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군사강령[1]
V. I. 레닌, 1916년 9월
현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 방위’ 운운하는 사회배외주의적 거짓말에 맞서 싸우고 있는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스위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는 ‘민병’ 또는 ‘인민 무장’이라는 기존 사회민주주의 최소강령 요구를 ‘군비철폐’라는 새로운 요구로 대체하는 것에 찬성하는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2]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였고, 3호에서 군비철폐를 지지하는 편집국 논설을 발표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그림(R. Grimm)의 최근 테제[3]에도 ‘군비철폐’ 사상에 대한 양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정기간행물 <<노이에스 레벤>>[4]과 <<포어보테>>에서 토론이 시작되었다.
군비철폐론자들의 논거를 좀 더 면밀히 검토해보자.
I
그들의 기본적인 논거는 군비철폐 요구가 모든 군사주의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가장 명확하고 가장 결정적이며 가장 일관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본 논거에 군비철폐론자들의 기본 오류가 있다.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자임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모든 전쟁을 다 반대할 수는 없다.
첫째, 사회주의자는 예전부터 혁명전쟁의 반대자인 적이 없고, 또한 결코 반대자일 수가 없다. 제국주의 ‘대’국들의 부르주아지는 철두철미 반동적으로 되었고, 이 부르주아지가 지금 벌이고 있는 전쟁을 우리는 반동적인 전쟁, 노예소유주들의 범죄적인 전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전쟁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 이 부르주아지에게 억압받고 종속되어 있는 민족들, 또는 식민지 민족들이 해방을 위해 벌이는 전쟁은? <<인터나치오날레>> 그룹의 테제 제5절을 보면, “이 고삐 풀린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전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히 틀렸다.
이 ‘고삐 풀린 제국주의’의 세기인 20세기의 역사는 식민지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세계의 민족 대다수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자들인 우리 유럽인들이 몸에 밴 야비한 유럽적 배외주의로부터 ‘식민지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많은 경우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전쟁 또는 민족봉기다. 제국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가장 낙후된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속화시키고, 그럼으로써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을 확대, 격화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이 사실로부터 불가피하게 제국주의는 많은 경우 민족전쟁을 낳게 마련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위에 인용한 ‘테제’를 자신의 소책자에서 옹호하고 있는 유니우스[5](Junius)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느 한 제국주의 대국에 대항하는 어떠한 민족전쟁도 그 대국과 경쟁하고 있는 타 제국주의 대국의 간섭을 초래하며, 그에 따라 모든 민족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전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거도 옳지 않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언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의 많은 식민지전쟁이 그러한 경로를 밟지 않았다. 그리고 예를 들어, 현 전쟁이 모든 교전국들의 철저한 힘의 소진과 피폐로 끝날 경우, 전후에 “어떠한” 민족적, 진보적, 혁명적 전쟁 — 이를테면 중국이 인도와 페르시아와 샴 등과 동맹하여 열강에 대항하여 벌이는 전쟁 같은 — 도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한다면, 정말 우습지 않은가.
제국주의하에서 민족전쟁의 가능성 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이론상으로 틀렸고, 역사적으로 명백히 오류이며, 실천적으로는 유럽 배외주의에 다름 아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민족에 속하는 우리가 피억압 민족에게 당신들은 ‘우리’ 민족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는 셈이다!
둘째, 내란도 똑같이 전쟁이다. 다른 어떤 전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자는 내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계급사회에서도 내란은 계급투쟁의 자연스러운 — 그리고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불가피한 — 계속이자 발전이며 격화이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혁명이 확인한 바이다. 내란을 거부하거나 망각하는 것은 극단적인 기회주의로 빠져드는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을 방기하는 것이다.
셋째,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일거에 모든 전쟁 일반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발전은 나라마다 극히 불균등하게 진행된다. 상품생산하에서는 이와는 다른 식으로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나온다. 사회주의는 처음에 하나의 나라 또는 수개의 나라에서 승리할 것이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라들은 한동안 부르주아적인 또는 전(前)부르주아적인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찰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승리한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려는 다른 나라 부르주아지 쪽에서의 직접적인 기도까지도 필히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 쪽에서의 전쟁은 정당한 전쟁, 정의(正義)의 전쟁이 될 것이며, 사회주의를 위한 전쟁, 부르주아지로부터의 다른 민족들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 될 것이다. 엥겔스가 카우츠키에게 보낸 1882년 9월 12일자 편지에서 이미 승리한 사회주의가 ‘방위전쟁’을 벌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분명히 언명했을 때, 그는 완전히 옳았다.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다른 나라의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방위전쟁이었다.
우리가 단지 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여 완전히 쳐부수고 수탈한 뒤에야 비로소 전쟁은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 즉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가장 어려운 일, 그리고 가장 많은 투쟁을 필요로 하는 일인 부르주아지의 반항을 진압하는 것을 우리가 회피하거나 얼버무린다면, 이는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잘못된 — 완전히 비혁명적인 — 것이다. ‘사회주의적’ 설교사들과 기회주의자들은 미래의 평화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꿀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아름다운 미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격렬한 계급투쟁과 계급전쟁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숙고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와 구별된다.
말에 넘어가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조국 방위’라는 말이 많은 이들에게 가증스러운 이유는 공공연한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 파 모두가 이 말을 현 약탈 전쟁에 관한 부르주아적 거짓말을 덮어 감추고 얼버무리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가 더 이상 정치 슬로건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 전쟁에서 ‘조국 방위’틀 인정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현 전쟁을 ‘정의의’ 전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익이 되는 전쟁으로 인정한다는 것, 바로 그것인데 왜냐하면, 되풀이하건대, 어떠한 전쟁의 경우에도 침략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대국에 대한 피억압 민족의 전쟁에서 피억압 민족 측의 ‘조국방위’를 부인한다면, 또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국가의 갈리페[6]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측의 ‘조국 방위’를 부인한다면, 이는 순전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모든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오류이다. 현 제국주의 전쟁은 양대 열강의 제국주의적 정치의 계속이며, 이 정치는 제국주의 시대의 제 관계의 총체에 의해 생겨나고 배양되었다. 그러나 또한 이 시대 자체가 필연적으로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정치를,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정치를 낳고 배양하기 마련이며, 그 결과로 첫째 혁명적 민족봉기와 민족전쟁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둘째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과 봉기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셋째 그 두 종류의 혁명전쟁의 결합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또한 낳고 배양하기 마련이다.
II
여기에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고려를 덧붙여야 한다.
무기 사용과 무기 획득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피억압 계급은 노예처럼 취급받아 마땅할 따름이다. 우리가 부르주아 평화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급투쟁을 통하는 것 말고는 어떤 탈출구도 없고 또한 있을 수도 없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수 없다. 어떠한 계급사회에서도, 그것이 노예제나 농노제에 기초한 것이든, 현재와 같이 임금노동에 기초한 것이든 억압 계급은 항상 무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오늘날의 민병(militia)도 —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에서의 민병조차, 예를 들어 스위스의 민병조차도 —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한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숙고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초보적인 진실이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주요 사실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앞에 두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군비철폐’(disarmament; 무장해제) ‘요구’를 내걸라고 촉구 받다니! 이것은 계급투쟁 관점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 모든 혁명 사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부르주아지를 쳐부수고 수탈하고 무장해제(disarm)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arming),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계급에게 가능한 단 하나의 전술이다. 자본주의적 군사주의의 객관적 발전 전체로부터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전술이자, 그러한 발전이 지시하는 전술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 시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사적 사명을 배반하지 않고 모든 무기(군비)를 고철더미 속에 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심할 바 없이 이렇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이런 조건이 달성되었을 때뿐이며 확실히 그 이전은 아니다.
현 전쟁이 반동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훌쩍거리며 칭얼대는 소부르주아들 사이에서 공포와 두려움만을, 일체의 무기 사용과 유혈참사 등에 대한 혐오만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끝이 없는 공포이며, 또한 이제까지 늘 그래 왔다.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반동적인 현 전쟁이 이 사회에게 공포의 끝을 준비시키고 있다면, 우리는 하등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다. 단 하나의 정당한 혁명적 전쟁, 즉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내란이, 이 부르주아지 자신에 의해 만인의 눈앞에서 공공연하게 준비되고 있는 현 시기에 ‘군비철폐’ 설교와 ‘요구’, 더 정확하게는 군비철폐라는 꿈은 바로 절망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생명 없는 회색 이론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세계사적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트러스트의 역할 및 산업에서의 여성고용의 역할, 다른 한편으로는 1871년의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1905년 12월 봉기.
부르주아지는 트러스트를 키워서 여성과 아동을 공장으로 내몰아 이들을 혹사, 퇴락시키고 극단의 궁핍으로 몰아넣는 것을 자신의 업무로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요구’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것과 싸운다. 그러나 어떻게 싸우는가? 우리는 트러스트와 여성고용이 진보적임을 설명한다. 우리는 수공업 체제나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여성의 가사노동으로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다. 트러스트 등을 통해 전진, 그리고 이것들을 넘어 사회주의로!
이 주장은, 약간의 필요한 변경을 거치면, 오늘날 주민의 군사화(militarization; 군사교육 등)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날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군사화하고 있다. 내일은 여성의 군사화도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야 한다. 그래 좋다! 전속력으로 진행하라! 더 빨리 나아갈수록 자본주의에 대한 무장봉기에 그만큼 더 가까이 갈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가 파리 코뮌의 예를 잊지 않았다면, 어떻게 청년 등의 군사화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생명 없는 이론’도 꿈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경제적 · 정치적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시대 및 제국주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사실들의 반복을 야기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유감스러운 사태가 될 것이다.
파리코뮌을 목격한 한 부르주아 관찰자는 1871년 5월에 한 영국 신문에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프랑스 민족이 전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민족일 것인가!” 여성들과 10대 아이들이 남성들과 나란히 파리코뮌에서 싸웠다.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한 다가오는 전투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무장이 빈약한, 또는 비무장한 노동자들이 잘 무장된 부르주아지의 군대에 의해 사살 당하는 것을 그냥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1871년에 했던 것처럼 무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겁먹은 민족들로부터 —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노동운동으로부터 一 조만간, 그러나 틀림없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시무시한 민족들’의 국제적 동맹이 생겨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사회생활 전체가 군사화 되고 있다. 제국주의는 세계의 분할 · 재분할을 위한 강대국들의 격렬한 투쟁이다. 따라서 제국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심지어 중립국 및 약소국에서까지 더 한층의 군사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이것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그냥 모든 전쟁과 군사적인 모든 것을 저주함으로써? 그냥 군비철폐를 요구함으로써? 억압받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의 여성들은 그런 수치스런 역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곧 어른이 될 것이다. 너는 총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필요한 군사기술을 제대로 배워라. 현 전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너의 형제인 다른 나라 노동자를 쏘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배반자들이 너한테 시키고 있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지식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싸우기 위하여 이 군사 지식이 필요하다. 기도하고 비는 것으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처부수고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착취와 빈곤과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그것이 필요하다.”
현 전쟁과 관련하여 이러한, 정확히 이와 같은 선전을 회피하겠다면,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혁명,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등등의 멋진 말들을 쓰는 것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
III
군비철폐론자들은 강령상의 ‘인민 무장’ 조항이 더 쉽게 기회주의에 대한 양보에 이른다는 이유로 그 조항에 반대한다. 우리는 앞에서 군비철폐와 계급투쟁의 관계, 군비철폐와 사회혁명의 관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검토했다. 이제 우리는 군비철폐 요구와 기회주의 간의 관계를 검토할 것이다. 군비철폐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 요구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함께 그 요구가 불가피하게 기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투쟁의 활력을 빼앗아간다는 데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투쟁은 지금 인터내셔널이 직면한 주요한 직접적인 문제다.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과 긴밀히 연결되지 않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문구가 아니면 사기다. 치머발트와 키엔탈[7]의 주된 결함 중의 하나 — 이 제3인터내셔널의 싹들이 어쩌면 대실패로 끝날지도 모르게 될 주된 이유 중의 하나 — 는 기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문제가 해결은 고사하고 공공연하게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들과 단절할 필요를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기회주의는 유럽 노동운동에서 一 일시적으로 一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기회주의의 양대 색조는 모든 대국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따라서 덜 위험한 조류로서, 플레하노프, 샤이데만, 레기엔, 알베르 토마, 상바, 반데르벨데, 하인드먼, 헨더슨 등의 사회제국주의이다. 둘째는 은폐된, 카우츠키 류의 기회주의로서, 독일에서는 카우츠키-하제와 사회민주당 노동자의원단[8], 프랑스에서는 롱게, 프레세망, 메이에라 등, 영국에서는 램지 맥도널드를 비롯한 독립노동당의 지도자들, 러시아에서는 마르토프와 치헤이제 등, 이탈리아에서 트레베스를 비롯한 이른바 좌파 개량주의자 등이다.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드러내놓고 직접적으로 혁명에 반대한다. 혁명적 운동의 초기 단계부터 분출까지 계속 반대한다.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정부와 직접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 장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러시아의) 전시산업위원회[9] 참여에 이르기까지 이 동맹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가면 쓴 기회주의자인 카우츠키 파는 노동운동에 훨씬 더 해롭고 위험한데, 왜냐하면 공공연한 기회주의와의 통일 단결에 대한 옹호를 그럴싸한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적’ 표어와 평화주의적 슬로건으로 덮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대 기회주의와의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즉 의회, 노동조합, 파업, 군대 등등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 양대 기회주의의 주된 고유한 특징은 현 전쟁과 혁명 간의 연관이라는 구체적 문제를 비롯한 혁명의 그 밖의 구체적 문제들이 묵살되고 은폐되거나, 또는 경찰의 금지령을 염두에 두고 다루어진다는 데 있다. 더군다나 전전(戰前)에 이 임박한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간의 연관이 무수히 — 비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모두 (공식적으로는 바젤 선언[10]에서) —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군비철폐 요구의 주된 결함은 혁명의 모든 구체적 문제들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비철폐론자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혁명, 비무장 혁명을 지지하는 것인가?
계속하자. 우리는 결코 개량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적 소요와 대중적 불만의 수많은 분출 및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 전쟁으로부터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가 제2의 제국주의 전쟁을 겪을 슬픈 가능성 — 최악의 경우에 — 에 대해서도 무시할 생각이 없다. 우리가 찬성하는 개량의 강령은 기회주의자들을 향해서도 겨누어진 강령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회주의자들에게 개량을 위한 투쟁을 전부 맡겨두고 막연한 ‘군비철폐’ 판타지 속에서 슬픈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다면, 기회주의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것이다. ‘군비철폐’는 불유쾌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할 뿐,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강령에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1914-16년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 방위 슬로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르주아 거짓말의 도움을 빌어 노동운동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구체적 문제에 대한 이와 같은 구체적 대답이 군비철폐 요구와 ‘일체의’ 조국 방위 거부보다 이론적으로 더 올바를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며,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더 견딜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말하겠다. “모든 제국주의 열강 —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미국 — 의 부르주아지는 너무도 반동적으로 되었고 너무도 세계 지배에 혈안이 되어 있어, 이들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벌이는 그 어떠한 전쟁도 반동적인 전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전쟁들 모두에 반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저지하기 위한 봉기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이러한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라야 하며, 그 패배를 혁명적 봉기를 위해 이용해야 한다.
민병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찬성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병이 아니라, 오직 프롤레타리아 민병뿐이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스위스, 노르웨이 등등과 같은 나라라 하더라도 이들 나라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병에 대해서도 ‘한 푼도, 한 사람도 안 된다’(not a penny, not a man). 가장 자유로운 공화제 나라들(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민병이 점점 더 — 특히 1907년과 1911년에 — 프로이센 화(化) 되고 있고, 파업 노동자들을 겨냥한 진압 용도로 이용되는 등 자본의 용병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병사들에 의한 장교 선출, 모든 군법의 폐지, 외국인 노동자와 토착 노동자 간의 동등한 권리(스위스처럼,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일체의 권리를 부정하면서 그들을 더욱 더 후안무치하게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특히 중요한 사항)를 요구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해당 나라의, 이를테면 주민 백 명당 하나의 단위로 자발적인 군사훈련 단체를 결성할 권리 등을, 국가가 보수를 부담하는 교관의 자유로운 선거와 함께 요구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노예소유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군사훈련 습득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와 같은 훈련의 필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절박하게 지시하고 있는 바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준 바, 필연적으로 혁명운동의 그 모든 성공은, 심지어 어느 한 도시, 어느 한 공업지대의 장악이나 군대의 어느 한 부대의 획득과 같은 부분적인 성공조차도,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바로 이와 같은 강령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끝으로, 기회주의를 단지 강령에 의해 패퇴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며, 오직 행동에 의해서만 패퇴시킬 수 있다. 파산한 제2인터내셔널 최대의, 그리고 치명적인 오류는 그 말이 그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위선적이고 비양심적으로 혁명적 언사를 늘어놓는 습관을 키웠다는 것(바젤 선언에 대한 카우츠키 일파의 현 태도에 주목하라)이다. 사회적 사상으로서의 군비철폐 — 즉 어떤 정신병자의 발명품이 아닌, 특정의 사회적 환경에서 나오고 또 그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군비철폐 — 는 예외적으로 어떤 소국들에서 지배적인 특유의 ‘평온한’ 조건으로부터 나온다. 이 소국들은 꽤 오랫동안 전쟁과 학살이라는 세계의 행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군비철폐론자들이 개진한 주장들을 살펴보면 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소국이고, 우리의 군대는 작다. 열강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또는 저 열강 진영과의 제국주의적 동맹에 강제로 편입되는 것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벽지(僻地)에 평화롭게 남아 우리의 벽지정치를 계속하길 원하며, 군비철폐, 강제력 있는 중재재판소, 영세중립 [벨기에 식의 ‘영세’ 중립, 맞나?] 등을 요구한다.”
초연히 남아 있으려는 소국들의 소시민적 지향, 세계사적인 거대한 전투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그리고 자신의 상대적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완고한 부동상태(不動狀態)로 남아 있으려는 소부르주아적 열망, 이런 것이 일부 소국들에서 군비철폐 사상이 어느 정도 성공과 인기를 거두도록 보장해주는 객관적 사회 환경이다. 이러한 지향과 열망은 물론 반동적이며 전적으로 환상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제국주의는 소국들을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고야 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위스에서는 제국주의적 환경이 객관적으로 노동운동에게 두 가지 경로를 지시한다. 기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와의 동맹하에 나라를 제국주의 부르주아 관광객들로부터 나오는 이윤 위에서 번성할 공화제적 · 민주주의적인 독점적 연방으로 바꾸려 하고 있고, 이 ‘평온한’ 독점적 지위를 느긋하게 조용히 지켜가려 하고 있다.
스위스의 진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스위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와 그 ‘국제적’ 입지를 이용하여 유럽 노동자 당들 내 혁명적 분자들이 한층 긴밀한 동맹을 이루어 승리하도록 돕고자 애쓰고 있다. 다행히도 스위스는 ‘자국 독자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고, 3개의 세계어, 즉 인접한 교전국들의 3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스위스 당의 2만 명의 당원이 일종의 ‘전시특별세’로 매주 2상팀(centime)을 낸다면, 1년에 2만 프랑이 모금될 것인데, 이 금액은 一 참모본부가 내린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 교전국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지금 막 일고 있는 노동자들의 봉기 움직임에 대한 모든 진실 된 증거를, 그들이 참호 속에서 형제적 친교를 맺고 있음을, 무기가 ‘자’국의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희망 등등을 3개 국어로 된 정기간행물로 찍어서 배포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을 만큼의 액수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상티넬>> <<폴크스레히트>>, <<베르너 타그바흐트>>[11]같은 최상의 신문들이 그것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규모가 충분치 못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직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아라우(Aarau) 당 대회[12]의 훌륭한 결정이 단지 훌륭한 결정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군비철폐 요구가 스위스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일고 있는 이 혁명적 동향에 부합하는가? 명백히 아니다, 객관적으로 군비철폐는 소국들의 극히 민족적인, 고유의 의미로 민족적인 강령이다. 확실히 이것은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적 강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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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닌은 한 편지에서 이 글을 언급하면서 <군비철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다. 이 글은 독일어로 썼고,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출판물에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했다. 레닌은 러시아어 출판을 위해 이 글을 얼마간 재편집했다. 이 글과 내용이 많은 부분 중복되는 <‘군비철폐’ 슬로건에 대하여>가 1916년 12월 <<스보르니크 소치알 데모크라타>> 2호에 실렸다.
애초의 독일어 원문은 ‘Das Militärprogrammm der proletarischen Revolution’(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이라는 제목으로 1917년 9월 및 10월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International League of Socialist Youth Organisations)의 기관지인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 9호 및 10호에 실렸다.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붙여 재출간한 것이다. “오늘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 강건한 베테랑 혁명가가 자신의 정치적 강령의 상당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 다음의 기사는 특별히 흥미롭다. 우리는 이 글을 그가 1917년 4월 취리히를 떠나기 직전에 받았다.” 그 제목은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의 편집국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2] Jugend-Internationale (청년 인터내셔널) 一 치머발트 좌파와 제휴한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의 기관지. 1915년 9월부터 1918년 5월까지 취리히에서 발행했다.
[3] 1916년 7월 14일 및 17일자 <<그뤼틀리아너(Grütlianer)>> 162호와 164호에 실린 로베르트 그림의 <전쟁 문제에 관한 테제>를 말한다. 스위스가 전쟁에 휩싸일 위험이 커지자 스위스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1916년 4월, 스위스 사회민주당 집행부는 그림을 비롯한 몇몇 유력한 당 활동가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힐 것을 요청했다. 그림의 테제를 비롯하여 이들의 글이 <<베르너 타그바흐트>>, <<폴크스레히트>>, <<그뤼틀리아너>>에 실렸다. 레닌은 토론의 경과를 주의 깊게 추적하고 자료를 분석하여 그림의 테제에 관한 견해를 정리했다.
[4] Neues Leben (신생활)— 스위스 사회민주당 월간지로서 베른에서 1915년 1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발행했다. 치머발트 우파의 견해를 대변했고, 1917년 초에 사회배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5] 로자 룩셈부르크 – 옮긴이 주
[6] 갈리페(Gaston Alexandre Auguste de Galliffet)는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코뮌 전사들을 학살한 프랑스의 장군이다. - 옮긴이
[7] 치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열린 국제 시회주의 회의를 말한다.
첫 번째 회의인 치머발트 회의는 1915년 9월 5-8일에 열렸고, 유럽 11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38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대표단을 이끌었다.
회의는 레닌과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기본 명제들이 포함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회의는 또한 독일 및 프랑스 대표단의 공동성명과 전쟁 희생자 및 정치활동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있는 투사들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를 채택하였고, 국제사회주의위원회(I.S.C.)를 선출했다.
치머발트 좌파 그룹이 이 회의에서 형성되었다. 이 치머발트 좌파 그룹에는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스웨덴 좌파, 노르웨이 좌파, 스위스 좌파, ‘독일 국제사회주의자’ 그룹 등의 대표자들이 포함되었다. 치머발트 좌파는 회의에서 다수파인 중앙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좌파 가운데 완전히 일관된 정책을 주창한 것은 오직 볼셰비키뿐이었다.
두 번째 인터내셔널 회의는 1916년 4월 24일에서 30일까지 베른 근방의 한 마을 키엔탈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10개국으로부터 43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레닌을 비롯한 그 밖의 두 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회의는 다음의 사항들을 토의했다. 1) 전쟁의 종결을 위한 투쟁. 2) 강화 문제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 3) 선동과 선전. 4) 의회활동. 5) 대중투쟁. 6)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의 소집.
키엔탈 회의에서는 치머발트 좌파를 레닌이 주도하여 앞서의 치머발트 회의 때보다 훨씬 더 강고한 입지를 점했다. 키엔탈에서는 12명의 대표가 좌파로 결속하였고 좌파의 몇몇 제안은 20표까지, 또는 거의 과반수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것은 세계 노동운동에서의 역관계가 어떻게 국제주의에 대한 지지로 변화되어 갔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회의는 ‘파멸과 죽음을 겪고 있는 모든 나라 인민들’에게 보내는 선언과, 평화주의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레닌은 회의의 결정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 국제주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데서 한 걸음 전진으로 평가하였다.
치머발트와 키엔탈 회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입각해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 좌파분자들을 결속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이 좌파 분자들은 각국에서 공산당을 창설하고 제3,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8] 사회민주당 노동자의원단 一 기존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에서 탈퇴한 의원들이 1916년 3월에 창설한 독일 중앙파 조직. 후고 하제, 게오르그 레데부어, 빌헬름 디트만이 지도자로, 베를린 조직 다수의 지지를 얻었고, 1917년 4월 창립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중추가 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공공연한 사회배외주의자들을 변호하고자 했고, 그들과의 단결을 유지할 것을 주창했다.
9) 전시산업위원회는 러시아에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전쟁 수행 중인 차르 정부를 돕기 위한 것으로 1915년 5월 설립되었다. 러시아의 대자본가인 10월당원 지도자 구치코프가 중앙전시산업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노동자를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 배외주의적 감정을 조장하고자 시도한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계급 휴전’이 실현된 것과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에서 이 위원회 내에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는 위원회의 보이콧을 선언했고, 대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로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볼셰비키 선전의 결과로 총 239개 지방 및 지역 위원회 중 70개만이 ‘노동자 그룹’ 선거를 시행했고, 그 중 36개 위원회만이 노동자 대표를 선출했다.
[10] 바젤 선언 — 1912년 11월 24일-25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임시 국제사회주의대회에서 채택된 전쟁에 관한 선언.
[11] La Sentinelle (파수대) 一 스위스의 불어권 지역인 누샤텔 주(Neuchatel Canton)의 사회민주당 조직 기관지로서 1890년에서 1906년까지 쇼드퐁(Chaux-de-Fons)에서 발행했다. 1910년에 복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Volksrecht (인민의 권리)一 1898년 취리히에서 창간된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일간신문). 1차 대전 동안 치머발트 좌파의 글들을 실었다.
Berner Tagwacht (베른의 파수대)一 1893년 베른에서 창간된 사회민주주의 신문. 1차 대전 초기에 칼 리프크네히트와 프란츠 메링을 비롯한 그 밖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글들을 실었다. 1917년에는 사회배외주의를 공공연하게 지지했다.
[12]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아라우 대회는 1915년 11월 20-21일에 열렸다. 대회의 중심 의제는 치머발트 국제주의자 그룹에 대한 당의 태도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에 세 개의 경향 간에 투쟁이 전개되었다. 1) 반(反)치머발트 파 2) 치머발트 우파 지지자 3) 치머발트 좌파 지지자.
R. 그림은 당이 치머발트 연합에 가맹하여 그 우파의 정치 방침에 동조하자고 주장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좌파 세력은 로잔 지부의 이름으로 그림의 결의안에 수정동의를 제출했다. 수정안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제국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천명하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혁명적 투쟁을 요구했다. 그림의 압력으로 수정안이 철회되었지만, 그러나 볼셰비키인 M. M. 하리토노프 (Kharitonov ; 스위스 당의 한 지부로부터 대의원으로 파견되어 대회에 출석했다)가 그 안을 다시 제출했다. 그림 일파는 전술적 고려에서 수정안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258대 141로 수정동의가 채택되었다.
<자료>
현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 방위’ 운운하는 사회배외주의적 거짓말에 맞서 싸우고 있는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스위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는 ‘민병’ 또는 ‘인민 무장’이라는 기존 사회민주주의 최소강령 요구를 ‘군비철폐’라는 새로운 요구로 대체하는 것에 찬성하는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2]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였고, 3호에서 군비철폐를 지지하는 편집국 논설을 발표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그림(R. Grimm)의 최근 테제[3]에도 ‘군비철폐’ 사상에 대한 양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정기간행물 <<노이에스 레벤>>[4]과 <<포어보테>>에서 토론이 시작되었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군사강령[1]
V. I. 레닌, 1916년 9월현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 방위’ 운운하는 사회배외주의적 거짓말에 맞서 싸우고 있는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스위스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는 ‘민병’ 또는 ‘인민 무장’이라는 기존 사회민주주의 최소강령 요구를 ‘군비철폐’라는 새로운 요구로 대체하는 것에 찬성하는 목소리들이 있어 왔다.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2]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였고, 3호에서 군비철폐를 지지하는 편집국 논설을 발표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그림(R. Grimm)의 최근 테제[3]에도 ‘군비철폐’ 사상에 대한 양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정기간행물 <<노이에스 레벤>>[4]과 <<포어보테>>에서 토론이 시작되었다.
군비철폐론자들의 논거를 좀 더 면밀히 검토해보자.
I
그들의 기본적인 논거는 군비철폐 요구가 모든 군사주의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가장 명확하고 가장 결정적이며 가장 일관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본 논거에 군비철폐론자들의 기본 오류가 있다.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자임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모든 전쟁을 다 반대할 수는 없다.
첫째, 사회주의자는 예전부터 혁명전쟁의 반대자인 적이 없고, 또한 결코 반대자일 수가 없다. 제국주의 ‘대’국들의 부르주아지는 철두철미 반동적으로 되었고, 이 부르주아지가 지금 벌이고 있는 전쟁을 우리는 반동적인 전쟁, 노예소유주들의 범죄적인 전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전쟁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 이 부르주아지에게 억압받고 종속되어 있는 민족들, 또는 식민지 민족들이 해방을 위해 벌이는 전쟁은? <<인터나치오날레>> 그룹의 테제 제5절을 보면, “이 고삐 풀린 제국주의 시대에는 민족전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히 틀렸다.
이 ‘고삐 풀린 제국주의’의 세기인 20세기의 역사는 식민지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세계의 민족 대다수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자들인 우리 유럽인들이 몸에 밴 야비한 유럽적 배외주의로부터 ‘식민지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많은 경우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전쟁 또는 민족봉기다. 제국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가장 낙후된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속화시키고, 그럼으로써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을 확대, 격화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이 사실로부터 불가피하게 제국주의는 많은 경우 민족전쟁을 낳게 마련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위에 인용한 ‘테제’를 자신의 소책자에서 옹호하고 있는 유니우스[5](Junius)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느 한 제국주의 대국에 대항하는 어떠한 민족전쟁도 그 대국과 경쟁하고 있는 타 제국주의 대국의 간섭을 초래하며, 그에 따라 모든 민족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전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거도 옳지 않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언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의 많은 식민지전쟁이 그러한 경로를 밟지 않았다. 그리고 예를 들어, 현 전쟁이 모든 교전국들의 철저한 힘의 소진과 피폐로 끝날 경우, 전후에 “어떠한” 민족적, 진보적, 혁명적 전쟁 — 이를테면 중국이 인도와 페르시아와 샴 등과 동맹하여 열강에 대항하여 벌이는 전쟁 같은 — 도 “있을 수 없다”고 공언한다면, 정말 우습지 않은가.
제국주의하에서 민족전쟁의 가능성 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이론상으로 틀렸고, 역사적으로 명백히 오류이며, 실천적으로는 유럽 배외주의에 다름 아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을 억압하는 민족에 속하는 우리가 피억압 민족에게 당신들은 ‘우리’ 민족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는 셈이다!
둘째, 내란도 똑같이 전쟁이다. 다른 어떤 전쟁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자는 내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계급사회에서도 내란은 계급투쟁의 자연스러운 — 그리고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불가피한 — 계속이자 발전이며 격화이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혁명이 확인한 바이다. 내란을 거부하거나 망각하는 것은 극단적인 기회주의로 빠져드는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을 방기하는 것이다.
셋째,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일거에 모든 전쟁 일반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쟁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발전은 나라마다 극히 불균등하게 진행된다. 상품생산하에서는 이와는 다른 식으로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나온다. 사회주의는 처음에 하나의 나라 또는 수개의 나라에서 승리할 것이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라들은 한동안 부르주아적인 또는 전(前)부르주아적인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찰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승리한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려는 다른 나라 부르주아지 쪽에서의 직접적인 기도까지도 필히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 쪽에서의 전쟁은 정당한 전쟁, 정의(正義)의 전쟁이 될 것이며, 사회주의를 위한 전쟁, 부르주아지로부터의 다른 민족들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 될 것이다. 엥겔스가 카우츠키에게 보낸 1882년 9월 12일자 편지에서 이미 승리한 사회주의가 ‘방위전쟁’을 벌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분명히 언명했을 때, 그는 완전히 옳았다.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다른 나라의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방위전쟁이었다.
우리가 단지 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부르주아지를 타도하여 완전히 쳐부수고 수탈한 뒤에야 비로소 전쟁은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 즉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가장 어려운 일, 그리고 가장 많은 투쟁을 필요로 하는 일인 부르주아지의 반항을 진압하는 것을 우리가 회피하거나 얼버무린다면, 이는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잘못된 — 완전히 비혁명적인 — 것이다. ‘사회주의적’ 설교사들과 기회주의자들은 미래의 평화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꿈을 꿀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아름다운 미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격렬한 계급투쟁과 계급전쟁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숙고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와 구별된다.
말에 넘어가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조국 방위’라는 말이 많은 이들에게 가증스러운 이유는 공공연한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 파 모두가 이 말을 현 약탈 전쟁에 관한 부르주아적 거짓말을 덮어 감추고 얼버무리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가 더 이상 정치 슬로건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 전쟁에서 ‘조국 방위’틀 인정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현 전쟁을 ‘정의의’ 전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익이 되는 전쟁으로 인정한다는 것, 바로 그것인데 왜냐하면, 되풀이하건대, 어떠한 전쟁의 경우에도 침략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대국에 대한 피억압 민족의 전쟁에서 피억압 민족 측의 ‘조국방위’를 부인한다면, 또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국가의 갈리페[6]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측의 ‘조국 방위’를 부인한다면, 이는 순전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모든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오류이다. 현 제국주의 전쟁은 양대 열강의 제국주의적 정치의 계속이며, 이 정치는 제국주의 시대의 제 관계의 총체에 의해 생겨나고 배양되었다. 그러나 또한 이 시대 자체가 필연적으로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정치를,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정치를 낳고 배양하기 마련이며, 그 결과로 첫째 혁명적 민족봉기와 민족전쟁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둘째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과 봉기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셋째 그 두 종류의 혁명전쟁의 결합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또한 낳고 배양하기 마련이다.
II
여기에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고려를 덧붙여야 한다.
II
여기에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고려를 덧붙여야 한다.
무기 사용과 무기 획득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피억압 계급은 노예처럼 취급받아 마땅할 따름이다. 우리가 부르주아 평화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계급투쟁을 통하는 것 말고는 어떤 탈출구도 없고 또한 있을 수도 없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수 없다. 어떠한 계급사회에서도, 그것이 노예제나 농노제에 기초한 것이든, 현재와 같이 임금노동에 기초한 것이든 억압 계급은 항상 무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오늘날의 민병(militia)도 — 가장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에서의 민병조차, 예를 들어 스위스의 민병조차도 —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한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숙고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초보적인 진실이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무장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주요 사실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앞에 두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군비철폐’(disarmament; 무장해제) ‘요구’를 내걸라고 촉구 받다니! 이것은 계급투쟁 관점을 완전히 방기하는 것, 모든 혁명 사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부르주아지를 쳐부수고 수탈하고 무장해제(disarm)시키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arming),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 계급에게 가능한 단 하나의 전술이다. 자본주의적 군사주의의 객관적 발전 전체로부터 논리적으로 뒤따르는 전술이자, 그러한 발전이 지시하는 전술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를 무장해제 시킨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사적 사명을 배반하지 않고 모든 무기(군비)를 고철더미 속에 버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심할 바 없이 이렇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이런 조건이 달성되었을 때뿐이며 확실히 그 이전은 아니다.
현 전쟁이 반동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훌쩍거리며 칭얼대는 소부르주아들 사이에서 공포와 두려움만을, 일체의 무기 사용과 유혈참사 등에 대한 혐오만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끝이 없는 공포이며, 또한 이제까지 늘 그래 왔다.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반동적인 현 전쟁이 이 사회에게 공포의 끝을 준비시키고 있다면, 우리는 하등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다. 단 하나의 정당한 혁명적 전쟁, 즉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내란이, 이 부르주아지 자신에 의해 만인의 눈앞에서 공공연하게 준비되고 있는 현 시기에 ‘군비철폐’ 설교와 ‘요구’, 더 정확하게는 군비철폐라는 꿈은 바로 절망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생명 없는 회색 이론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세계사적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트러스트의 역할 및 산업에서의 여성고용의 역할, 다른 한편으로는 1871년의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1905년 12월 봉기.
부르주아지는 트러스트를 키워서 여성과 아동을 공장으로 내몰아 이들을 혹사, 퇴락시키고 극단의 궁핍으로 몰아넣는 것을 자신의 업무로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요구’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것과 싸운다. 그러나 어떻게 싸우는가? 우리는 트러스트와 여성고용이 진보적임을 설명한다. 우리는 수공업 체제나 독점 이전의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여성의 가사노동으로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다. 트러스트 등을 통해 전진, 그리고 이것들을 넘어 사회주의로!
이 주장은, 약간의 필요한 변경을 거치면, 오늘날 주민의 군사화(militarization; 군사교육 등)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날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군사화하고 있다. 내일은 여성의 군사화도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야 한다. 그래 좋다! 전속력으로 진행하라! 더 빨리 나아갈수록 자본주의에 대한 무장봉기에 그만큼 더 가까이 갈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가 파리 코뮌의 예를 잊지 않았다면, 어떻게 청년 등의 군사화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생명 없는 이론’도 꿈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경제적 · 정치적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시대 및 제국주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사실들의 반복을 야기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유감스러운 사태가 될 것이다.
파리코뮌을 목격한 한 부르주아 관찰자는 1871년 5월에 한 영국 신문에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프랑스 민족이 전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민족일 것인가!” 여성들과 10대 아이들이 남성들과 나란히 파리코뮌에서 싸웠다.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한 다가오는 전투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무장이 빈약한, 또는 비무장한 노동자들이 잘 무장된 부르주아지의 군대에 의해 사살 당하는 것을 그냥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1871년에 했던 것처럼 무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겁먹은 민족들로부터 — 더 정확히 말하면, 정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노동운동으로부터 一 조만간, 그러나 틀림없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시무시한 민족들’의 국제적 동맹이 생겨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현재 사회생활 전체가 군사화 되고 있다. 제국주의는 세계의 분할 · 재분할을 위한 강대국들의 격렬한 투쟁이다. 따라서 제국주의는 모든 나라에서, 심지어 중립국 및 약소국에서까지 더 한층의 군사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이것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그냥 모든 전쟁과 군사적인 모든 것을 저주함으로써? 그냥 군비철폐를 요구함으로써? 억압받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의 여성들은 그런 수치스런 역할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곧 어른이 될 것이다. 너는 총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필요한 군사기술을 제대로 배워라. 현 전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너의 형제인 다른 나라 노동자를 쏘라고 하는, 사회주의의 배반자들이 너한테 시키고 있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 지식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싸우기 위하여 이 군사 지식이 필요하다. 기도하고 비는 것으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처부수고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착취와 빈곤과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그것이 필요하다.”
현 전쟁과 관련하여 이러한, 정확히 이와 같은 선전을 회피하겠
다면,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혁명,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등등의 멋진 말들을 쓰는 것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
III
군비철폐론자들은 강령상의 ‘인민 무장’ 조항이 더 쉽게 기회주의에 대한 양보에 이른다는 이유로 그 조항에 반대한다. 우리는 앞에서 군비철폐와 계급투쟁의 관계, 군비철폐와 사회혁명의 관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검토했다. 이제 우리는 군비철폐 요구와 기회주의 간의 관계를 검토할 것이다. 군비철폐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 요구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함께 그 요구가 불가피하게 기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투쟁의 활력을 빼앗아간다는 데 있다.
III
군비철폐론자들은 강령상의 ‘인민 무장’ 조항이 더 쉽게 기회주의에 대한 양보에 이른다는 이유로 그 조항에 반대한다. 우리는 앞에서 군비철폐와 계급투쟁의 관계, 군비철폐와 사회혁명의 관계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검토했다. 이제 우리는 군비철폐 요구와 기회주의 간의 관계를 검토할 것이다. 군비철폐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 요구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함께 그 요구가 불가피하게 기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약화시키고 투쟁의 활력을 빼앗아간다는 데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투쟁은 지금 인터내셔널이 직면한 주요한 직접적인 문제다.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과 긴밀히 연결되지 않는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문구가 아니면 사기다. 치머발트와 키엔탈[7]의 주된 결함 중의 하나 — 이 제3인터내셔널의 싹들이 어쩌면 대실패로 끝날지도 모르게 될 주된 이유 중의 하나 — 는 기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문제가 해결은 고사하고 공공연하게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들과 단절할 필요를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기회주의는 유럽 노동운동에서 一 일시적으로 一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기회주의의 양대 색조는 모든 대국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따라서 덜 위험한 조류로서, 플레하노프, 샤이데만, 레기엔, 알베르 토마, 상바, 반데르벨데, 하인드먼, 헨더슨 등의 사회제국주의이다. 둘째는 은폐된, 카우츠키 류의 기회주의로서, 독일에서는 카우츠키-하제와 사회민주당 노동자의원단[8], 프랑스에서는 롱게, 프레세망, 메이에라 등, 영국에서는 램지 맥도널드를 비롯한 독립노동당의 지도자들, 러시아에서는 마르토프와 치헤이제 등, 이탈리아에서 트레베스를 비롯한 이른바 좌파 개량주의자 등이다.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드러내놓고 직접적으로 혁명에 반대한다. 혁명적 운동의 초기 단계부터 분출까지 계속 반대한다.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정부와 직접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 장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러시아의) 전시산업위원회[9] 참여에 이르기까지 이 동맹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가면 쓴 기회주의자인 카우츠키 파는 노동운동에 훨씬 더 해롭고 위험한데, 왜냐하면 공공연한 기회주의와의 통일 단결에 대한 옹호를 그럴싸한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적’ 표어와 평화주의적 슬로건으로 덮어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대 기회주의와의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모든 분야에서, 즉 의회, 노동조합, 파업, 군대 등등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 양대 기회주의의 주된 고유한 특징은 현 전쟁과 혁명 간의 연관이라는 구체적 문제를 비롯한 혁명의 그 밖의 구체적 문제들이 묵살되고 은폐되거나, 또는 경찰의 금지령을 염두에 두고 다루어진다는 데 있다. 더군다나 전전(戰前)에 이 임박한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간의 연관이 무수히 — 비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모두 (공식적으로는 바젤 선언[10]에서) —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군비철폐 요구의 주된 결함은 혁명의 모든 구체적 문제들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비철폐론자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혁명, 비무장 혁명을 지지하는 것인가?
계속하자. 우리는 결코 개량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적 소요와 대중적 불만의 수많은 분출 및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 전쟁으로부터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가 제2의 제국주의 전쟁을 겪을 슬픈 가능성 — 최악의 경우에 — 에 대해서도 무시할 생각이 없다. 우리가 찬성하는 개량의 강령은 기회주의자들을 향해서도 겨누어진 강령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회주의자들에게 개량을 위한 투쟁을 전부 맡겨두고 막연한 ‘군비철폐’ 판타지 속에서 슬픈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다면, 기회주의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것이다. ‘군비철폐’는 불유쾌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할 뿐,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강령에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1914-16년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 방위 슬로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르주아 거짓말의 도움을 빌어 노동운동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구체적 문제에 대한 이와 같은 구체적 대답이 군비철폐 요구와 ‘일체의’ 조국 방위 거부보다 이론적으로 더 올바를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며,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더 견딜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말하겠다. “모든 제국주의 열강 —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미국 — 의 부르주아지는 너무도 반동적으로 되었고 너무도 세계 지배에 혈안이 되어 있어, 이들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벌이는 그 어떠한 전쟁도 반동적인 전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전쟁들 모두에 반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저지하기 위한 봉기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이러한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바라야 하며, 그 패배를 혁명적 봉기를 위해 이용해야 한다.
민병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찬성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병이 아니라, 오직 프롤레타리아 민병뿐이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스위스, 노르웨이 등등과 같은 나라라 하더라도 이들 나라의 상비군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병에 대해서도 ‘한 푼도, 한 사람도 안 된다’(not a penny, not a man). 가장 자유로운 공화제 나라들(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민병이 점점 더 — 특히 1907년과 1911년에 — 프로이센 화(化) 되고 있고, 파업 노동자들을 겨냥한 진압 용도로 이용되는 등 자본의 용병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상황에서 더욱 더 그렇다. 우리는 병사들에 의한 장교 선출, 모든 군법의 폐지, 외국인 노동자와 토착 노동자 간의 동등한 권리(스위스처럼,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일체의 권리를 부정하면서 그들을 더욱 더 후안무치하게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특히 중요한 사항)를 요구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해당 나라의, 이를테면 주민 백 명당 하나의 단위로 자발적인 군사훈련 단체를 결성할 권리 등을, 국가가 보수를 부담하는 교관의 자유로운 선거와 함께 요구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노예소유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군사훈련 습득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와 같은 훈련의 필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절박하게 지시하고 있는 바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준 바, 필연적으로 혁명운동의 그 모든 성공은, 심지어 어느 한 도시, 어느 한 공업지대의 장악이나 군대의 어느 한 부대의 획득과 같은 부분적인 성공조차도,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바로 이와 같은 강령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끝으로, 기회주의를 단지 강령에 의해 패퇴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며, 오직 행동에 의해서만 패퇴시킬 수 있다. 파산한 제2인터내셔널 최대의, 그리고 치명적인 오류는 그 말이 그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위선적이고 비양심적으로 혁명적 언사를 늘어놓는 습관을 키웠다는 것(바젤 선언에 대한 카우츠키 일파의 현 태도에 주목하라)이다. 사회적 사상으로서의 군비철폐 — 즉 어떤 정신병자의 발명품이 아닌, 특정의 사회적 환경에서 나오고 또 그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군비철폐 — 는 예외적으로 어떤 소국들에서 지배적인 특유의 ‘평온한’ 조건으로부터 나온다. 이 소국들은 꽤 오랫동안 전쟁과 학살이라는 세계의 행로에서 벗어나 있었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노르웨이의 군비철폐론자들이 개진한 주장들을 살펴보면 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소국이고, 우리의 군대는 작다. 열강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또는 저 열강 진영과의 제국주의적 동맹에 강제로 편입되는 것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벽지(僻地)에 평화롭게 남아 우리의 벽지정치를 계속하길 원하며, 군비철폐, 강제력 있는 중재재판소, 영세중립 [벨기에 식의 ‘영세’ 중립, 맞나?] 등을 요구한다.”
초연히 남아 있으려는 소국들의 소시민적 지향, 세계사적인 거대한 전투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그리고 자신의 상대적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완고한 부동상태(不動狀態)로 남아 있으려는 소부르주아적 열망, 이런 것이 일부 소국들에서 군비철폐 사상이 어느 정도 성공과 인기를 거두도록 보장해주는 객관적 사회 환경이다. 이러한 지향과 열망은 물론 반동적이며 전적으로 환상에 기초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제국주의는 소국들을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고야 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위스에서는 제국주의적 환경이 객관적으로 노동운동에게 두 가지 경로를 지시한다. 기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와의 동맹하에 나라를 제국주의 부르주아 관광객들로부터 나오는 이윤 위에서 번성할 공화제적 · 민주주의적인 독점적 연방으로 바꾸려 하고 있고, 이 ‘평온한’ 독점적 지위를 느긋하게 조용히 지켜가려 하고 있다.
스위스의 진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스위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와 그 ‘국제적’ 입지를 이용하여 유럽 노동자 당들 내 혁명적 분자들이 한층 긴밀한 동맹을 이루어 승리하도록 돕고자 애쓰고 있다. 다행히도 스위스는 ‘자국 독자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고, 3개의 세계어, 즉 인접한 교전국들의 3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스위스 당의 2만 명의 당원이 일종의 ‘전시특별세’로 매주 2상팀(centime)을 낸다면, 1년에 2만 프랑이 모금될 것인데, 이 금액은 一 참모본부가 내린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 교전국 노동자들과 병사들에게, 지금 막 일고 있는 노동자들의 봉기 움직임에 대한 모든 진실 된 증거를, 그들이 참호 속에서 형제적 친교를 맺고 있음을, 무기가 ‘자’국의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희망 등등을 3개 국어로 된 정기간행물로 찍어서 배포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을 만큼의 액수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상티넬>> <<폴크스레히트>>, <<베르너 타그바흐트>>[11]같은 최상의 신문들이 그것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규모가 충분치 못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직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아라우(Aarau) 당 대회[12]의 훌륭한 결정이 단지 훌륭한 결정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군비철폐 요구가 스위스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일고 있는 이 혁명적 동향에 부합하는가? 명백히 아니다, 객관적으로 군비철폐는 소국들의 극히 민족적인, 고유의 의미로 민족적인 강령이다. 확실히 이것은 국제적인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국제적 강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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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닌은 한 편지에서 이 글을 언급하면서 <군비철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다. 이 글은 독일어로 썼고,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출판물에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했다. 레닌은 러시아어 출판을 위해 이 글을 얼마간 재편집했다. 이 글과 내용이 많은 부분 중복되는 <‘군비철폐’ 슬로건에 대하여>가 1916년 12월 <<스보르니크 소치알 데모크라타>> 2호에 실렸다.
애초의 독일어 원문은 ‘Das Militärprogrammm der proletarischen Revolution’(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이라는 제목으로 1917년 9월 및 10월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International League of Socialist Youth Organisations)의 기관지인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 9호 및 10호에 실렸다.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붙여 재출간한 것이다. “오늘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 강건한 베테랑 혁명가가 자신의 정치적 강령의 상당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 다음의 기사는 특별히 흥미롭다. 우리는 이 글을 그가 1917년 4월 취리히를 떠나기 직전에 받았다.” 그 제목은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의 편집국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2] Jugend-Internationale (청년 인터내셔널) 一 치머발트 좌파와 제휴한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의 기관지. 1915년 9월부터 1918년 5월까지 취리히에서 발행했다.
[3] 1916년 7월 14일 및 17일자 <<그뤼틀리아너(Grütlianer)>> 162호와 164호에 실린 로베르트 그림의 <전쟁 문제에 관한 테제>를 말한다. 스위스가 전쟁에 휩싸일 위험이 커지자 스위스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1916년 4월, 스위스 사회민주당 집행부는 그림을 비롯한 몇몇 유력한 당 활동가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힐 것을 요청했다. 그림의 테제를 비롯하여 이들의 글이 <<베르너 타그바흐트>>, <<폴크스레히트>>, <<그뤼틀리아너>>에 실렸다. 레닌은 토론의 경과를 주의 깊게 추적하고 자료를 분석하여 그림의 테제에 관한 견해를 정리했다.
[4] Neues Leben (신생활)— 스위스 사회민주당 월간지로서 베른에서 1915년 1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발행했다. 치머발트 우파의 견해를 대변했고, 1917년 초에 사회배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5] 로자 룩셈부르크 – 옮긴이 주
[6] 갈리페(Gaston Alexandre Auguste de Galliffet)는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코뮌 전사들을 학살한 프랑스의 장군이다. - 옮긴이
[7] 치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열린 국제 시회주의 회의를 말한다.
첫 번째 회의인 치머발트 회의는 1915년 9월 5-8일에 열렸고, 유럽 11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38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대표단을 이끌었다.
회의는 레닌과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기본 명제들이 포함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회의는 또한 독일 및 프랑스 대표단의 공동성명과 전쟁 희생자 및 정치활동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있는 투사들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를 채택하였고, 국제사회주의위원회(I.S.C.)를 선출했다.
치머발트 좌파 그룹이 이 회의에서 형성되었다. 이 치머발트 좌파 그룹에는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스웨덴 좌파, 노르웨이 좌파, 스위스 좌파, ‘독일 국제사회주의자’ 그룹 등의 대표자들이 포함되었다. 치머발트 좌파는 회의에서 다수파인 중앙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좌파 가운데 완전히 일관된 정책을 주창한 것은 오직 볼셰비키뿐이었다.
두 번째 인터내셔널 회의는 1916년 4월 24일에서 30일까지 베른 근방의 한 마을 키엔탈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10개국으로부터 43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레닌을 비롯한 그 밖의 두 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회의는 다음의 사항들을 토의했다. 1) 전쟁의 종결을 위한 투쟁. 2) 강화 문제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 3) 선동과 선전. 4) 의회활동. 5) 대중투쟁. 6)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의 소집.
키엔탈 회의에서는 치머발트 좌파를 레닌이 주도하여 앞서의 치머발트 회의 때보다 훨씬 더 강고한 입지를 점했다. 키엔탈에서는 12명의 대표가 좌파로 결속하였고 좌파의 몇몇 제안은 20표까지, 또는 거의 과반수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것은 세계 노동운동에서의 역관계가 어떻게 국제주의에 대한 지지로 변화되어 갔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회의는 ‘파멸과 죽음을 겪고 있는 모든 나라 인민들’에게 보내는 선언과, 평화주의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레닌은 회의의 결정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 국제주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데서 한 걸음 전진으로 평가하였다.
치머발트와 키엔탈 회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입각해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 좌파분자들을 결속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이 좌파 분자들은 각국에서 공산당을 창설하고 제3,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8] 사회민주당 노동자의원단 一 기존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에서 탈퇴한 의원들이 1916년 3월에 창설한 독일 중앙파 조직. 후고 하제, 게오르그 레데부어, 빌헬름 디트만이 지도자로, 베를린 조직 다수의 지지를 얻었고, 1917년 4월 창립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중추가 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공공연한 사회배외주의자들을 변호하고자 했고, 그들과의 단결을 유지할 것을 주창했다.
9) 전시산업위원회는 러시아에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전쟁 수행 중인 차르 정부를 돕기 위한 것으로 1915년 5월 설립되었다. 러시아의 대자본가인 10월당원 지도자 구치코프가 중앙전시산업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노동자를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 배외주의적 감정을 조장하고자 시도한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계급 휴전’이 실현된 것과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에서 이 위원회 내에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는 위원회의 보이콧을 선언했고, 대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로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볼셰비키 선전의 결과로 총 239개 지방 및 지역 위원회 중 70개만이 ‘노동자 그룹’ 선거를 시행했고, 그 중 36개 위원회만이 노동자 대표를 선출했다.
[10] 바젤 선언 — 1912년 11월 24일-25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임시 국제사회주의대회에서 채택된 전쟁에 관한 선언.
[11] La Sentinelle (파수대) 一 스위스의 불어권 지역인 누샤텔 주(Neuchatel Canton)의 사회민주당 조직 기관지로서 1890년에서 1906년까지 쇼드퐁(Chaux-de-Fons)에서 발행했다. 1910년에 복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Volksrecht (인민의 권리)一 1898년 취리히에서 창간된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일간신문). 1차 대전 동안 치머발트 좌파의 글들을 실었다.
Berner Tagwacht (베른의 파수대)一 1893년 베른에서 창간된 사회민주주의 신문. 1차 대전 초기에 칼 리프크네히트와 프란츠 메링을 비롯한 그 밖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글들을 실었다. 1917년에는 사회배외주의를 공공연하게 지지했다.
[12]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아라우 대회는 1915년 11월 20-21일에 열렸다. 대회의 중심 의제는 치머발트 국제주의자 그룹에 대한 당의 태도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에 세 개의 경향 간에 투쟁이 전개되었다. 1) 반(反)치머발트 파 2) 치머발트 우파 지지자 3) 치머발트 좌파 지지자.
R. 그림은 당이 치머발트 연합에 가맹하여 그 우파의 정치 방침에 동조하자고 주장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좌파 세력은 로잔 지부의 이름으로 그림의 결의안에 수정동의를 제출했다. 수정안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제국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천명하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혁명적 투쟁을 요구했다. 그림의 압력으로 수정안이 철회되었지만, 그러나 볼셰비키인 M. M. 하리토노프 (Kharitonov ; 스위스 당의 한 지부로부터 대의원으로 파견되어 대회에 출석했다)가 그 안을 다시 제출했다. 그림 일파는 전술적 고려에서 수정안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258대 141로 수정동의가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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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닌은 한 편지에서 이 글을 언급하면서 <군비철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다. 이 글은 독일어로 썼고,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출판물에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했다. 레닌은 러시아어 출판을 위해 이 글을 얼마간 재편집했다. 이 글과 내용이 많은 부분 중복되는 <‘군비철폐’ 슬로건에 대하여>가 1916년 12월 <<스보르니크 소치알 데모크라타>> 2호에 실렸다.
애초의 독일어 원문은 ‘Das Militärprogrammm der proletarischen Revolution’(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군사 강령)이라는 제목으로 1917년 9월 및 10월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International League of Socialist Youth Organisations)의 기관지인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 9호 및 10호에 실렸다.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붙여 재출간한 것이다. “오늘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 강건한 베테랑 혁명가가 자신의 정치적 강령의 상당 부분을 제시하고 있는 다음의 기사는 특별히 흥미롭다. 우리는 이 글을 그가 1917년 4월 취리히를 떠나기 직전에 받았다.” 그 제목은 <<유겐트 인터나치오날레>>의 편집국이 붙인 것으로 보인다,
[2] Jugend-Internationale (청년 인터내셔널) 一 치머발트 좌파와 제휴한 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맹의 기관지. 1915년 9월부터 1918년 5월까지 취리히에서 발행했다.
[3] 1916년 7월 14일 및 17일자 <<그뤼틀리아너(Grütlianer)>> 162호와 164호에 실린 로베르트 그림의 <전쟁 문제에 관한 테제>를 말한다. 스위스가 전쟁에 휩싸일 위험이 커지자 스위스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1916년 4월, 스위스 사회민주당 집행부는 그림을 비롯한 몇몇 유력한 당 활동가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힐 것을 요청했다. 그림의 테제를 비롯하여 이들의 글이 <<베르너 타그바흐트>>, <<폴크스레히트>>, <<그뤼틀리아너>>에 실렸다. 레닌은 토론의 경과를 주의 깊게 추적하고 자료를 분석하여 그림의 테제에 관한 견해를 정리했다.
[4] Neues Leben (신생활)— 스위스 사회민주당 월간지로서 베른에서 1915년 1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발행했다. 치머발트 우파의 견해를 대변했고, 1917년 초에 사회배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5] 로자 룩셈부르크 – 옮긴이 주
[6] 갈리페(Gaston Alexandre Auguste de Galliffet)는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코뮌 전사들을 학살한 프랑스의 장군이다. - 옮긴이
[7] 치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열린 국제 시회주의 회의를 말한다.
첫 번째 회의인 치머발트 회의는 1915년 9월 5-8일에 열렸고, 유럽 11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38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대표단을 이끌었다.
회의는 레닌과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기본 명제들이 포함된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회의는 또한 독일 및 프랑스 대표단의 공동성명과 전쟁 희생자 및 정치활동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있는 투사들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를 채택하였고, 국제사회주의위원회(I.S.C.)를 선출했다.
치머발트 좌파 그룹이 이 회의에서 형성되었다. 이 치머발트 좌파 그룹에는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스웨덴 좌파, 노르웨이 좌파, 스위스 좌파, ‘독일 국제사회주의자’ 그룹 등의 대표자들이 포함되었다. 치머발트 좌파는 회의에서 다수파인 중앙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좌파 가운데 완전히 일관된 정책을 주창한 것은 오직 볼셰비키뿐이었다.
두 번째 인터내셔널 회의는 1916년 4월 24일에서 30일까지 베른 근방의 한 마을 키엔탈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10개국으로부터 43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레닌을 비롯한 그 밖의 두 명의 대표가 출석했다.
회의는 다음의 사항들을 토의했다. 1) 전쟁의 종결을 위한 투쟁. 2) 강화 문제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 3) 선동과 선전. 4) 의회활동. 5) 대중투쟁. 6)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의 소집.
키엔탈 회의에서는 치머발트 좌파를 레닌이 주도하여 앞서의 치머발트 회의 때보다 훨씬 더 강고한 입지를 점했다. 키엔탈에서는 12명의 대표가 좌파로 결속하였고 좌파의 몇몇 제안은 20표까지, 또는 거의 과반수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것은 세계 노동운동에서의 역관계가 어떻게 국제주의에 대한 지지로 변화되어 갔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회의는 ‘파멸과 죽음을 겪고 있는 모든 나라 인민들’에게 보내는 선언과, 평화주의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레닌은 회의의 결정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 국제주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 데서 한 걸음 전진으로 평가하였다.
치머발트와 키엔탈 회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입각해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 좌파분자들을 결속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이 좌파 분자들은 각국에서 공산당을 창설하고 제3,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8] 사회민주당 노동자의원단 一 기존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에서 탈퇴한 의원들이 1916년 3월에 창설한 독일 중앙파 조직. 후고 하제, 게오르그 레데부어, 빌헬름 디트만이 지도자로, 베를린 조직 다수의 지지를 얻었고, 1917년 4월 창립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중추가 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은 공공연한 사회배외주의자들을 변호하고자 했고, 그들과의 단결을 유지할 것을 주창했다.
9) 전시산업위원회는 러시아에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전쟁 수행 중인 차르 정부를 돕기 위한 것으로 1915년 5월 설립되었다. 러시아의 대자본가인 10월당원 지도자 구치코프가 중앙전시산업위원회의 의장이었다. 노동자를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 배외주의적 감정을 조장하고자 시도한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계급 휴전’이 실현된 것과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에서 이 위원회 내에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는 위원회의 보이콧을 선언했고, 대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로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볼셰비키 선전의 결과로 총 239개 지방 및 지역 위원회 중 70개만이 ‘노동자 그룹’ 선거를 시행했고, 그 중 36개 위원회만이 노동자 대표를 선출했다.
[10] 바젤 선언 — 1912년 11월 24일-25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임시 국제사회주의대회에서 채택된 전쟁에 관한 선언.
[11] La Sentinelle (파수대) 一 스위스의 불어권 지역인 누샤텔 주(Neuchatel Canton)의 사회민주당 조직 기관지로서 1890년에서 1906년까지 쇼드퐁(Chaux-de-Fons)에서 발행했다. 1910년에 복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Volksrecht (인민의 권리)一 1898년 취리히에서 창간된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기관지(일간신문). 1차 대전 동안 치머발트 좌파의 글들을 실었다.
Berner Tagwacht (베른의 파수대)一 1893년 베른에서 창간된 사회민주주의 신문. 1차 대전 초기에 칼 리프크네히트와 프란츠 메링을 비롯한 그 밖의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글들을 실었다. 1917년에는 사회배외주의를 공공연하게 지지했다.
[12]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아라우 대회는 1915년 11월 20-21일에 열렸다. 대회의 중심 의제는 치머발트 국제주의자 그룹에 대한 당의 태도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내에 세 개의 경향 간에 투쟁이 전개되었다. 1) 반(反)치머발트 파 2) 치머발트 우파 지지자 3) 치머발트 좌파 지지자.
R. 그림은 당이 치머발트 연합에 가맹하여 그 우파의 정치 방침에 동조하자고 주장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좌파 세력은 로잔 지부의 이름으로 그림의 결의안에 수정동의를 제출했다. 수정안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제국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천명하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혁명적 투쟁을 요구했다. 그림의 압력으로 수정안이 철회되었지만, 그러나 볼셰비키인 M. M. 하리토노프 (Kharitonov ; 스위스 당의 한 지부로부터 대의원으로 파견되어 대회에 출석했다)가 그 안을 다시 제출했다. 그림 일파는 전술적 고려에서 수정안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258대 141로 수정동의가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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