무기 사용과 무기 획득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피억압 계급은 노예처럼 취급받아 마땅할 따름이다. 우리가 부르주아 평화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급투쟁과 지배계급 권력을 타도하는 것 말고는 어떤 탈출구도 없고 또한 있을 수도 없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수 없다.

어떠한 계급사회에서도, 그것이 노예제나 농노제에 기초한 것이든, 현재와 같이 임금노동에 기초한 것이든 억압 계급은 항상 무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오늘날의 민병(militia)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에서의 민병조차, 예를 들어 스위스의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한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숙고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초보적인 진실이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예외 없이 파업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 (공화제적-민주주의적 민병을 포함하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주요 사실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앞에 두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군비철폐’ ‘요구를 내걸라고 촉구 받다니! 이것은 계급투쟁 관점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 모든 혁명 사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부르주아지를 쳐부수고 수탈하고 무장해제 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계급에게 가능한 단 하나의 전술이다.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의 객관적 발전 전체로부터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전술이자, 그러한 발전이 지시하는 전술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 시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사적 사명을 배반하지 않고 모든 무기(군비)를 고철더미 속에 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심할 바 없이 이렇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이런 조건이 달성되었을 때뿐이며 확실히 그 이전은 아니다.

현 전쟁이 반동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훌쩍거리며 칭얼대는 소부르주아들 사이에서 공포와 두려움, 일체의 무기 사용과 유혈참사 등에 대한 혐오만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끝이 없는 공포이며, 또한 이제까지 늘 그래 왔다.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반동적인 현 전쟁이 이 사회에게 공포의 끝을 준비시키고 있다면, 우리는 하등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다. 단 하나의 정당한 혁명적 전쟁, 즉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내란이 이 부르주아지 자신에 의해 만인의 눈앞에서 공공연하게 준비되고 있는 현 시기에 군비철폐설교와 요구’, 더 정확하게는 군비철폐 꿈은 바로 절망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생명 없는 회색 이론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세계사적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트러스트의 역할 및 산업에서의 여성고용의 역할, 다른 한편으로는 1871년의 파리코뮌과 러시아의 190512월 봉기다.

부르주아지는 트러스트를 키워서 여성과 아동을 공장으로 내몰아 이들을 혹사, 퇴락시키고 극단의 궁핍으로 몰아넣는 것을 자신의 업무로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요구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것과 싸운다. 그러나 어떻게 싸우는가? 우리는 트러스트와 여성고용이 진보적임을 설명한다. 우리는 수공업 체제로 또는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여성의 가사노동으로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다. 트러스트 등을 통해 전진, 그리고 이것들을 넘어 사회주의로!

이 주장은 객관적 발전을 고려에 넣고 있는 바, 약간의 필요한 변경을 거치면, 오늘날 주민의 군사화(militarization)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날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군사화하고 있다. 내일은 여성의 군사화도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야 한다. 그래 좋다! 전속력으로 진행하라! 더 빨리 나아갈수록 자본주의에 대한 무장봉기에 그만큼 더 가까이 갈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가 파리코뮌의 예를 잊지 않았다면, 어떻게 청년 등의 군사화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생명 없는 이론도 꿈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경제적 · 정치적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시대 및 제국주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사실들의 반복을 야기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유감스러운 사태가 될 것이다.

파리코뮌을 목격한 한 부르주아 관찰자는 18715월에 한 영국 신문에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프랑스 민족이 전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민족일 것인가!” 여성들과 10대 아이들이 남성들과 나란히 파리코뮌에서 싸웠다.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한 다가오는 전투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무장이 빈약한, 또는 비무장한 노동자들이 잘 무장된 부르주아지의 군대에 의해 사살 당하는 것을 그냥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1871년에 했던 것처럼 무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겁먹은 민족들로부터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노동운동으로부터 조만간, 그러나 절대적으로 확실히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시무시한 민족들의 국제적 동맹이 생겨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사회생활 전체가 군사화 되고 있다. 제국주의는 세계의 분할 · 재분할을 위한 강대국들의 격렬한 투쟁이다. 따라서 제국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심지어 중립국 및 소국에서까지 더 한층의 군사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이것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그냥 모든 전쟁과 군사적인 모든 것을 저주함으로써? 그냥 군비철폐를 요구함으로써? 억압받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의 여성들은 그런 수치스런 역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곧 어른이 될 것이다. 너는 총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필요한 군사기술을 제대로 배워라. 현 전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너의 형제인 다른 나라 노동자를 쏘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배반자들이 너한테 시키고 있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지식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싸우기 위하여 이 군사 지식이 필요하다. 기도하고 비는 것으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처부수고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착취와 빈곤과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그것이 필요하다.”

현 전쟁과 관련하여 이러한 선전, 정확히 이와 같은 선전을 회피하겠다면,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혁명,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등등의 멋진 말들을 쓰는 것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
 
                            III
 
 군비철폐론자들은 강령상의 인민무장조항이 더 쉽게 기회주의에 대한 양보에 이른다는 이유로 그 조항에 반대한다. 우리는 앞에서 군비철폐와 계급투쟁의 관계, 군비철폐와 사회혁명의 관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검토했다. 이제 우리는 군비철폐 요구와 기회주의 간의 관계를 검토할 것이다. 군비철폐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 요구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함께 그 요구가 불가피하게 기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투쟁의 활력을 빼앗아간다는 데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투쟁은 지금 인터내셔널이 직면한 주요한 직접적인 문제다.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과 긴밀히 연결되지 않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문구가 아니면 사기이다. 치머발트와 키엔탈의 주된 결함 중의 하나 이 제3인터내셔널의 싹들이 어쩌면 대실패로 끝날지도 모르게 될 주된 이유 중의 하나 는 기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문제가 해결은 고사하고 공공연하게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들과 단절할 필요를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기회주의는 유럽 노동운동에서 일시적으로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기회주의의 양대 색조는 모든 대국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따라서 덜 위험한 조류로서, 플레하노프, 샤이데만, 레기엔, 알베르 토마, 상, 반데르벨데, 하인드먼, 헨더슨 등의 사회제국주의이다. 둘째는 은폐된, 카우츠키 류의 기회주의로서, 독일에서는 카우츠키-하제와 사회민주당 노동자 의원단, 프랑스에서는 롱게, 프레세망, 메이에라 등, 영국에서는 램지 맥도널드를 비롯한 독립노동당의 지도자들, 러시아에서는 마르토프와 치헤이제 등, 이탈리아에서 트레베스를 비롯한 이른바 좌파 개량주의자 등이다.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드러내놓고 직접적으로 혁명에 반대한다. 혁명적 운동의 초기 단계부터 분출까지 계속 반대한다.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정부와 직접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 장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전시산업위원회 참여에 이르기까지 이 동맹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가면 쓴 기회주의자인 카우츠키 파는 노동운동에 훨씬 더 해롭고 위험한데, 왜냐하면 공공연한 기회주의와의 통일 단결에 대한 옹호를 그럴싸한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적표어와 평화주의적 슬로건으로 덮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대 기회주의와의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즉 의회, 노동조합, 파업, 군대 등등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양대 기회주의의 주된 고유한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 전쟁과 혁명 간의 연관이라는 구체적 문제를 비롯한 혁명의 그 밖의 구체적 문제들이 묵살되고 은폐되거나, 또는 경찰의 금지령을 염두에 두고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전전(戰前) 임박한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간의 연관이 무수히 비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모두 (공식적으로는 바젤 선언에서)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군비철폐 요구의 주된 결함은 혁명의 모든 구체적 문제들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비철폐론자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혁명, 비무장 혁명을 지지하는 것인가?
 
                                  IV
 
계속하자. 우리는 결코 개량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적 소요와 대중적 불만의 수많은 분출 및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 전쟁으로부터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가 제2의 제국주의 전쟁을 겪을 슬픈 가능성 최악의 경우에 에 대해서도 무시할 생각이 없다. 우리가 찬성하는 개량의 강령은 기회주의자들을 향해서도 겨누어진 강령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회주의자들에게 개량을 위한 투쟁을 전부 맡겨두고 막연한 군비철폐판타지 속에서 슬픈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다면, 기회주의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것이다. ‘군비철폐는 불유쾌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할 뿐, 그 현실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좌파의 일부 사람들은 조국방위 문제에 대해 충분히 구체적인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태도의 큰 결함이다. ‘일체의조국 방위에 반대한다는 일반명제를 제출하는 것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 방위는 부르주아적-반동적 기만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훨씬 더 옳고, 실천적으로도 비할 바 없이 더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조국 방위에 반대한다는 일반적입장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노동자 당 내에서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적인 기회주의자에게 타격이 되지도 않는다.

민병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그리고 실천적으로 필요한 답을 제시하는 데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찬성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병이 아니라, 오직 프롤레타리아 민병뿐이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스위스, 노르웨이 등등과 같은 나라라 하더라도 이들 나라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병에 대해서도 한 푼도, 한 사람도 안 된다.’ 가장 자유로운 공화제 나라들(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민병이 점점 더 특히 1907년과 1911년에 프로이센 화() 되고 있고, 파업 노동자들을 겨냥한 진압 용도로 이용되는 등 자본의 용병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병사들에 의한 장교 선출, 모든 군법의 폐지, 외국인 노동자와 토착 노동자 간의 동등한 권리(스위스처럼,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일체의 권리를 부정하며 그들을 더욱 더 후안무치하게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특히 중요한 사항)를 요구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해당 나라의, 이를테면 주민 백 명당 하나의 단위로 자발적인 군사훈련 단체를 결성할 권리 등을, 국가가 보수를 부담하는 교관의 자유로운 선거와 함께 요구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노예소유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군사훈련 습득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와 같은 훈련의 필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절박하게 지시하고 있는 바이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준 바, 필연적으로 혁명운동의 그 모든 성공은, 심지어 어느 한 도시, 어느 한 공업지대의 장악이나 군대의 어느 한 부대의 획득과 같은 부분적인 성공조차도,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바로 이와 같은 강령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끝으로, 기회주의를 한낱 강령에 의해 패퇴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며, 오직 행동에 의해서만 패퇴시킬 수 있다. 파산한 제2인터내셔널 최대의, 그리고 치명적인 오류는 그 말이 그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위선적이고 비양심적으로 혁명적 언사를 늘어놓는 습관을 키웠다는 것 (바젤 선언에 대한 카우츠키와 그 일파의 현 태도에 주목하라)이다. 사회적 사상으로서의 군비철폐 즉 어떤 정신병자의 발명품이 아닌, 특정의 사회적 환경에서 나오고 또 그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군비철폐 는 예외적으로 어떤 소국들에서 지배적인 특유의 평온한조건으로부터 나온다. 이 소국들은 꽤 오랫동안 전쟁과 학살이라는 세계의 행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군비철폐론자들이 개진한 주장들을 살펴보면 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소국이고, 우리의 군대는 작다. 열강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또는 저 열강 진영과의 제국주의적 동맹에 강제로 편입되는 것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벽지(僻地)에 평화롭게 남아 우리의 벽지정치를 계속하길 원하며, 군비철폐, 강제력 있는 중재재판소, 영세중립 [벨기에 식의 영세중립, 맞나?] 등을 요구한다.”

초연히 남아 있으려는 소국들의 소시민적 지향, 세계사적인 거대한 전투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그리고 자신의 상대적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완고한 부동상태(不動狀態)로 남아 있으려는 소부르주아적 열망, 이런 것이 일부 소국들에서 군비철폐 사상이 어느 정도 성공과 인기를 거두도록 보장해주는 객관적 사회 환경이다. 이러한 지향과 열망은 물론 반동적이며 전적으로 환상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제국주의는 소국들을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고야 말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스위스의 제국주의적 환경은 객관적으로 노동운동에게 두 가지 경로를 지시한다. 기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와의 동맹 하에 나라를 제국주의 부르주아 관광객들로부터 나오는 이윤 위에서 번성할 공화제적 · 민주주의적인 독점적 연방으로 바꾸려 하고 있고, 평온한독점적 지위를 느긋하게 조용히 지켜가려 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정책이 바로 특권적인 지위에 있는 소국의 특권적인 소수 노동자층이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을 적으로 하여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맺은 동맹의 정책이다. 스위스의 진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스위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와 그 국제적입지(문화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들에 인접해 있다는 것, 스위스가 운 좋게도 자국 독자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고, 3개의 세계어를 사용한다는 사정)를 이용하여 전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분자들이 혁명적 동맹을 확대, 강화하도록 돕고자 애쓰고 있다. 알프스의 매력적인 풍광을 초()평온하게 장사할 수 있는 그 독점적인 지위를, 자국의 부르주아지가 가능한 한 오래 보유하도록 도와주자. 이것이 스위스 기회주의자들의 정책의 객관적 내용이다.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부분들의 동맹이 강고해지도록 돕자. 이것이 스위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의 객관적 내용이다. 불행히도, 이 정책은 아직껏 스위스 좌파에 의해 전혀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고, 1915년 아라우 당대회의 훌륭한 결정(혁명적 대중투쟁의 승인)은 여전히 죽은 문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군비철폐 요구가 스위스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일고 있는 이 혁명적 동향에 부합하는가? 명백히 아니다, 객관적으로 군비철폐 요구는 노동운동의 기회주의적인, 편협한 민족적인 노선에, 소국이 갖는 전망과 시야로 제약된 노선에 부합한다. 객관적으로 군비철폐는 소국들의 극히 민족적인, 고유의 의미로 민족적인 강령이다. 확실히 이것은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적 강령이 아니다.
 
 
  덧붙임 : 기회주의적인 독립노동당의 기관지인 영국의 <<사회주의 평론>>[4] 지난 호(19169) 287쪽에는 이 당의 뉴캐슬 회의 결의가 실려 있다. 어느 정부든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그 어떤 전쟁도, 설사 그것이 명목상’ ‘방위전일지라도 지지하길 거부할 것이라는 결의이다. 그리고 같은 호 205쪽의 편집국 논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성명이 나온다. “우리는 결코 신페인(Sinn Fein) 당의 봉기[1916년의 아일랜드 봉기]에 찬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어떤 형태의 군사주의와 전쟁에도 찬성하지 않는 것과 똑같이 어떠한 무장봉기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소국이 아니고 대국의 이들 반군사주의자’, 이와 같은 군비철폐론자가 최악의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들이 봉기를 군사주의와 전쟁의 일 형태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이론상 지극히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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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610월에 집필한 이 글 <‘군비철폐슬로건에 대하여>9월에 독일어로 집필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군사강령>과 많은 부분 내용이 중복된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군사강령>은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출판물에 발표할 계획으로 집필한 것인데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했다. 레닌은 이 글을 러시아어로 출판하면서 얼마간 재편집해서 냈는데, 그것이 이 글 <‘군비철폐슬로건에 대하여>. 19179월 및 10월에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의 기관지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 편집국은 레닌의 승낙 하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 글을 독일어 그대로 이 잡지에 실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이라는 제목은 이 잡지 편집국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주
 
[2] 카를 킬봄(Karl Kilbom)의 논문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와 세계전쟁> 및 아르비드 한센(Arvid Hansen)의 논문 <노르웨이에서 현 단계 노동운동의 몇 가지 특징>을 가리킨다. 두 논문 모두 <<스보르니크 소치알 데모크라타>> 2(191612)에 실렸다.
 
[3] <유니우스 팜플렛에 대하여>를 보시오.
 
[4] The Socialist Review 1908년부터 1934년까지 개량주의적인 영국 독립노동당이 런던에서 발행한 월간지. 1차 대전 중에 램지 맥도널드와 필립 스노우든을 비롯한 그 밖의 인사들이 이 잡지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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