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팬데믹과 대중투쟁: 볼셰비키로부터의 몇 가지 교훈
록다운 봉쇄와 집회·시위 금지 같은 자본가 국가의 권위주의적 조치를 지지, 또는 묵인하는 많은 운동진영들과는 달리, 전염병 팬데믹을 이유로 대중투쟁 호소를 자제한다는 것은 레닌과 볼셰비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볼셰비키는 역병과 기근 같은 이러한 재난은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농민들이 차르 정권 타도를 위해 싸워야 할 추가적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볼셰비키는 투쟁을 늦추기는커녕 주어진 상황에서의 시위와 파업을 요구했다.
한 예로 1910-11년 러시아를 파탄 낸 기근과 콜레라 대참사를 들 수 있다. 콜레라는 1910년 6월에 시작되어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전체적으로 23만여 건, 11만여 명의 사망자가 이 대유행 기간 동안 발생했다. 사망률이 무려 45퍼센트에 달했다. 약 2천만 명이 기근으로 고통 받았다.
191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ㅡ 당시 볼셰비키는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 ㅡ 제6차 (프라하) 대회의 결의는 역병과 기근으로 인한 “대중의 분노를 시위와 대중집회, 그리고 그 밖의 차리즘에 대항하는 대중투쟁 형태들로 표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히고 있다.
1910-11년 러시아의 기근 및 콜레라의 구체적 조건과 코로나19 팬데믹 간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볼셰비키의 접근방법은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이런 맥락에서 1917년 10월 권력 장악 후 소련에서 볼셰비키의 경험도 또한 참고할 필요가 있다.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소비에트정부는 비상한 도전에 직면했다.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과 이어서 또 3년간의 내전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나라의 경제 자원 대부분을 파괴했다. 그 결과 러시아의 공중보건은 급격히 후퇴했고 각종 역병으로 피폐화했다. 1921년/22년에는 끔찍한 기근을 겪었다. 1918년에서 1922년 사이에 유행한 발진티푸스는 250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1921년에서 1923년 사이에 콜레라 발병으로 약 13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여기에 이른바 “스페인 독감”까지 가세했다. 당연히, 이 유행병들은 전염성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은 역병이었다. 발진티푸스의 사망률은 8~10%로 농촌 지역에서는 더 높았다. 공공병원에서 발진티푸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의 사망률이 50%나 될 정도로 높았다.
그러나 계획경제와 함께 노동자·농민 국가 건설의 일부로서 공공보건에 대한 완강한 노력을 통해 소비에트 정부는 이 재앙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로, 그리고 언급한 이 모든 재난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정부는 기대수명을 32세(1913년)에서 44세(1926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소련 보건 정책의 초점은 이러한 질병들이 확산될 기반을 허물기 위해 인민대중의 사회·위생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1921년 보건법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소련공산당은 질병의 발전을 막기 위해 설계된 포괄적인 일련의 보건·위생 조치에 공중보건 정책의 기초를 둘 것이다.” “1920년에 말라리아가 발병하자 모스크바의 열대 의학 연구소는 말라리아 확산을 줄이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통과시키며, 환자와 질병에 노출된 사람들의 의무 등록제를 실시하고 치료와 임상 및 실험실 작업을 제공하는 말라리아 관측소들을 설치했다.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가 면세유통 되었다.... 1919년 4월에는 한 걸음 나아가 천연두에 대한 의무 예방접종이 실시되었고, 지구, 촌락, 공장, 병영에서의 보건 교육 캠페인이 수많은 포스터 캠페인과 함께 펼쳐졌다. 1920년 3월까지 공중보건 인민위원부는 학령기 아동들, 특히 결핵을 앓고 있는 아동들의 건강에 주의를 쏟았다. 미생물학·역학 남동 러시아 지방연구소가 1919년 사라토프에서 개원했다. 전염병 발병 기간 동안 피해 지역을 돕기 위해 이 연구소 역학 팀이 파견되었다. 1925년까지 10개 도시를 관할하는 의료 관측소와 페스트 방역 연구실 및 병원 네트워크는 위생·방역 팀들이 이끄는 위생 프로그램들을 조직했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직장 및 노동자 숙소 청소, 주거 소각, 부검 실시, 장례 조직, 격리 구역 시행, 설치류 및 벼룩 퇴치, 건강 교육 캠페인 등이 진행되었다.”
소련 정부의 보건 정책은 당시 전파된 다음과 같은 공식 슬로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염병에 맞선 투쟁에서부터 더 건강한 노동·생활조건을 위한 투쟁까지”.
그러나 당시 나라를 초토화시켰던 전염성 높은 치명적 역병들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가 주민 록다운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도 동일하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소련 정부는 대규모 집회도 금지하지 않았고,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개인주의적이고 후진적인 조치는 볼셰비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한 조치에 의지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발진티푸스 (특히 반점열)와 같은 질병의 전염성을 몰라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소련 보건당국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일 의학교수 뮐렌스 박사는 1923년 자신의 경험을 담은 팸플릿을 발간했다. 그의 보고서는 볼셰비키가 대규모 집회가 질병 확산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모든 대규모 기념행사 후에, 이미 감염된 노동자들의 집회 후에 질병이 확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그러한 전염병과 싸우는 주된 도구는 쉽게 전염될 수 있는 조건을 질병이 발견할 수 없도록 사람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동시에 소련 정부는 노동자·민중이 집단행동으로 단결할 경우에만,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개인주의적으로 분리되지 않을 경우에만 어떤 사회적 개선도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것들은 오늘 우리가 배울 중요한 교훈들이다. 오늘 이른바 좌파가 대중행동 금지와 함께 록다운 및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반동적 개념을 지지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1920년대 초의 볼셰비키는 코로나19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전염병에 직면했지만, 그러한 질병과 싸우기 위한 사회적·의료적 자원은 오늘보다 훨씬 더 원시적이었다. 그럼에도 볼셰비키는 오늘 대부분의 부르주아 정부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주민에 대한 대량억압 조치들에 결코 의존하지 않았다.
당시 공산주의운동 전체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1918년 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전 세계에 창궐했던 이른바 “스페인 독감”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팬데믹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당시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인 5억 명을 감염시켰다. 약 1천7백만 명에서 5천만 명, 나아가 1억 명까지 사망자 추정치가 다양하다.
그러나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대응은 사람들에게 집에 머물라고 촉구하거나, 대중행동과 계급투쟁을 중단시키거나, 록다운과 같은 억압적인 국가 조치들을 요구하거나, 확실히 이런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과 집단적 대중 활동을 강화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사회 ㅡ 즉 가난과 비참을 극복하고, 그와 함께 그러한 치명적인 팬데믹 확산의 조건을 극복할 사회 ㅡ 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고자 자본가계급의 타도를 위해 싸웠다.
초기 코민테른의 전통에 서 있다고 자처하는 그룹들이 오늘 완전히 반대되는 접근방식을 취한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코로나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던 전염병인) “스페인 독감” 때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적 권리 억압에 전면 반대하고 대중투쟁을 요구했는데, 오늘 코로나19 때 그러한 좌파 그룹들이 민주적 권리에 대한 국가 보나파르트주의적 억압을 지지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사실이다! 오늘 모든 진정한 혁명가들은 레닌과 트로츠키 당시 공산주의운동의 전통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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