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단계 자본주의가 쇠퇴·사멸해가는 자본주의이고, 2008년 대공황으로 그 뚜껑이 열린 현 역사적 시기는 자본주의 쇠퇴·사멸이 가속화하는 시기라고 성격규정 하자 당시 사노위 다수파를 비롯한 좌파 일각에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왔다. “레닌이 100년 전에 제국주의를 쇠퇴·사멸해가는 자본주의라고 했는데, 지금도 쇠퇴 사멸해가고 있다면 그럼 그때부터 계속해서 100년 동안 쇠퇴·사멸하고 있다는 거냐?” 아래 글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2008년 공황이 한창 진행되던 2011년에 제출된 글이다.
쇠퇴·사멸해가는 자본주의:
“100년 동안 쇠퇴·사멸하고 있다는 거냐?”
‘금융위기’라고 불리는 현 위기 (2008년 공황)의 본질적 성격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이다. 왜 체제 위기인가? 산업순환 위기 (주기적 과잉생산 공황)를 넘어 역사적으로 1973년 이래 계속되어 온 구조적인 과잉축적 모순이 더 이상 봉합되지 못하여 마침내 폭발한 위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구조적 위기
최근 30여 년 동안만 보더라도 7년 내지 10년에 한 번 씩 터져 나오는 순환적 공황들이 3-4 차례 있었지만, 자본가계급이 대대적인 경기부양과 거품경제를 일으켜 한 두 해만에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현재의 공황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대의 공황”,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라고 저들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천문학적인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책 (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으로도 틀어막지 못한 채 지금까지 4년째 계속되고 있고, 나아가 심화되고 있다. (2009년 하반기에서2010년 중반 동안 일시적으로 회복의 기미들이 미약하게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세계경제 위기는 끝났다’라고 잠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말해서 현 위기는 순환적 위기에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가 중첩된 것이다. ‘역사적’이라 함은 7-10년의 산업적 주기 (‘경기변동’ 주기)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통해 역사적으로 (자본축적의 경제적 추세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투쟁, 제국주의 국제관계 등의 정치 · 사회적 추세들을 포함한 구체 역사적 조건들을 매개하여) 누적되어 온 구조적 성격의 위기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주기적 공황은 무수히 많았지만 ‘세계 대공황’이라 할 만한 구조적 · 역사적 위기는 이번 위기까지 포함해서 모두 3차례이다. ①1929-38년 ②1973-82년 ③ 2007년-현재.
첫 번째 대위기는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을 거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을 통해 과잉축적 자본을 확실히 파괴, 청산함으로써 1945-73년의 장기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장기호황 기간을 거치며 이윤율이 저하되고 그에 따라 생산에 투자되지 못한 잉여자본이 비생산적 투기로 몰리면서 거대한 투기 거품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한 인플레와 여기에 기름을 부은 1973년 오일쇼크(유가 폭등)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가 정부들이긴축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투기 거품을 꺼뜨리면서 공황을 폭발시켰다. 이것이 두 번째 대위기이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의 이 두 번째 대위기 동안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가치 폭락, 기업도산, 실업급증 등 과잉자본 파괴 과정이 진행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만큼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이윤율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대위기는 첫 번째 대위기에 비해 과잉자본 파괴 면에서 훨씬 덜 폭력적인 공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1930년대와 같은 계급투쟁 격화와 파시즘 · 세계대전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과잉축적 자본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에 와서는 동구권과 중국이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통합되면서 미국 주도의 본격적인 세계화(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 들어갔다. 이 1980년대 초부터 2007년까지 약 30년간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의 성격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강화와 금융투기 거품을 통해 이윤율 하락 및 과잉축적 위기(1973년-82년의 공황으로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 과잉축적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위기를 누적적으로 가중시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되고 가중된 구조적 과잉축적 위기가 이번 2007년-08년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자동붕괴론? 파국론?
현재 우리는 이 세 번째 대위기의 초입부를 통과하고 있다. 말이 ‘초입부 통과’이지 이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은 정리해고, 임금·연금 삭감, 단협 개악, 비정규직 양산, 청년실업 만연 등 자본의 위기를 온통 전가 당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전가에 맞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체적으로 방어적 성격의 투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아무리 깊은 위기라 하더라도 저절로 죽어 없어지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 같은 없다. 자본주의는 내재적인 붕괴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저절로 죽어 없어진다는 의미의 ‘자동붕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난조로 말하는 소위 자동붕괴론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이 앉아서 위기 전가를 당하길 거부하고 저항에 나서서 이 저항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끌어올려 자본가계급의 정치권력을 빼앗을 때만이 자본주의를 폐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희생시킨 폐허 위에서 언제든 다시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무한정 계속되는 상시적 영구적 위기, 계급투쟁으로 매개되지 않는, 자동붕괴를 눈앞에 둔 무매개적 위기 같은 것은 없다. 파국론이나 자동붕괴론은 혁명적 맑스주와 양립할 수 없다.
현 위기는 첫 번째 대위기 못지않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첫 번째 세계대공황 시기에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타락 등 노동자계급 지도력 위기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계급투쟁에 패배하여 파시즘과 전쟁 같은 야만을 불러들이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다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동적인 활력을 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이미 쇠퇴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의 사멸하는 자본주의로서,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에 있는 자본주의였다. 다만 문제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 낼 것인가 였다.
사노위 다수파를 비롯한 일부 좌파 단위들이 제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장기호황을 누렸다는 것을 근거로 레닌을 비롯한 초기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쇠퇴·사멸해가는 자본주의’ 론은 자동붕괴론 또는 파국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트로츠키가 1938년에 제출한 이행강령 (즉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의 임무’)도 이런 자본주의 파국론에 기초한 문서라고 비판한다.
‘쇠퇴·사멸해가는 자본주의’ 론이 자본가계급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는 사회주의혁명 없이, 즉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 없이 자본주의가 저절로 붕괴한다는 자동붕괴론이었는가?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론, 쇠퇴기 자본주의론은 사회주의혁명의 물질적 전제로서 생산력 발전이 충분히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숙을 넘어서 썩어 문드러져 갈 정도로 (즉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와서)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가능성과 그 절박성을 지시하는 것이지 자동붕괴의 임박함을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당시 자본주의는 수천만 명을 살육한 제2차 대전 같은 파국적인 야만을 거쳐서만 오직 전후호황 같은 일시적인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걸 가지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이니 혁신능력이니 자기조절 능력이니 하면서, ‘제국주의 단계의 사멸해가는 자본주의’를 파국론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얼마나 속물적인가. 사후적으로 자본주의의 소생과 장기호황만 볼 뿐, 그러한 결과를 가능케 한 당시 계급투쟁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 제국주의 세계대전 등과 같은 야만의 과정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 이러한 속물적 태도는 ‘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역적’이라는 식의 실용주의적 결과론에 불과하다.
레닌이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론을 제출하면서 동시에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선언하고 사회배외주의적 기회주의 및 카우츠키 중도주의와의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제3인터내셔널 (코민테른)를 창설하려 한 사실을 우리가 직시한다면 자동붕괴론 따위의 비난은 가당치 않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가 이행강령을 제출하고 제4인터내셔널을 창설하여 노동자계급 지도력 위기를 해결하려 한 것도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 자동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단말마적 고통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사회주의혁명이 없다면 그 고통이 모두 인류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가가 바로 수천만 명을 살육한 2차 세계대전 아니었던가. 지도력 위기를 해결하고 사회주의혁명을 가능케 했다면 그러한 제국주의 세계전쟁 같은 야만은 없었을 것이다.
현 위기와 세계화 시기와 제국주의 시대
그러면 다시 현 위기로 돌아와서, 이 현 위기가 쇠퇴·사멸해가는 자본주의와 어떤 연관 속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많은 좌파 단위들이 현 위기 (2008년 공황)에 대해 그저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과잉축적 위기”라는 형식적 규정만 되뇔 뿐 자본주의 역사 및 자본주의 발전 단계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바의 독점자본주의 단계) 속에 이 위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윤율 하락/과잉축적 위기는 사실 위 3개의 대위기만이 아니라 모든 순환적 공황 (소위기)의 공통적인 본질이다. 예를 들어 2001년의 IT 공황 (닷컴 공황; 인터넷 공황)이나 1994년의 채권시장 대폭락 공황도 그 밑바탕에는 모두 과잉축적 위기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현 위기가 이러한 단순한 순환적 공황과 달리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인 것은 그냥 과잉축적 위기가 아니라 ‘역사적· 구조적’ 과잉축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순환적 공황들 속에서 충분히 청산되지 못한 과잉축적 자본이 매 순환을 거쳐 누적, 가중되면서 세계대공황의 양상으로 폭발하는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현 위기에 대해 그냥 ‘과잉축적 위기다’라는 식의 앙상한 형식적 규정의 반복으로는 아무 구체 특수적 내용을 담지 못하는 추상적 원리 진술을 넘지 못한다. 원리 확인을 넘어 현 위기가 1973년-82년의 위기 및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와 어떠한 구체 역사적 연관 속에 있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고유한 축적위기의 맥락 속에 현 위기를 위치지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글 <현 국가부채 위기와 자본주의 체제 위기>에서 1973년-82년의 위기 이후 현 위기 직전까지 이삼십년 동안의 세계화 시기에 어떻게 세계경제가 과잉축적과 이윤율 하락, 위기의 가중화 ․ 누적화 경향, 생산력의 정체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위기에 빠져 들었는지를 실물적으로 제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 바 있다.
“이와 같이 2008년-09년의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는 앞선 자본주의 시기, 특히 세계화 시기에 축적된 모순의 결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1948년-72년)처럼 1992년 이후의 새로운 세계화 시기도 거대한 생산능력의 파괴로 시작했다. 이윤을 가져올 수 없는 기업(특히 러시아와 중국의)이 폐쇄되고 심지어는 아예 폐기되었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1939년-45년의 훨씬 더 큰 파괴와는 달리 세계화 시기의 시작 때의 파괴 과정은 과잉축적된 자본을 충분히 제거하는 효과를 가지지 못했고,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생산력 정체 경향을 들어내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1992년-2007년의 세계화 시기는 결코 세계적 규모로의 생산력 발전이 지배적인 추세가 되는 자본주의 팽창기가 되지 못했다. 독일과 일본에서의 장기불황과 정체,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격렬한 가치파괴 공황,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미약한 회복 -- 미국 경제의 핵심적인 잉여가치 생산부문들을 쇠퇴하는 상태로 남겨 놓은, 또는 매우 부진하고 완만한 성장세로 머무르게 한 그 미약한 회복 -- 을 고려할 때, 결론적으로 1992년-2007년의 세계화 국면은 1973년-92년 국면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생산력 정체 경향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화 시기는 결코 상향 발전의 ‘장기파동’ 국면이 아니다. 전후 호황이 종식된 1973년 이래 자본주의 체제를 괴롭혀 온 고질병인 구조적 과잉축적이 근본적으로 극복이 되지 못한 시기이다. 구 ‘제3세계’에 속한 신흥국들 및 중국에서 생산의 광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시기는 가장 발달한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경제를 구조적인 과잉축적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었다. 가장 발달한 경제들에서의 지배적인 추세는 여전히 정체 경향이었다.
세계화 시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번영’과 ‘역동성’을 보여준 시기이기는커녕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정립해 낸 제국주의 시대의 주 특징들(기생성, 독점, 부후화와 쇠퇴, 세계의 분할 및 재분할)이 확장되고 전면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하게 레닌이 다음과 같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 -- 자본주의의 쇠퇴 및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시대 -- 에 속한 한 시기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정의로 시작해야 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특수역사 단계이다. 제국주의의 고유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이다. 기생적인 또는 부후 쇠퇴하는 자본주의이다. 사멸하는 자본주의이다. 독점에 의한 자유경쟁의 대체가 근본 특징,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레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
이행 시대로서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인 성격은, 자본주의가 생산력 및 생산의 사회화를 크게 높여냈기 때문에 이것이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의 충돌 -- 너무 첨예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붕괴를 일정에 올릴(물론 영구적으로는 아니지만) 정도의 충돌 -- 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한 번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에 직면한다. 현재의 극적인 경제위기는 레닌 제국주의론의 타당성을 완전하게 확인해 준다.
끊임없이 진전되고 있는 생산의 사회화와 국제화는 자본주의가 역사적 퇴물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쇠퇴하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의 풍부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레닌의 다음과 같은 규정은 지금 특히 옳다.
‘왜 제국주의가 사멸해가는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의 자본주의인지는 분명하다.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해 나온 독점은 이미 죽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주의로의 그 이행의 시작이다. 제국주의에 의한 노동의 거대한 사회화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는 무르익어서 썩어문드러져 가는 자본주의 시대, 즉 막 붕괴하려 하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길을 만들 정도로 충분히 성숙한 자본주의 시대이다.’ [레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내 분열>]
세계화 시기의 특수한 특징들이 우리 시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의 본질적 특징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제국주의 시대 내의 한 시기로서 세계화 국면은 쇠퇴하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한으로까지 축적한 시기이다. 현 위기가 순환적 위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인 것은, 제국주의 단계의 최근 국면으로서의 세계화 시기에 이 누적되고 극대화된 모순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현 위기를 낳은 모순을 축적해 온 1992년-2007년의 세계화 시기에 대해 사노위 다수파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자본주의 쇠퇴기에 속한 시기인가 아니면 상승과 역동성의 시기인가? 사노위 다수파는 현 위기를 세계화 시기라는 바로 직전의 자본주의 주요 역사 시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제시하길 회피하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 독점자본주의 단계 속에 현 위기를 위치지어 규정 내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사노위 다수파는 세계화 시기가 제국주의 시대의 주 특징들(금융 기생성, 독점, 부후화와 쇠퇴)이 확장되고 전면화 한 시기임을 부정한다. 개량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자기조절 능력에 바탕한 ‘세계화의 역동성’론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못 취하고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량주의자들에게 세계화 시기는 생산력이 거대하게 발전한 ‘역동적인 기술 진보’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현 위기는 난데없이 터져 나온 위기이고, 당혹스런 위기이다.
자본주의의 쇠퇴와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
제국주의 시대/ 독점자본주의 단계를 부정하고, 따라서 사멸하는 자본주의(쇠퇴하는 자본주의)론을 거부하는 사노위 다수파로서는 이 자본주의 최고, 최후 단계에 속한 한 시기로서의 세계화 시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 위기를 ‘사멸하는 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라는 역사적 시대와 연관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을 위한 이행요구’를 혁명적 정세에서나 가능한 강령이라고 기각하고, ‘노동자 정방대 · 민병대’, ‘노동자평의회’, ‘봉기’ 등의 강령 조항들을 “블랑키주의적 좌익맹동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사노위 다수파는 말로는 ‘자본주의 철폐’를 내걸고 있지만, 정작 그 철폐를 실천적 일정에 올려놓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100년 동안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냐?”고 힐난하며 조롱한다. 자본주의가 그 동안 위기 속에서도 거듭 자기혁신 능력을 발휘해 위기를 해처나가며 발전해 왔는데 무슨 ‘쇠퇴’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말한다. 사회주의혁명으로 이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지 못한다면 100년을 넘어 앞으로도 계속 이 쇠퇴 ·부후화의 고통, 사멸의 고통,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 공황과 전쟁과 환경파괴의 재앙으로 온통 인류에게 전가될 것이다. 그래서 100년 전 일차대전 전야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제기했고, 트로츠키도 2차대전 전야에 이행강령을 제출하면서 인류의 위기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고 말했다. 이들 당시의 혁명가들과 노동자계급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 앞에도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문제, ‘인류의 위기/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 문제가 던져져 있다. ‘자본주의 철폐’를 강령으로 내걸고 있는 사회주의 조직이라면 “100년 동안 쇠퇴?” 같은, 자본주의의 자기혁신 능력에 대한 맹신에 기반한 조롱이 아니라 이 문제들을 온몸으로 싸안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한 때 자본들 간의 경쟁을 통해 생산력 발전을 추동했던 생산양식에서 20세기 초부터는 독점의 지배가 더 한층의 발전을 제약하는 경향을 띠게 된 생산양식으로, 즉 소멸기에 들어선 생산양식으로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진전되고 있는 생산의 사회화와 국제화는 자본주의가 역사적 퇴물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생적이고 부패 노후화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의 풍부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100년 동안 쇠퇴하고 있는 것은 이 썩어문드러져 가는 자본주의를 사회주의혁명으로 끝장내는 데 거듭 패배해서이다. 무엇보다도 1930년대 세계대공황 때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 숨통을 끊지 못해서이다.
현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해결하고 개량주의로부터 대중 지도력을 전취하는 혁명정당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의 쇠퇴는 100년이 아니라 그 이상 계속될 것이다. 생산력 발전이 성숙을 넘어 이제 썩어문드러져 가는 단계에 있는 쇠퇴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인류의 위기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 말로는 사회주의혁명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역동적 적응능력을 신봉하여 혁명의 현실성을 보려 하지 않는 대기주의 · 추수주의와의 투쟁은 오늘날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혁명정당 건설투쟁에서 결코 부차적인 과제일 수 없다. 과거 레닌을 비롯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해 카우츠키 중도주의와의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거쳐야만 했던 것처럼.
레닌 <<제국주의론>>과 현 위기
자본론 1권이 발간되고 난 다음 50년 뒤에 레닌은 여러 차례 순환적 위기의 반복을 보고 나서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 반복의 누적적 효과로 인해 자본주의에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그가 내린 첫 번째 결론이다. 자본주의는 한 때는 자본들 간의 경쟁이 추동력이 되어 생산성과 사회 총생산량의 전반적인 증가를 담보하는 생산양식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독점의 지배가 더 한층의 발전을 제약하는 경향을 낳는 생산양식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질적 전환). 이것은 모든 발전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경쟁’ 시대와 비교할 때 자본주의가 이제 그 역사적 쇠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이 <<제국주의론>>을 제1차 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은 혁명적 기간 동안에 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쇠퇴 시대’가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혁명에 의해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끝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끝장 낼 수 있을 것으로 그가 기대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때 이후 거의 100년 뒤인 지금, 자본주의의 그 후 역사를 볼 때 그의 분석과 그의 결론은 틀린 것으로, 허구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는가? 1920년대의 혁명 운동의 패배가 제국주의의 살아남음을 허용했고, 제2차 대전에서의 거대한 파괴 규모가 체제에 새로운 생명 연장을 허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의 사태 전개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지시한다.
한 생산양식의 ‘쇠퇴’는 파멸적인 경향만이 아니라 그 생산양식 내에 다음 생산양식의 기초를 형성할 힘들의 발전 및 성숙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의 생명 연장은 불평등과 빈곤과 환경파괴뿐만 아니라 거대한 모순을 재생산했다. 훨씬 더 고도로 통합된 글로벌 경제/ 훨씬 더 고도로 사회화된 생산체제 對 훨씬 더 협소하게 집중된 사적 소유 사이의 훨씬 더 큰 모순을!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
지난 1백 년 동안 우리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및 증대하는 독점화에 의해 추동된 장기적인 정체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의 패권이 쇠락하고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충돌이 고조되며 전 세계적인 경제적·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고 있다.
명백히 이러한 결과들은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 모델과 완전히 부합한다. 독점 부르주아지는 생산 단위·부문들을 지배하는데, 가장 선진적인 기술로, 최고도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 가장 강력한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지배한다. 이러한 과잉축적은 자본수출과 기생성, 그리고 주식, 부동산, ‘금융파생상품’ 등의 투기를 추동한다. 가치 파괴 공황이 제국주의 간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세계의 분할 및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경쟁적인 투쟁을 격화시킨다. 민족국가들이 서로 가치파괴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 희생을 경쟁 상대방 및 종속국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서로 밀치고 당기면서 충돌하고 있다.
세계화의 모순과 현 위기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옳음을 더 한층 입증하는 사례이다.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승리와 동구권의 최종 붕괴를 활용하여 세계를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편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윤율을 유지하고 제국주의의 고유한 정체 경향에 대처하고자 모든 “상쇄 조치들”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2007-09년 공황이 현재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역동성을 단지 일시적으로밖에 회복할 수 없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세계질서는 레닌의 모델에 닮아 있다. 당시 100년 전보다도, 그리고 50년 전보다도. 그리하여 우리 앞에 놓인 전망은 확실히 자본주의 체제의 증대된 불안정 및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연속이다. 그러나 또한 레닌의 결론,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의 전야이다”라는 결론도 놓쳐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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