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이해와 오해
아프간에서 계급 모순 · 여성 억압 · 반제 저항
미하엘 프뢰브스팅, 혁명적 공산주의인터내셔널 동맹 (RCIT) 국제서기, 2021년 9월 10일, www.thecommunists.net
차례
들어가며
Ⅰ. 나라들 간의 계급적 성격 차이를 무시하기
탈레반은 ...의 대리인이었는가?
“봉건 세력” 탈레반?
Ⅱ. 아프간 농업에서의 토지소유와 계급관계
아프간 여성들은 미국 점령으로 이득을 얻었는가?
2001년 탈레반 전복 이후 아프간에서 아편 재배의 증가
Ⅲ. 여성 억압: 아동 결혼의 예
여성과 소년에 대한 조직적인 강간: 군벌과 그들의 미국 보호자들
Ⅳ. 탈레반: 농촌 빈민층에 뿌리를 둔 소부르주아 이슬람-민족주의 운동
그들 자신의 말로 보는 탈레반의 이슬람-민족주의 언사
20년 반식민지 투쟁의 결과물로서 민중적 기반
Ⅴ. 아프가니스탄 2021: 민중 게릴라 투쟁에 의한 서방 제국주의의 역사적인 패배
결론
* * * * *
들어가며
사건의 역사적인 성격은 해당 사건이 세계정치의 깊은 추이를 어떻게 틀 짓는지, 또 어떻게 반영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수년 전부터 RCIT는 오랜 패권국 미 제국주의가 쇠퇴기에 있다고 지적해 왔다. 이 과정은 세계질서의 불안정을 유발하고,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정권들을 약화시키며, 중국과 러시아 같은 새로운 강대국들에게 공간을 열어준다.[1] 미국이 2001년 이래 20년 동안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 동안 총 77만5천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2조 2600억 달러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2], 비할 바 없이 더 작고 가난한 나라의 민중 게릴라 운동을 상대로 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쇠퇴를 반영하며, 실로 상징한다.
또 그 같은 역사적 격변은 사회주의를 자임하는 조직들의 정치적 성격도 집약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들은 사건의 본질과 기저에 흐르는 역사적 동역학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르주아 여론 및 소부르주아 인텔리들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들은 바리케이드의 올바른 편에 설 수 있을까?
1975년 베트남 전쟁 이후 미 제국주의의 가장 굴욕적인 최대의 패배로 거의 모든 관찰자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당연히 좌파 세력이라면 모두가 환영 일색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영 일색’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이제 누구나 안다. 대부분의 이른바 "사회주의" 조직들이 제국주의 점령에 대항하는 20년의 게릴라 투쟁 뒤에 온 민중 저항의 승리를 미국에게 뿐만 아니라 아프간 인민에게도 재앙으로 성격규정 한다. 실제로 많은 조직들이 탈레반의 지배 하에서보다 제국주의 점령 하에 있는 것이 아프간 인민의 삶에는 더 나았을 것처럼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소위 "좌파"의 많은 단위들이 지배계급의 여론에 기회주의적으로 영합하는 정도가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같은 역사적 사건은 글로벌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드러내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조직들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 이들 "좌파" 조직은 탈레반의 승리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를, 이슬람 근본주의 세계관과 함께 여성에 대한 반동적 정책을 언급하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물론 혁명적 공산주의인터내셔널 동맹 (RCIT)은 1990년대 중반 탈레반 등장 이래로 그들의 반동적 정책을 십분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는 탈레반의 군사적 투쟁, 즉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비혁명 세력이 수행하는 군사적 투쟁에 대한 지지와, 그 비혁명 세력의 정치노선에 대한 비타협적인 반대 사이에 구분선을 그어 왔다. 2001년 가을, 제국주의자들이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시작하기 직전에,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우리가 제국주의 연합군이 패배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이는 탈레반 저항을 포함하여 제국주의에 대한 모든 아프간 군사 저항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3] “제국주의 공격 시에 우리는 미국/영국의 공세에 저항하는 모든 아프간 세력의 군사적 승리를 분명하게 내건다. 여기에는 탈레반 세력도 포함된다. 그들이 제국주의 공세에 저항한다면 말이다. 어떤 식으로도 이것은 뿌리 깊이 반동적인 탈레반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나,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조직이 추구하는 테러 정책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이어져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4]
심약한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진로를 바꾸지 않았고, 2001년 및 그 후 내내 그랬듯이 맑스주의적 반제국주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이 팜플렛의 목적은 아프가니스탄 인민의 반식민지 투쟁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법에 반대하여 제출된 주요 주장들을 다루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선의의 비판들 상당수가 아프가니스탄 현 사태에 맑스주의적 방법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고 ㅡ 또는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ㅡ 확신한다. 또한 그러한 비판들이 탈레반 및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사회적 발전 추이 일반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일면성과 왜곡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류와 과장을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에 대한 논쟁의 중심 쟁점들에 대한 변증법적·유물론적 분석·평가부터 정확히 하는 것이 우선이겠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우리는 국가들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법은 무엇인지 세부적으로 확인하고 나서 제국주의 나라와 반(半)식민지 나라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설명할 것이다. 우리는 아프간 농촌의 구체적인 계급관계와 이것이 탈레반의 계급 성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여성 억압의 다양한 측면과 이것이 탈레반의 정책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다룰 것이다. 우리는 아편 생산에 대한 정책에서 탈레반과 점령군 간에 어떠한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의 의미는 무엇인지 밝힐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이 운동의 정치적 지향점 및 사회적 기반과 관련한 몇몇 쟁점들에 대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이번 패배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 평가 토론할 것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에 집중할 것이므로 현 사태에 대한 평가 분석 및 그것의 전략·전술적 결론을 다시 세부적으로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RCIT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두세 주간에 발표한 일련의 성명과 기사를 이 팜플렛과 함께 일독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한다.[5]
Ⅰ
나라들 간의 계급적 성격 차이를 무시하기
거의 모든 사회주의 조직들이 공유하고 있는 주요 정치적 실패는 아프간 점령 및 이 점령에 맞선 저항운동에 관련된 제 세력의 계급적 성격을 분석하고 인식하는 데 있어 그들의 총체적인 무능함과 무기력이다. “미 제국주의” 또는 “서방 제국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좌파 조직들 사이에는 흔한, 공통된 관행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는 일부 주류 언론인들조차도 이러한 용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제국주의” 범주를 맑스주의 이론에서의 제국주의 의미로 사용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보통 이들 모두는 그런 의미를 배제한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제국주의" 범주를 사용할 뿐이다.
RCIT는 맑스주의적 제국주의 개념의 확고한 옹호자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해 그 밖의 많은 정통 맑스주의자들은 세계가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와 다수의 세계 인구가 살고 있는 종속국 ㅡ 식민지 나라이건 반식민지 나라이건 ㅡ 으로 나뉘어 있다고 설명해왔다.
“사회민주주의 (맑스주의자들은 당시에 스스로를 이렇게 칭했다 – 인용자) 강령은 이 소부르주아 기회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항하는 균형추로서 다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 즉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으로 제 민족이 나뉘어 있는 것은 제국주의 하에서는 기본적이고 중요하며 불가피하다는 전제 말이다.”[6] (“사회주의혁명과 민족자결권”, 1916년)
레닌은 또 다른 글에서 이 생각을 다시 천명했는데, 나중에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강령의 근간이 된 사상이다. “제국주의는 한줌의 강대국들에 의한 전 세계 민족들의 억압이 누적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강령에서의 초점은, 모든 민족을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으로 구분하는 데 두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에 바로 제국주의의 본질이 있는데, 사회배외주의자들과 카우츠키는 이것을 기만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이 구분은 부르주아 평화주의의 시각에서나, 자본주의 하에서 독립 민족들 간의 평화적 경쟁이라는 속물적 유토피아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의미 없는 것이지만,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적 투쟁의 시각에서 볼 때는 극히 유의미한 것이다.”[7]
이와 같이 제국주의는 모든 민족들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맞물려 있는, 그리고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 및 이들 국가의 자본주의 기업들이 세계경제와 세계정치를 지배하는 글로벌 시스템이다. 이러한 제국주의 열강과 독점체들은 (반)식민지 국가에 살고 있는 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초과착취 한다. 현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두 권의 책과 다양한 팜플렛에서 자세히 분석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세부적으로 가지는 않겠다.[8]
또한, 왜 우리가 미국을 부유한 제국주의 국가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가난한 자본주의 반식민지로 (실제로는 지난 20년간 오히려 아프가니스탄은 식민지였다) 간주하는지 여기서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의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이른바 "아 제국주의" 이론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러 차례 설명했듯이[9] 우리는 이 이론을 거부하지만, 이 이론의 제창자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여기서 이 “아 제국주의” 개념을 다루는 것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2001년 미국 ( 및 그 밖의 나토 국가들)의 대 아프간 전쟁과 그 뒤의 이 나라 점령은 가난한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의 고전적인 형태였다. 아프간은 식민지로 전화되어 20년 동안 미국과 미국의 서방 동맹국들이 나라를 지배하며 종속 정부를 만들고 현지 보조 군대 (이름 하여 “아프간 국군”)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고 지휘했다. 따라서 미국/나토 세력은 서방 제국주의 열강을 대표했고, 그들의 아프가니스탄 협력자들은 식민지 하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 그리고 1939-45년 독일의 유럽 점령 당시의 현지 시종들과 다르지 않은 성격이었다.
요컨대, 미국과 유럽 열강은 아프간과는 매우 다른 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열강이 지배 자본주의 국가, 즉 제국주의 국가인 반면, 아프간은 종속 자본주의 나라, 즉 (반)식민지 국가다. 이 전쟁에서 이들 두 당사자 간 계급적 성격상의 그러한 결정적인 차이를 무시하기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여기는 그 누구에게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반)식민지 나라에서 서방 상전들을 몰아내는 투쟁인 미국/나토 점령에 대한 저항은 바로 그 본성상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게릴라 투쟁 ㅡ 탈레반이 이끈 ㅡ 은 명백히 점령군을 겨냥한 것이었다. 둘째, 아프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투쟁을 지지한 주된 이유는 그들 모두가 다름 아닌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러한 반제국주의적 성격은, 우리가 아래에서 보겠지만 탈레반의 이슬람-민족주의 수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탈레반은 ...의 대리인이었는가?
이론적으로는, 우리의 평가에 반대하여 탈레반이 또 다른 제국주의 열강 (예를 들어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리인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들 열강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적도 없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물질적 지원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1980년대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많은 제약이 있다. 그리고 베이징과의 관계도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ㅡ 스탈린주의-자본가 정권에 의해 끔찍한 억압을 맞고 있는 중국 내 위구르족의 무장 이슬람 게릴라 조직 ㅡ 이 수십 년 동안 탈레반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특별히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놀랄 것도 없이, 진지한 사람치고 탈레반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스탈린주의자들 및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탈레반이 미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명백히 이는 큐어넌 매니악 극우 음모론자들을 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기괴한 이론이다. 탈레반이 1990년대 후반에 미국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명백히 이것은 늦어도 2001년에는 적대적인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렇지 않고 탈레반이 미 제국주의의 충실한 대리인이었다면, 왜 워싱턴이 아프간을 폭격하고 침공하고 점령했어야 했을까?! 그리고 미군/나토군이 2001년 10월 이래로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 게릴라 전투원 85,731명 ㅡ 그 중 다수가 탈레반 소속인 ㅡ 을 죽인 것을 이들 청맹과니들은 어떻게 설명할까?[10]
각종 스탈린주의자들의 또 다른 반론은 탈레반이 파키스탄 비밀정보기관인 ISI의 지원을 받았다는 ㅡ 또는 심지어 ISI의 대리인이었다는 ㅡ 것이다. 확실히 어느 정도의 연계가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다. 첫째, 파키스탄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 반식민지 나라다. 따라서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대리인이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으로 전쟁의 계급적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전쟁은 제국주의 나라를 대표하는 세력과 식민지 나라를 대표하는 세력 간의 충돌이기 때문이다. 둘째,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미국과 긴밀한 동맹국이었던 종속 자본주의 나라다. 그러나 지난 일이십 년 동안은 점점 더 중국 제국주의와 제휴해 왔다.[11] 어느 경우든 파키스탄 국가기구가 일차적으로 워싱턴 (및 베이징)의 이익에 부응했지, 탈레반의 이익에 부응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셋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러한 파키스탄의 지원이 피난처 제공, 금전 공여, 약간의 무기 등으로 제한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결코 진지한 군사적 지원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탈레반은 대공포나 미사일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에 CIA로부터 스팅어 미사일을 받고 소련군에 맞서 싸운 무자헤딘의 경우처럼). 반대로 탈레반은 현대식 무기란 것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는 군복도, 종종 군화도 갖추지 못했다! 스탈린주의 신사숙녀 여러분, 잘 생각해보시라. 탈레반에 대한 파키스탄 비밀정보기구의 지원이 얼마나 진지한 것일 수 있었을까?!
끝으로 덧붙이면, 미래에는 물론 상황이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프간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완전히 통합되어버리고 베이징의 정치·경제적 이익에 종속된다면, 탈레반은 중국 제국주의의 일종의 대리인으로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의 음악이고, 그러한 평가는 구체적인 분석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
“봉건 세력” 탈레반?
미국/서방 국가들과 아프간의 계급적 성격을 각각 확정하고 나면 이제 전쟁에 관련된 세력들의 성격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군/나토군의 경우 이것은 매우 간단하다.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공식 군대다. 카불의 행정부와 그들 “군”은 이들 식민 상전들의 협력자/부역자였다.
탈레반은 어느 계급세력을 대표하는가? 통상적으로 스탈린주의자들과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맑스주의자에게는 부차적인 성격의 문제일리가 없을 텐데!) 우리의 반대자들이 소리친다. 탈레반은 "중세적 세력", "초반동", "봉건 세력"이야. 이들 범주가 진실의 요소를 담고 있지만, 그러한 정치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것들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한때 그리도 잘 허물어뜨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좌파" 앵무새들 사이에서 여전히 꽤 인기 있는 고전적인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 학파에서 비롯된 소용없는 낙인찍기 프레임들이다.[12]
탈레반의 정치적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탈레반의 사회적 기반과 그들이 생존하는 사회·경제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좌파의 많은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은 봉건 국가라고, 또는 최소한 농촌 ㅡ 인구의 3/4이 살고 있는 ㅡ 은 그러한 전(前)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가정은 대개 그러한 전 자본주의적 측면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르주아) "근대적" 세력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ㅡ 고의적이든 아니든 ㅡ 이루어진다.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들"이 제국주의 점령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이유다. 사실, 기꺼이 그들은 미국이 자본주의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미국이 "이 중세 국가"를 근대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그들의 주장은 이어진다. 글쎄, 현실에서 그건 작동하지 않았는데. 20년의 제국주의 점령 뒤에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20년의 제국주의 "근대화"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산업"은 아편 생산이다. 마침내, "후진적" 농민들이 이 서방의 시혜에 대해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세계에 보여주었고, 첨단기술로 무장한 권력과 돈의 제왕들을 도망치게 했다!
Ⅱ
아프간 농업에서 토지소유와 계급관계
탈레반 운동의 사회적 기반에 대한 계급적 성격 규명을 위해서는 아프간 인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농촌 지역의 경제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프간 농촌은 봉건적 계급관계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신화를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의 토지 개혁과 수십 년 간의 내전은 대토지 소유자들이 넓은 땅 덩어리를 거머쥐고 있고 농민들은 대부분이 소작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러한 사회관계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아프간 농민들은 소규모 경작지의 소유주다. 한 조사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고 있다. "토지소유권의 보급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몇몇 보고서에서는 농부의 약 60% 수준으로 나타나는데, 2003년에는 90% 이상으로 증가했다. 대부분의 소작인들도 토지소유주다. 한때 "소수의 소유주, 다수의 소작인“으로 묘사됐던 상황에서, 다수의 소유주와 소수의 소작인인 새로운 상황이 생겨났다. 물납 소작 (또는 일부 경우에는 금납)과 농지 저당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13]
2003년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발표한 대규모 종합 연구조사는 아프간 농업에 대한 심층적인 상을 제공한다. 이 연구조사는 미국/NATO의 승리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라서 20년간의 서방 점령 이전의 아프간 사회관계가 반영되어 있다.[14]
아프간 비(非)도시 지역 가구의 대부분은 농업 종사 가구(83.7%)다. 농업에 종사하지 않으며 비농(非農) 자영업을 하지 않는 임금 취득 가구는 전체 비 도시 지역 가구의 11.3%였다. 이 수치는 농촌 지역에 토지가 없는 소규모의 노동자 층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15]
위 연구조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는 농경지가 있는 농장·농가가 약 128만 개 있다.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는 매우 불평등한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다. 농장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 것들뿐이다. 한줌의 소수가 대규모의 땅 덩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연구조사의 저자 중 한 명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프간의 농장들 대부분은 실제로 매우 작다. 10헥타르 이상의 경지 ㅡ 관개지든 천수답이든 ㅡ 를 가지고 있는 농장은 일부 (13.7%)에 불과하다. 이들이 전체 경지의 44.5%를 차지하고 있다. 약 73%의 농장이 5헥타르 미만이다. 이들 농장의 경지 다 합쳐서 전체 경지의 22.8%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라티푼디움은 흔치 않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농장들에 상당한 양의 토지가 편재되어 있다. 20헥타르 이상의 상위 4.9% 농장이 전체 경지의 39% (관개지 30.4%, 천수답 46.4%)를 점하고 있다.... 거의 절반의 농부가 2헥타르 미만의 농지를 가지고 있다. 전체 경지의 7.5%에 해당한다."[16]
이러한 식의 불평등한 토지 분배는 아래 표 1, 2에서 보듯이 남아시아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많은 가난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상황과 강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표 1. 아프간: 농장 규모별 농장 및 경지 분포율, 2002-03년 [17]
농장 규모 (헥타르) 농장 경지
0.50 헥타르 미만 15.8% 0.9%
0.50-0.99 헥타르 13.4% 1.8%
1.00-1.99 18.6% 4.8%
2.00-4.99 25.2% 15.2%
5.00-9.99 13.4% 17.7%
10.0-19.9 8.3% 20.6%
20.0-49.9 4.4% 23.9%
50.0-74.9 0.6% 7.1%
75.0-99.9 0.2% 2.7%
100 헥타르 이상 0.2% 5.2%
표 2. 남아시아 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토지 규모별 농장 수 및 면적 [18]
1 헥타르 미만 1-2 2-6 6-10 10-20 20-60 60-200
남아시아
농장 (%) 69.1 16.8 11.3 2.2 0.5 0.1 0.0
경지 (%) 23.9 21.5 29.7 13.3 6.5 3.9 1.2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농장 (%) 52.0 21.8 18.9 4.3 3.2 0.4 0.3
경지 (%) 11.5 16.2 29.4 17.8 9.0 4.6 10.5
그러나 이 지역에서 훨씬 더 불평등한 토지 분배를 가진 나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이웃 파키스탄에서는 토지 소유자 중 상위 5%가 전체 농지의 64%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작은 농가 농민들 ㅡ 토지 소유자의 65% 가량을 점하는 ㅡ 은 전체 농지의 15%만 소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농촌 가구의 절반 이상(50.8%)이 무토지다.[19]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농민 대다수는 자기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전체 농장의 86.5% ㅡ 경지의 82.9%를 차지하고 있는 ㅡ 가 어떠한 형태의 소작 없이,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임대하거나 누군가로부터 토지를 임차하거나 없이 소유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20] 다시 말해서, 농민 10명 중 8-9명은 자신의 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주지도, 지주를 위해 일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현 불평등은 소수의 대규모 사유지들 ㅡ 전쟁과 토지 개혁으로 대부분 일소된 ㅡ 이 압도적인 때문도, 무토지 농가의 비율이 큰 때문도 아니다. 가족의 식량 수요의 일부 밖에는 댈 수 없는, 그리고 현금 수입은 ㅡ 수입이 있다 하더라도 ㅡ 거의 없는 매우 작은 농장이 대부분인 데서 기인한다."[21]
이는 봉건적 계급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아프간의 계급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한낱 신화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조사연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지주에게 노동 지대를 바치는 사례가 극히 희귀하다는 것인데, 이는 채무 노동이나 그와 관련된 형태의 예농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22]
이것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소작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작제가 널리 퍼진 현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토지소유자이면서 타인에게서 일부 토지를 빌리는 농가가 전체 농가의 10.3%로, 이들 농가의 소유 경지는 전체 경지의 11.6%다."[23] 대부분의 소작농은 이러한 소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조사 데이터가 보여주는 한 가지 특징은 소작농 일반이, 그리고 특수하게는 순 소작농 (자신의 토지가 없는)이 상대적으로 희소하다는 것이다. 표본 조사로는, 순 소작농은 약 27,000명 (전체 농부의 2.5%) 수준을 넘지 않는다... 그들 농가가 점유하는 경지는 약 97,000 헥타르, 즉 전체 경지의 약 1.5%다."[24]
소작농 대부분이 임금노동자로 일해서 추가 수입을 벌어야 할 수밖에 없다. “농가의 임금 보급률은 모든 소작농 범주에서 높게 나타났는데, 그 중 순 소작농들 (이 가운데 96%가 임금소득이 있다) 사이에서 정점을 이뤘고 농부 지주들 (이들 가운데 54%의 임금 소득이 있다) 사이에서 가장 낮은 (그럼에도 여전히 높은) 수준을 보였다. 동시에 농가 가구의 27.7%가 비농업 자영업 소득이 일부 있었지만, 순 소작농 사이에서는 이 비율이 52.7%로까지 상승했다. 농가 가구의 22.3%에서 금전 이체 (주로 송금 받은) 기록이 나타났는데, 순 소작농의 경우는 59.3%에서 이 기록이 나타났다.”[25]
이러한 사회관계가 반드시 소작농과 대토지소유자 간의 관계는 아니다. "또 다른 눈 여겨 볼 특징은 경지의 4.7% (즉 30만 헥타르 이상)가 다양한 소작제도 하에서 농부들이 점유하고 있지만, 소유권은 농업 생산을 직접 하지 않는 지주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들 농사 짓지 않는 지주들이 반드시 부재지주인 것은 아니다. 일부는 같은 마을에 살지만 과부나 노인, 병약자, 또는 전쟁 부상자라서 농사를 짓지 않고 대신에 그들의 땅을 소작농들에게 맡기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부재지주 모두가 보다 강력한 대토지소유자 계급의 성원은 아니다. 일부는 그냥 친척이나 이웃으로, 국외에 살며 그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땅을 경작하게 하는 경우일 수 있다."[26]
대다수의 아프간 농민 가족은 그들이 (형식적으로든 실제로든) 소유하고 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수입을 제공하지 못하는 조그만 땅뙈기에서 매우 열악한 조건 하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아주 작은 농장을 가지고 있다. 경작지가 5헥타르 미만인 전형적인 또는 평균적인 농부는 1.14헥타르의 관개지와 0.5헥타르의 전수답이 있는데, 어느 때든 경작할 수 있는 것은 그 중 일부만이다. 이 면적으로는 11명의 가족 [평균적인 농민 가구 규모 - 인용자]이 먹고 살기에 충분치 않으며, 전체 농장·농가의 70% 가까이 되는 73만여 개의 농가가 이러한 사정으로 고통 받고 있다."[27] 비농업 소득원 (임금, 비농업 자영업, 송금)을 갖지 않은, 아마도 농장 소득으로만 살 수 있는 농가 가구는 전체의 16% 정도로 작은 소수뿐이다.[28]
이와 같이 이들 가난한 농민 가족은 그들 농장의 생산물 (농작물, 가축, 달걀, 가죽, 양모 등)을 팔거나, 돈을 빌리거나, 국외로 이주한 가족들로부터 송금을 받거나, 아니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임금노동자로 일자리를 얻거나 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이다. 위에서 인용한 유엔 식량농업기구 조사연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특히, 전체 농가 가구의 60.8%가 어느 정도의 임금노동 소득이 있다. 화폐 수요는 비공식적인 금전 관계를 통해서도 해결된다. 조사 전 1년 사이에 약 절반의 가구가 대출을 받았고 상당수의 가구가 송금을 받는다. 금전적 수입은 거의 보편적이다. 신고 된 소득원을 보면, 농부들의 96%가 모종의 화폐 소득을 가지고 있다. 4% 미만의 나머지 소수도 보고되지 않은 금전 출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농부 약 절반만이 농장 생산물을 팔며, 96%가 금전적 수입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농부가 농장 이외의 화폐 소득이 있는 것이다. 특용작물을 판매하는 농부들이 23% 정도 된다. 여기에는 밀을 파는 농부뿐만 아니라, 밀 말고 다른 작물을 파는 농부도 포함된다. 그 차이는 멜론이나 콩류 같은 아프간 농부들이 재배하는 중저가의 환금 작물에서 비롯한다. 어떤 형태든 농장 생산물 판매에서 오는 수입이 있는 농가가 전체 농가의 56%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작물 판매, 동물 판매 (또는 둘 다 판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달걀이나 가죽, 양모와 같은 농장 생산물로 추정되는 기타 생산물 판매를 신고한 농가들이 포함된다.[29]
농촌의 낙후된 자본주의 상황을 감안할 때, 임금을 받고 일하는 농촌 가구원들 대부분이 임시 비정규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고, "정규직 종사자는 전체 농촌 가구원의 5분의 1도 안 되었다."[30]
농민들의 신고에 따르면, 약 1/5이 송금을 받는다. 그러나 식량농업기구 조사연구의 저자들이 설명하듯이, "이런 수입원을 감추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진짜 퍼센티지는 틀림없이 더 높다. 수백만 명의 아프간 인들이 이웃 나라들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살고 있어, 송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요 수입원이다."[31]
열악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빚을 떠안아야 한다. 식량농업기구 조사연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2002년 농부들 거의 절반이 신규 부채를 떠안았고 조사 당시 약 60%가 빚을 지고 있었다."[32]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으로 농부들이 대지주나 금융권 자본에 빚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채권자는 많은 경우 채무자의 친척이다. 채무자의 약 41%는 친척에게만 빚을 지고 있는 경우다.... 채권자의 또 다른 큰 범주는 "그 밖의 마을 내 가족 성원"이다. (채무자의 21%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중에서 9%는 오직 “그 밖의 마을 내 가족 성원”에게만, 또 다른 9%는 이와 함께 친척에게도 빚을 졌고, 3%는 기타 조합). 이는 사실상 대다수의 채무자가 가족원이나 같은 마을에 사는 또 다른 가족원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말해준다.”[33]
요약하면, 아프간 농민 가족 대부분은 생계를 유지해나갈 충분한 식량을 대지 못하는 조그만 땅뙈기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족원들은 임금노동자로서 (또는 다른 형태의 비농업 자영업에 의해) 수입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이다. 또 다른 형태의 수입은 가족원이 국외로 이주해 이주자로 (보통 임금노동자로) 일하며 약간의 돈을 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부분의 아프간 농민들이 반(半)소부르주아적 특징과 반 프롤레타리아적 특징이 혼합된 계급적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대규모의 빈곤한 평민층을 대표한다. 위 식량농업기구 조사연구의 저자 중 한 명은 맑스주의자가 아닌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관찰 보고를 한다. "농장 영농은 농가 가구의 성원이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것과, 또는 비농 자영업을 하는 것과 종종 공존한다. 동일한 농민 생계의 양면으로서 말이다. 농촌의 임금 노동인력과 농촌의 농민 인구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선이 없다. 2003년 동계 조사에서는 농가 가구의 과반수(63%)가 2002년 동안의 화폐 임금소득을 신고했다. 이것은 아프간 시골에 노동시장 관계가 깊이 침투했음을 말해준다."[34]
따라서 아프간 농촌의 계급관계는 일차적으로 봉건적 성격이 아니라 낙후한, 미발달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프간 여성들은 미국 점령으로 이득을 얻었는가?
아프간에서 여성 억압은 매우 심각하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ㅡ 그리고 그들의 자유주의 앵무새들과 "좌파" 앵무새들은 ㅡ 이 사실을 들어 20년간의 아프간 점령을 정당화한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는 "후진적인 아프간인들“, 서방 상전들에 의한 폭력적 계몽이 요구되는 "여성 혐오 아프간 남성들"이라는 제국주의-오리엔탈리즘 이데올로기가 한 몫 하고 있다.[35]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여성 해방은 결코 이슈인 적이 없었으며, 순진한 바보들만이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간 여성들을 "배신"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반대로, 제국주의자들은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이러한 순진한 비판은 기회주의 좌익에 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드러내줄 따름이다. a) 그들이 제국주의 미사여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환상을 품고 있다는 사실, b) 여성 억압의 사회·경제적 뿌리에 대한 이해가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
유엔 보고서의 몇몇 수치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유엔은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정리한 전 세계 사회발전 개요를 제공하는 소위 인간개발보고서라는 것을 정기적으로 낸다. 이 보고서에는 가장 우선하여 "성 불평등 지수"라는 것이 실려 있는데, 이에 대해 "생식건강, 여성권한, 노동시장, 이 세 차원에서 여·남 간 성취의 불평등을 반영하는 종합 척도"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36]
아쉽게도, 인간개발보고서는 2009년 호에서야 비로소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2007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데이터가 실려 있다). 이 보고서 최근호는 작년에 나온 것으로 2019년도의 데이터가 실려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 점령 이전 기간의 수치를 제공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년간의 제국주의 시혜 과정에서 아프간 여성들의 상태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보는 것은 가능하다. 언급한 인간개발보고서 2009년 호와 2020년 호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은 2007년 155개국 중 154위였다.[37] 12년 후에는 162개국 중 157위에 랭크된다.[38]
그리하여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과 점령을 공식 승인한 바로 그 기관인 유엔의 공식 수치를 취하더라도, 다른 나라 상황과 비교하여 아프간 여성들의 상황이 나아진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이는 잘 알려진 두 단체 아프간 여성혁명협회와 인권감시단의 보고서 내용일 뿐 아니라 직접 면접을 토대로 아프간 여성 실태를 분석한 여성 연구원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전쟁이 (2001년에 -인용자) 공식적으로 끝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여성 혐오 및 성폭력과 젠더기반폭력 (SGBV)이 등장했다. ‘전후’ 맥락은 강간과 강간하고도 처벌받지 않는 문화에 유리한 폭력의 제도적 정상화를 가져왔다. SGBV의 새로운 프레임은 결혼 생활 중 여성의 생식기 절단, 남편을 따른 순사(殉死), 강제 매춘, 염산 공격, 남편에 의해 자행된 신체 부위 절단, 그리고 증가하는 가정 폭력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아편 소비의 증가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 기관에서의 강력한 군벌들의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39]
두 여성 연구원은 또 "10명 중 9명의 아프간 여성이 신체적, 성적 또는 심리적 폭력에 직면해 있다"는 2015년 연구 내용도 인용한다.[40]
제국주의 점령은 빈곤과 낙후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극복하는 데 단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 점령은 여성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키는 사태발전을 촉진했다. 그 중에는 미/나토 점령군의 핵심 동맹군이 소위 “북부동맹”의 지도자들이라는 사실도 포함된다. 이들 북부동맹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가장 파괴적인 장들 중 하나인 1992-96년의 끔찍한 내전에 책임이 있는 바로 그 군벌들이었다. 이 내전 기간에 이들 군벌은 나라 전반을, 그리고 특히 카불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카불은 1992-93년 겨울에 심각한 식량 위기에 직면했는데, 헤즈비-이슬라미가 남부와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수송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무자헤딘 통치 첫 해에, 카불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고 1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이 헤크마티아르의 로켓탄에 의해서였다. 1996년까지 카불에서 민간인 총 사망자는 5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41] 몇몇 추산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전국에서 약 8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기간은 여성들에게 특히 끔찍한 시기였다. “무자헤딘이 1992년 카불에 입성하여 선포한 이슬람 정부는 여성들에게 제약을 내리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가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여성들은 인종적, 정치적 보복 공격의 주된 표적이 되었다. 1992년과 1996년 사이에 카불이 군벌들 간에 분할 지배되면서 여성들이 특히 취약한 상황에 놓였다. 상대방 파벌에 의해 많은 여성들이 납치되고, 강간당하고, 고문당하고, 강제 결혼 당했다. 수천 명의전쟁과부들이 보통 가족의 유일한 생계 책임자다 보니 집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42]
이들 군벌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미국/나토 제국주의의 핵심 동맹군이 되어 다시 권력에 복귀했다. “탈레반이 붕괴된 직후 미국 주도 연합군은 무자헤딘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새 정부를 세우려 했다. 그리하여 무자헤딘 지도자들은 과도정부 수립을 결정한 2001년 12월 본(Bonn) 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시점에 미국은 군벌들을 권좌에 앉혀 민주주의를 이룬 척 했다. 이들 군벌 집단이 내전 중에 저지른 범죄와 잔혹 행위,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나토 점령군은 내내 눈감고 무시했다. 무자헤딘은 정부 요직을 수락하는 한편, 의회 다수 의석을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은 아프간 군벌들에게 서로에 대한 면책특권을 확립할 황금 같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 아프간 인민에게 정의는 죽었다.”[43]
최근 뉴요커 지에 보도된, 아프간 남부 농촌 여성들에 대한 일련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르포 기사는, 농촌 여성들에게 탈레반 치하의 삶이 나빴다면, 친 나토 군벌들 치하에서는 더 나빠졌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샤키라와 그 계곡 마을의 다른 여성들에게 탈레반 치하에 대해 떠올려보라고 요청하자 그녀들은 보편적인 잣대로 탈레반 운동을 판단하길 꺼려하며, 오직 이전 상황과 비교해서만 말하려 했다. 이웃 계곡에 사는 여성 파자로는 ‘그들이 더 관대했어요. 그들은 우리를 정중하게 대했어요’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탈레반 치하의 삶을, 밤중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선 사람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검문소를 뺀 무자헤딘 치하의 삶과 같은 것으로 묘사했다."[44]
2001년 이후, 탈레반의 반동적 사회정책의 극단적인 버전 ㅡ 여성의 교육 및 공공장소 일반에 대한 접근을 금지하거나 최소한 극도로 제한했던 ㅡ 은 공식적으로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미군/나토 점령군으로부터 각 주(州)를 넘겨받은 군벌들과 그들의 부하들에 의한 만연한 여성 학대와 강간과 살해였다. "2005년 3월, 미국에 본부를 둔 인권 감시 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이제 주지사와 고위 경찰 간부로 자리 잡은 전직 군벌들이 '만연한 여성·아동 강간, 살인, 불법 감금, 강제 이주, 인신매매, 강제 결혼에 연루되어 있다'고 비난했다."[45]
미군/NATO 점령군의 현지 대리인으로서 이들 군벌의 지배는 여성들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탈레반이 (후진적이고 가부장적인) 중앙집권적 법·질서 형태를 실시했다면, 나토/군벌 세력의 지배는 수많은 지역 갱단과 민병대들이 소지한 무기를 사용하여 주민 일반, 특히 여성과 아동을 공포에 떨게 한 "무법" 상황을 만들어 냈다. "RAWA, 알자지라, 아프간 뉴스통신의 보도와 뉴스들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성적 학대가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아동학대도 '매일' 뉴스의 일부가 되었다. '아프간, 특히 북부 지역에서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와 강간이 만연하고 있다.' 같은 뉴스는 14세 소년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여 중상을 입은 3세 아동의 사례를 소개하며 이렇게 보도했다. 가정 폭력은 부풀려진 탈레반 정권 종말 이후 증가해왔다. 그것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다. 은신처의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가정 폭력으로부터 탈출한 후, 그들의 가족이나 시집 식구들이 전통에 의한 '합법적인' 형태의 폭력에 대해 이 여성들이 '무례'를 범했다며 군 지휘관들의 지원을 구했다고 말했다. 전직 군 지휘관들에 의해 법이 내려지고 '나라의 두 자리 수 실업률의 압박이 더 쉽게 느껴지는' 이른바 '평화로운 지역'에서 가정 폭력은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46]
따라서 서방의 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좌파 앵무새들이 카불만 보고 여성의 처지를 판단한다면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비 도시 지역에 살고 있는 아프간 여성 대중에게 나토 점령 하에서 생활은 더 나빠졌다. 위에서 언급한 뉴요커 르포기사에 나오는 남부 아프간에 살고 있는 여성들과의 인터뷰는 이 점을 확인해준다. "헬만드 상진 지역에서는 내가 젠더 문제를 꺼낼 때면 언제나 마을 여성들은 비웃는 반응을 보였다. ‘저들은 카불 여성들에게는 권리를 주고 있고, 여기서는 여성들을 죽이고 있어요"라고 파자로는 말했다. 판 킬레이에 사는 마르지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게 정의인가요? 당신들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의 오빠를 죽이고, 우리의 아버지를 죽일 때 이건 여성의 권리가 아닙니다." 인근 마을의 칼리다는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권리도 가져다주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냥 와서 싸우고 죽이다가 떠났어요."[47]
이 같은 상황은 다른 연구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외국 관측통들에게 새 탈레반 정부의 특이한 사항 하나는 일상생활에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세운 미덕증진· 악행방지부(部)였다. 3만 명이 넘는 부서가 종교 예배, 복장 규정의 준수 및 텔레비전이나 음악, 연날리기와 같은 오락의 금지를 강제하는 일을 담당했다. 모든 여성들은 부르카를 착용해야 했고 가까운 남자 친척이 동행하지 않는 한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포고령은 여학생들의 학교 출석을 금지시킨 것이었다. 규제의 영향은 시골과는 대조적으로 여성들이 교육과 고용 기회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도시 지역에서 가장 크게 느껴졌다. 공공장소에서 여성을 때리는 것을 포함한 공개 처벌을 통해 규제가 시행되었다. 반면, 긍정적인 변화는 주로 치안 분야에서 느껴졌다. 도로는 범법 요소들부터 해방되어 밤에도 여행이 가능해졌다. 1997년 잘랄라바드 시 근처의 난민촌에서 120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한 조사는 여성들이 이전 정권 때보다 탈레반 정권 하에서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범죄와 사적 분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이슬람 법원의 설립을 통한 엄격한 사법 집행은 일반 치안과 질서에 상당히 기여했다. 살인자는 공개 처형에, 절도범은 공개 절단형에 처해졌다.”[48]
2001년 탈레반 전복 이후 아프간에서 아편 재배의 증가
이러한 상황은 나토/군벌 지배가 아프가니스탄에 사회진보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비춰주는 또 다른 사태발전, 즉 아편 생산과 소비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더 악화되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탈레반은 아편 생산을 금지하고 2000년까지는 대부분 근절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탈레반 전복과 미군 점령의 시작과 함께 급진적으로 뒤집혔다. 새 제국주의 상전들은 그들의 대리인들에게 부를 늘려줄 수 있는 수익성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현지 군벌들은 탈레반이 근절해 놓은 사악한 비즈니스를 되살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했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 중 동남아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편 거래에 미 점령군이 개입한 것에 대한 스캔들이 공개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아래 표 3은 이 점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준다. 탈레반이 아편 생산을 금지한 이후 아편 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했고, 탈레반 통치의 마지막 해인 2001년까지는 185톤만 생산됐고 대부분 근절됐다. 그러나 미군 점령이 시작되고 군벌들이 나라를 접수한 뒤 아편 생산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유엔의 공식 수치에 따르면, 단 1년 만에 아편 생산량이 18배 이상 증가했다! 그 이래로 아편 생산은 훨씬 더 증가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서방 점령은 아편 생산자들과 마약상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만나(양식)였다!
표 3. 아프간에서 아편 생산, 1999-2020년 (단위 톤) [49]
연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4년 2006년 2008년 2010년 2012년 2014년 2016년 2018년 2020년
톤 4,565 3,276 185 3,400 4,200 5,300 5,900 3,700
6,400 4,800 6,400 6,300 6,300
아프가니스탄 역사에 관한 책을 쓴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확인해주고 있다. “2001년 (탈레반의 금지 조치로 생산이 부진했던 때인) 185톤에 불과했던 아편 생산량이 이듬해 2700톤으로 다시 급증했고 2004년에는 4200톤에 육박해 전 세계 생산량의 87%를 점할 정도였다.”[50] 다시 말해서 제국주의 점령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세계 아편 생산의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한 것이다! 매년 약 50만 명이 약물 사용으로 사망한다는 ㅡ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ㅡ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이 죽음들 중 70% 이상이 아편 합성마취제와 관련이 있다![51]
그러한 아편 생산 증가는 여성들에게 심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남성 마약 중독자의 수가 급증하면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도 크게 증가했다. 구체적인 수치는 존재하지 않지만, 조사연구자들은 이 혐오스런 사태발전에 대해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프간 점령이 아편 소비의 비옥한 토양을 허용해주면서,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한 다른 ㅡ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ㅡ 힘의 원천을 찿는 군사화된 남성성의 급진적인 변화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면서 최근 여성에 대한 폭력도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가정 시나리오는 전쟁이 사적 영역을 정치화하고 군사화하면서 더 이상 여성에게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 탈레반 시대에 만들어진 불안과 여성혐오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로, 신체적·심리적 폭력의 해소를 위한 진지한 모색 없이 사회 재건을 위한 달러 투입은 오히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다른 형태의 성폭력을 의미하는 새로운 형태의 불안을 조장했다."[52]
탈레반은 자신들이 독극물 생산을 억제 금지시켰는데 제국주의 점령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세계 아편 생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거듭 주목을 촉구했다. "미국 점령 전 이슬람 토후국은 마약 재배를 제로 상태로까지 근절할 수 있었는데, 이제 미국 점령 하에서 아프가니스탄은 마약 재배와 수출에서 세계 기록을 깼다."[53]
미국의 점령이 마약상들에게 영광의 시기를 허락했지만, 이제 그러한 황금시대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미 탈레반은 2021년 8월 집권 직후 양귀비 재배 금지에 착수했다.[54]
Ⅲ
여성 억압: 아동 결혼의 예
이제 여성 억압의 또 다른 측면인 아동 결혼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불행하게도, 이 암적 관행은 수세기 이래로 아프가니스탄에 만연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탈레반에 의해 야기된 것도 아니고 이슬람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실제로는 이것은 종교에 관계없이 가난한 나라들에서 널리 퍼진 현상이다. 아래 표 4에서는 몇몇 아시아 ·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아동 결혼이 만연해 있는 수치를 볼 수 있다. 수치는 2001년에 발표된 유니세프의 연구에서 따온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수치는 탈레반이 아직 권력을 잡고 있던, 서방의 침공 이전 시기에 대한 수치다.
표 4 몇몇 아시아 · 아프리카 나라에서의 아동 결혼, 2001년 [55]
결혼한 청소년들, 15-19세의 결혼 비율
나라 소년 소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5 74
니제르 4 70
콩고 12 56
우간다 11 50
말리 5 50
아시아
아프가니스탄 9 54
방글라데시 5 51
네팔 14 42
아래 표 5에서 우리는 아동 결혼의 만연이 무슬림 나라들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종교에 관계없이 가난한 나라들에서 존재하는 모종의 관행 같은 것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보다 실제적인 통계를 정리했다.
표 5. 아동 결혼 만연이 가장 높은 상위 20개국, 2020년 [56]
나라 백분율
니제르 76%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68%
차드 67%
방글라데시 59%
말리 54%
모잠비크 53%
부르키나파소 52%
남수단 52%
기니 47%
소말리아 45%
나이지리아 43%
말라위 42%
에리트레아 41%
에티오피아 40%
마다가스카르 40%
네팔 40%
우간다 34%
콩고민주공화국 37%
모리타니 37%
시에라리온 39%
범례: 18세 이전에 처음 결혼하거나 결혼을 한 20-24세 여성의 비율.
출처: 다중 지표 클러스터 조사(MICS)와 인구 및 건강 조사(DHS), 그리고 그 밖의 각국 조사에 근거한 유니세프 글로벌 데이터베이스 2020년.
서방 열강이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라면 이 나라들 다 침공하고 점령했어야 했을 것이다. ”여성의 권리“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의 추악상을 가리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화과 잎일 뿐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아동 결혼이라는 야만적인 관행이 아프가니스탄에 특유한 것도, 무슬림 나라들에 고유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나 힌두교가 다수 종교인 나라들에서도 아동 결혼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규범과 관습이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 특히 딸들을 강제 조혼시키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 자체가 사회·경제적 원인을 가지고 있음을 봐야 한다.
그러한 관습과 사회·경제적 원인 사이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많은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유니세프는 보고서에서 빈곤이 극심한 지역에서는 "어린 소녀가 경제적 부담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57] 어린 소녀가 나이 많은 남자, 즉 부를 축적했을 수도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가난한 가족을 그러한 부담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신부 값도 받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지역에서의 결혼은 여성에게 모종의 보호책이 되어줄 수도 있다. 유니세프의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라크, 시리아, 니제르와 비슷하게, 불안정한 조건에서는 가족들이 딸들을 성적 착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찍 결혼시켜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고, 금전적 이득도 얻을 수 있어서다"라고 설명한다.[58]
아동 결혼이 피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수많은 불이익과 고통을 가져오는지 더 말해 무엇 하랴. 이 야만적인 전통을 극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미래의 사회주의 노동자·농민 공화국의 주요 임무라는 것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빈곤층 부모들의 결정에 구체적인 이유가 존재하며, 이러한 결정들이 물질적, 경제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단순히 "교육 부족"의 결과가 아니라 말이다.
우리는 미국/NATO 점령 20년 동안 아동 결혼의 확산이 줄었는지 문제를 검토하는 것으로 이 장을 마무리할 것이다. 이 기간 조사의 타당성이 의심되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연구원들이 주로 또는 오직 카불에서 현장 여론조사를 하고 그 밖의 지방 주들에서는 전화나 스카이프를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조사가 종종 이루어지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59] 여기에는 가장 최근의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아동 결혼에 대한 유니세프의 2018년 조사도 포함된다.[60] 당연히 이러한 조사 방식은 일방적인 사회적 선별에 의해 가난한 농촌 대중 ㅡ 아프간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ㅡ 에게 불리한 조사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제국주의 점령 지지자들의, 아동 결혼 확산이 감소했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엔 자신이 발표한 수치를 근거로 볼 때 감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최신 유니세프 2018년 조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조사 대상 5개 주 전체 가구의 42%는 18세 이전에 결혼한 가구원이 1명 이상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가장 최근에 수집된 설문조사 데이터보다 약간 높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이 주제에 대해 이전에 수집한 다른 데이터와 대체로 일치한다. 예를 들어, AMICS 보고는 20-59세 여성들 중 18세가 되기 전에 결혼한 여성의 비율을 46.3%로 제시한다.... DHS 2015년 보고에서도 비슷한 추세가 확인되었다. (여성의 45%, 남성의 11%가 18세 이전에 결혼했다).”[61]
이 데이터를 위의 표 4에서 제시된 데이터와 비교해보면, UN 자신이 발표한 수치들에서도 야만적인 아동결혼 현상의 유의미한 감소는 찾을 수 없다.
여성과 소년에 대한 조직적인 강간: 군벌과 그들의 보호자 미국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2001년 말 군벌들의 복귀는 권력자 남성들이 여성과 소녀들을 납치하고 강간할 수 있는 시기의 시작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62] 그러나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언론 보도에서 대부분 무시되고 있는 또 다른 특징에 주목을 촉구한다. 이것은 바차 바지라는 이름의 야비한 행태로, 대략 "소년 놀이" 쯤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권력자 또는 부자 현지 인사들과 사업가들에 의한” 만연한 미성년 소년들의 노예화와 성적 학대 현상을 두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되는 용어다.[63] 종종 이 소년들은 소녀 복장을 하고 이들 남성들을 위한 성 노예로 봉사하도록 강요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사이코 범죄자가 저지른 해괴한 범죄 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간 군벌, 사업가, 군 지휘관들 사이에 만연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정부 감시단체는 2010년부터 2016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프간 군에 의한 심각한 “인권 유린” 사례 5,753건을 열거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중 많은 사례가 바차 바지와 관련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보고서에는 그러한 “인권 유린”의 아주 일부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이 보고서조차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프간 보안군이 저지른 아동 성폭력의 전모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아프간 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의 보고서는 말했다. 그러나 최근 기밀 해제된 보고서에서는, 인터뷰한 개인과 단체 3분의 2가 '아프간 보안군에 의한 아동 성폭행 사건 또는 이와 관련된 성 착취'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64]
그러나 잔학무도한, 충격적인 것은 미 제국주의의 아프간 마름들의 이 만연한 강간 문화만이 아니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미 점령군 사령부가 이러한 강간 문화를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이 문화를 용인하라고 대놓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미 국방부 감찰관이 목요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 부대들은 협력 파트너인 아프간 보안군에 의한 아동 강간과 학대를 무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5]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미군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5,753차례나 아프간 군부대들에게 ‘중대한 인권 유린’ 사례가 없었는지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만약 있다면, 미국 법은 문제가 되는 부대에 군사원조를 중단하도록 되어 있다. 단 한 번도 그런 일 [군사원조를 중단하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66]
그럼에도 미군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개입한 사건들이 있었다. 이런 경우, 군 지휘부는 그 병사들을 징계하거나 군에서 쫓아냈다. “그 관행을 눈감아주라고 부추겼던 상관들 때문에 졸지에 군 경력을 망쳐버리고 범법자 신세가 됐다고 불만을 토로한 병사들이 있다.”[67]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은 두 유명한 사례가 있는데, 미 점령군의 정책을 잘 보여준다. 하나는 댄 퀸 대위의 경우다. 당시 특수부대 장교였던 댄 퀸은 아프간 군 지휘관이 한 소년을 침대에 묶어놓고 성노예로 삼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두들겨 팼다. 이로 인해 댄 퀸은 보직 해임됐다. 다른 한 사례는 찰스 마틀랜드 중사의 경우다. 일급 훈장을 받은 그린베레 대원 찰스 마틀랜드는 악명 높은 아동 강간범인 아프간 쿤두즈의 경찰 간부를 때려눕힌 뒤 군에서 나갈 것을 강요받았다. 마틀랜드는 경찰 간부가 소년을 납치하여 강간하고는, 소년을 구하려 한 소년의 어머니를 때린 것에 격분했다.[68]
나중에 군을 떠난 댄 퀸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매우 적절한 결론을 끌어낸다. "우리가 여기 있은 이유는 탈레반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끔찍한 짓을 하는지, 그들이 어떻게 인권을 빼앗아 가고 있는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탈레반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사람들을 권력에 밀어 넣고 있었다. 이것은 마을 어른들도 나에게 한 얘기다."[69]
이 소름끼치는 여성 강간과 바차 바지를 "후진적인 아프간 국민들"의 전형적인 특성 같은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여성 강간과 바치 바지 등의 추악한 ‘문화’는 총과 권력을 가진 자들, 지배 엘리트의 전형적인 특성이지, 일반 민중의 특성이 아니다.
탈레반이 언제나 이 문화에 반대하고 그것을 근절하려고 노력해온 유일한 세력 (적어도 유일의 유의미한 세력)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실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간범에게 엄격하다고 자찬한다. "탈레반의 전설에 따르면, 1994년 7월 오마르와 그의 학생 30명이 칸다하르 근처에서 탄압받는 시민들의 간청에 응하여, 게릴라 지도자에 의해 납치, 강간당한 두 소녀를 구출했다. 오마르는 또 칸다하리족 두 군벌이 어린 칸다하리 소년의 성접대를 두고 서로 싸웠을 때도 개입했다."[70]
이 전설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탈레반이 바차 바지 문화를 공격하고 감소시킨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한 법학 학술지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차 바지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그것의 뿌리는 19세기 후반과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관습이 적어도 오스만 제국 지배 이래로 중앙아시아에서 널리 퍼졌긴 했지만 말이다. 바차 바지 관행은 미국, 파키스탄,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소련의 아프간 점령 (1979-89년)에 저항한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 내의 아프간 파가 결성한 탈레반의 극단주의 통치 기간 동안 두드러지게 감소했다. 1990년대 중반, 탈레반 극단주의 그룹은 카불을 장악했고, 이어서 전 대통령을 광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2001년 미국 주도의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바차 바지가 돌아왔다."[71]
따라서 탈레반의 그러한 다년간의 행보가 아프간 인민들 사이에서 그들을 인기 있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차 바지 문제는 우리의 문화적 가치가 그들의 문화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 같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아프간 인들은 이런 행동을 끔찍하게 여기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것은 탈레반이 용인해 온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탈레반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충원 수단이 되어 왔다."[72]
요약하자면, 서방 점령 하의 아프가니스탄은 강간범과 마약상들에게 천국이었다. 무지한 바보들만이 이 나라에서 누구도 이 점령 체제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다. 왜 자유주의 언론인들과 기회주의 좌파는 많은 아프간 인들이 탈레반의 승리를 해악이 덜한 것으로 보는 것에 놀랄까?!
Ⅳ
탈레반: 농촌 빈민층에 뿌리를 둔 소부르주아 이슬람-민족주의 운동
널리 알려진 대로, 언제나 탈레반은 여성을 비롯한 그 밖의 피억압 계층들에게 해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사회 반동적 강령을 가진 운동이었다. 또한 탈레반은 반자본주의 의제를 가져 본 적도 없고,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투쟁이 그들 강령의 일부였던 적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며, 진지한 관찰자 ㅡ 맑스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ㅡ 라면 그러한 맞긴 하지만 일면적인 평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탈레반을 포함하여 그 어느 정치운동도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목표만 가지고 판단해선 안 된다. 그들의 운동이 놓여 있는 객관적인 구체적 상황 하에서의 실제 활동을 가지고도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해당 정치운동에 어느 계급이 압력을 가하는지, 그 정치운동은 어느 계급과 싸우고 있는지, 어느 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정치 운동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이 모든 요소들을 고려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좌파 조직들은 여기서 실패하며, 그 결과 일면적이고 그릇된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과거 여러 문서를 통해 다양한 이슬람주의 조직들의 서로 다른 목표와 역할을 주목해 왔다. 심지어는 동일한 조직이 다른 상황 아래서 다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슬람주의에 관한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서로 다른 이슬람주의 조류들과 조직들을 개괄해보면, 이슬람주의자들의 전 세계적 또는 국제적 통일이라는 관념은 모두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그와 이슬람주의 이데올로그 양측 모두가 반동적인 목적을 위해 창조한 신화다. 현실에서 각각의 이슬람 단체들은 ㅡ 집권 세력이든 반정부 세력이든, 테러 수단을 사용하든 헌법상의 수단을 사용하든 ㅡ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정권에 대한 태도에서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일국적·민족적 조직으로서 특정 사회계급 (또는 계급 분파)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주의 조류들, 조직들, 운동들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다름 아닌 국제적·일국적 계급투쟁들이다. 그리고 이 계급투쟁들이 한 ‘이슬람주의’ 조직을 그냥 단지 ‘이슬람’ 조직으로 되도록 이끌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색조의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넘나들 틈 없이 구획이 분명하거나 상호 배타적인 범주가 아니다.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진화할 수 있는 과도기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들이 존재한다. 일부 이슬람주의 세력은 지배계급의 직접적인 표현으로서, 지배계급을 대표하여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일부 이슬람주의 세력은 절망적인 중간계급과 소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심지어는 진보적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슬람주의 세력도 있다.”[73]
시리아 혁명에 관한 팜플렛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당연히, 이슬람주의 세력들 간에는 여러 색조가 있다.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몇몇 세력은 샤리아(Sharia) 법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려 한다. (예를 들어 이집트 무르시 정부가 그렇다). 또 다른 몇몇 세력은 민주적 제도들 없는 반동적인 칼리프 국가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이슬람주의 운동들을 판단할 때 주어진 구체적 투쟁에서 그들이 하고 있는 현재 역할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해왔다. 그리고 우리가 이슬람주의에 관한 우리의 테제에서 상세히 설명했듯이, 스탈린주의와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번번이 투쟁을 배신해 온 것을 감안할 때 이슬람주의 조류들이 반독재 · 민족해방 대중운동들에서 여러 번 그 선두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예로, 이집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체첸, 예멘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74]
탈레반은 1994년 지역 및 부족 지도자들이 벌인 범죄적인 내전에 대항하여 싸우다 떠오른 정치운동의 한 예다. 권력을 잡으면서 탈레반은 반식민지 나라의 낙후된 자본주의 사회를 기반으로 지배계급 권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는 지배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탈레반은 당시 패권 강대국이었던 미국을 비롯하여 제국주의 서방 전체와 맞부딪혔다. 최종적으로 탈레반은 2001년 가을 나토의 공격을 받고 전복되었다. 한 방에 집권당에서 지하 게릴라 운동으로 전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탈레반은 농촌 대중 속에서 뿌리를 공고히 하고 확대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것은 신병을 충원하고, 점령군 및 그들의 현지 대리인들에 대항하여 촌락민들의 보호를 얻어내며, 무장봉기를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탈레반이 자신들 존재 기간 중 짧은 시간 동안만 통치 정당이었고 지난 20년 동안은 제국주의 점령에 대항하여 싸우는 게릴라 운동으로 활동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탈레반으로서는 농촌의 가난한 대중 속에 확고히 기반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 조건이었다.
탈레반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1994년 등장했을 때 탈레반은 부족 구조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이슬람주의 세력들과 차별성을 보였다. 탈레반은 초창기에 (그리고 보다 긴 기간 동안에) 주로 파슈툰 족 ㅡ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40-50%를 점하는 최대 민족 집단 ㅡ 에 기반이 있었지만, 부족 구조에 기반하여 활동하는 것을 피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관찰자들이 보통 무시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부족 구조와는 독립적인 탈레반의 특성이 몇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그러한 독자성은 탈레반이 서로 다른 부족 출신의 사람들을 통합하고 부족들 간의 갈등을 진정시키는 것을 보다 쉽게 만들었다. 실제로 1994-96년에 탈레반은 지역 민병대들에게 무장 해제하고 부족 위에 있는 통일된 국가 아래서 단합할 것을 요구하여 민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탈레반은 특정 부족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를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한 정통한 분석가는 2009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이미 탈레반의 이 특징을 지적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부족 구조와 뿌리 깊이 대립하는 혁명적 운동이다. 그들은 물라 (율법가들)를 그들이 창조하고자 하는 사회와 국가의 핵심 정치 지도자로 떠받든다."[75]
탈레반의 정책은 또한 부족 지도자들의 전통적인 지배를 약화시켰다. 1996-2001년 제1차 탈레반 정부에 대한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탈레반 시대에, 지역민들의 눈에 비친 지역 지휘관의 합당함에 대해 캐묻는 탈레반의 관행은 지역 지휘관들의 독단적인 영향력을 제약했다. 이와 함께 탈레반이 북동부에 주둔하기 전 수년간 아무런 진전이나 해결 없이 끓어오르고 있던 분쟁 사건에 대한 신속한 사법 집행은 ‘전래’ 원로들에게서 그들의 소관업무를 빼앗고 종종 그들을 이제는 불필요한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76]
물론 탈레반이 부족 구조의 대안으로 내건 것은 현대 국가가 아니라, 율법가들을 각 지방 지도자로 하는 중앙집권적 신정(神政) 국가 (신정-자본가 국가)다. 그럼에도 1992-96년의 끔찍한 내전 상황에서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이 덜한 것으로 보였다. 이 내전 기간에 지역 민병대들은 도로마다 검문소를 설치하고 높은 통행세를 요구했고, 갖은 전횡으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탈레반은 이 모든 것을 없앤 모델을 제시했다.
부족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이 탈레반에게 허용해준 또 한 가지 권능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 군벌들의 강간 문화에 맞서 개입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미국/나토 점령군이 들어서면서 이 상황이 다시 뒤집히고 부족구조 · 지역군벌 체제가 되돌아왔다. 물론 당시에 제국주의자들은 그러한 구 체제의 복귀가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고 나라를 위무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탈레반 지도자들이 몰려나자 부족 통치가 많은 지역에서, 특히 파슈툰 지역에서 재개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군벌들이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ㅡ 이데올로기나 성문법보다는 무기와 실용주의에 기대어 ㅡ 권력을 얻는 이러한 봉건제 복귀가 신생 정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전문가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에게 평화를 위한 가장 좋은 기회는 불안정하지만 ㅡ 심지어 잔인하지만 ㅡ 효과가 있는 전통적인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7]
그들 자신의 말로 보는 탈레반의 이슬람-민족주의 언사
더욱이 2001년부터 지금까지 탈레반의 주된 활동은 미국/나토 점령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이와 같이 탈레반이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끈 것이 또한 그들의 대중적인 표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탈레반은 공개 성명에서 그들의 목표가 외국 점령자들을 축출하고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종교와 섞여서, 즉 이슬람에 호소하는 내용들과 혼합된 형태로 제기됐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서구 식민주의, 불의, 잔혹성, 만행, 부패, 그리고 서구식 노출 문화에 맞서 형제애로 손을 맞잡으라; 민중 이슬람 혁명의 방향으로 견고한 벽처럼 진군하라."[78]
“그러나 미국과 나토에 대항하는 현 성전(聖戰)에서는 미국이 두려워 무자헤딘을 지지할 나라가 없다. 또한 소련에 대항한 성전 때처럼 인민들이 공공연하게 무자헤딘을 지지하는 것도 어렵다.... 요약하자면, 성전의 목표 (참된 이슬람 체제 확립) 달성을 위해서는 무자헤딘과 우리 인민들 간 긴밀한 이해와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 인민들의 협력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성공과 정복은 일시적일 것이다. 현재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이 우리나라를 장악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제국주의 세력은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괴뢰정권과 안보협정을 체결했다. 나는 식민주의자들이 더 이상 무자헤딘을 상대로 적극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신 자신들의 기술력과 괴뢰정권의 군대를 방패로 사용할 것이다.”[79]
"평화는 다른 어떤 나라나 지역보다 우리의 사랑하는 나라에서 더 쉽게 달성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아프간 사람들은 5가지 공통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아프가니스탄은 독립주권 국가다.
– 아프간 인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틀어 외세의 침략과 침략자들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 아프간 인들은 예속된 삶도, 외세 통치의 앞잡이 짓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다수는 무슬림이다.
- 아프간 인들은 독립적인 이슬람 정부를 원한다.
앞서 언급한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평화를 위한 다음의 세 가지 의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 모든 외국군은 우리나라에서 철수해야 한다.
- 안보협정을 포함하여, 우리의 주권과 영토전일성,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정체성에 모순되는 모든 협정은 무효 선언되어야 한다.
- 이슬람 정부가 수립되고 이슬람 샤리아가 완전하게 시행되어야 한다"[80]
“제국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불법 부당한 구실이 늘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사건이 좋은 예다. 이슬라마바드 주재 이슬람토후국 [탈레반 정부] 대사관은 그 사건이 있고나서 즉각 기자회견을 통해 이 사건을 비난하고 아프간 이슬람토후국 (IEA)의 연루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미국 관리들은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우리 독립국가를 침략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했다.... 독립과 이슬람 체제 확립은 아프간 무슬림 국가의 정당한 권리다”[81]
20년 반식민지 투쟁의 결과물로서 민중적 기반
물론 1990년대 탈레반과 2001년 이후 반(反)점령 투쟁기의 탈레반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며, 서방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20년간의 게릴라 투쟁의 조건은 많은 활동가들의 의식과 이 조직의 레토릭, 프로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가장 촉망되는 정통성 담지자를 자임하던 2001년 이전의 탈레반과 비슷한 점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2001년 이후의 탈레반은 자신을 많은 점에서 별개의 존재로 드러내고 있다. 이전 탈레반과의 단절을 강조하기 위한 네오 탈레반 또는 새 탈레반이라는 용어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82]
실제로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반식민지 투쟁에서 탈레반의 핵심적인 역할과 그들의 (이슬람) 민족주의 호소가 그들이 민중적 지지 기반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던 주된 이유였다. 심지어는 미군 점령기에 점령군 통제 지역 ㅡ 여기서는 공공연하게 탈레반에게 동정심을 표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 ㅡ 에서 실시된 조사에서도 저항 세력에 대한 높은 지지가 드러났다. “2001년에 탈레반은 무자헤딘이 반 소련 저항기에 누렸던 것과 같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무자헤딘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2013년 아시아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현지 응답자의 35%는 주로 아프가니스탄의 대의를 회복하기 위해 저항세력에 동조했다. (조사가 대부분 정부 통제 지역에서 실시되어 실제 수치는 훨씬 더 높을 수 있다.)”[83]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탈레반이 주로 농촌의 소부르주아 ·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의 지지에 의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층은 군벌, 강간 문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검문소 체제, 나토군의 공습과 폭격 등등의 주 피해자였다. 이들 층은 부족 구조의 약화와 군벌들의 제거를 보는 데 공통의 관심사를 가졌다. 이들 층은 제국주의 점령의 종식을 보고 싶어 했다. 이들 층은 탈레반이 수만 명의 전투원을 충원하는 기반이 되어주었고, 이 민중 기반 속을 탈레반은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점령에 맞서 싸우는 반식민지, 민족저항 세력으로서 탈레반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음을 설명할 길이 없다. 처음에는 몇 천 명, 나중에는 수만 명의 게릴라 운동이 원시적인 무기를 가지고 군복과 군화도 없이 어떻게 가장 강력한 서방 연합군과 그들의 현지 대리인을 패퇴시킬 수 있었을까?! 한 서방 군사분석가는 양 진영의 극단적인 불균형에 주목한다. "2009-13년 동안 탈레반은 훨씬 더 큰 세력에 맞섰다. 연합군 가운데 미군이 한때 10만 명을 상회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자금으로, 아프간 보안군은 2014년까지 30만 명 이상으로 늘었고, 미국의 동맹국들이 수만 명의 추가 전투병력을 댔다. 탈레반의 적들, 특히 미국은 기술과 화력 면에서 엄청난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공군력은 탈레반에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탈레반은 1950년대 군사기술에 주로 의존했으며 중기관총 외에는 대공방어가 거의 또는 아예 없었다. 2002-14년 동안 탈레반 전투부대들은 연평균 10-20%의 사상자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에 오면, 초기 반군 가담자 중 살아남아 전말을 들려주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대오에 살아남은, 특히 정예 기동부대에 아직 살아남은 대원들은 자신의 전우가 팔다리에서 몸통까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탈레반과 그들의 명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들의 회복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84]
탈레반이 민중 지지 기반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리고 제국주의 점령군이 그러한 지지 기반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탈레반이 그러한 압도적인 세력을 패퇴시킬 수 있었을까?!
농촌 지역인 남부의 헬만드 주의 아프간 사람들 ㅡ 남녀 모두 ㅡ 과 많은 인터뷰를 한 한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많은 헬만드 사람들이 탈레반 통치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규모의 고통은 시민들이 상대적인 안전을 누린 카불과 같은 북적거리는 대도시에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상진 같은 시골 외딴 지역에서는 끊임없는 민간인 살해가 많은 아프간 인들을 탈레반에 끌리게 만들었다. 2010년에 이르면 이샤크자이 마을의 많은 가구들이 탈레반에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복수하기 위해 탈레반에 가담했다. 탈레반 운동은 상진 지역 생활에 90년대보다 더 깊숙이 통합되었다. 이제 샤키라와 그녀의 친구들이 탈레반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곧 자신의 친구, 이웃, 그리고 연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되었다... 미국 주도 연합군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커져가는 반란을 자유와 싸우는 극단주의자들의 문제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내가 입수한 나토 문서들은 이샤크자이 사람들이 “대드 모하메드 칸이나 아미르 다도의 손에서 억압”을 겪으며 연합군을 신뢰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팬 킬레이에서는 마을 장로들이 자기 아들들에게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도록 격려했고, 몇몇은 이전 탈레반 대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샤키라는 그녀의 남편이 마을을 지키거나 자신들을 파키스탄으로 이동시켜주거나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랐지만 남편은 거절했다. 인근 마을에서는 미군이 마을에서 존경 받는 부족 장로의 집을 급습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들을 하반신 마비 상태로 방치하자 여성들이 남정네들에게 소리쳤다. “당신들은 머리에 큰 터번만 썼지 한 게 뭐가 있나요? 당신들은 우리를 보호하지도 못해. 그러고도 남자라고 하나요?”"[85]
탈레반이 나토/군벌 체제와는 대조적으로 무소불위의 검문소와 매일의 공포통치 없이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민중 지지 기반 때문이었다. "탈레반 나라와 우리가 통과한 세계 간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총잡이들이 많이 없어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나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눈 화장한 경찰관과 방한모를 쓴 민병대원과 자동차를 검사하는 정보요원들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탈레반 하에서 검문소는 많이 줄었고, 드물게 우리가 검문소를 마주칠 때 탈레반 대원들은 띄엄띄엄 차를 조사했다."[86]
탈레반이 농촌 빈민 대중 속에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분석가들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는 부분이다. “1990년대에 아프간 탈레반은 국제 테러단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농민군이었다. 이 점은 지금도 그러하다. 상층부는 미국이나 카불 정권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경 성전주의자(지하드 파)로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87]
인도의 유명한 군사 분석가 아닐 아탈레 대령은 많은 논평가들이 카불 중간계급의 의견을 대다수 아프간 인민의 견해로 혼동하고 있다고 최근 지적했다. “아프가니스탄이 극단주의 탈레반에게 넘어갈 경우 파키스탄에서와 비슷한 ‘샤리아‘ 법에 기반한 엄격한 이슬람 지배가 들어설 것이라는 두려움이 표출되고 있다. 아프간 탈레반의 경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들의 사회적 성분이다. 탈레반의 신병 충원과 지지 기반은 대부분이 농촌 및 빈곤층에서 나온다. 탈레반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은 대부분 도시 중간계급이다.”[88]
Ⅴ
아프가니스탄 2021: 민중 게릴라 투쟁에 의한 서방 제국주의의 역사적인 패배
RCIT는 일련의 성명을 통해 최근의 아프간 사태는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 역사적인 패배를 상징한다고 거듭 지적해 왔다. 우리는 많은 기회주의 좌익 단위들이 이를 부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20년 전 무너뜨린, 그리고 그 이래로 모든 최첨단 무기와 돈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한 바로 그 세력에 의해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군대가 세계 최빈국에서 극적으로 축출된 것을 달리 어떻게 성격규정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역사적인 사건이 글로벌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직 가장 무지한 사람들만이 게릴라 반란의 그러한 승리가 다른 나라 피억압 인민의 해방투쟁에 고무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미 제국주의의 라이벌 강대국들, 특히 중국·러시아와 관련하여 미 제국주의의 지정학적 입지를 약화시킨다. 실제로 서방의 정치인들과 논평가들 중 보다 영리한 자들은 이 패배의 역사적인 차원을 십분 인식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EU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호세프 보렐 외교·안보 정책 고위 대표는 이 패배를 "아프간 국민과 서방의 가치, 신뢰성, 국제관계 발전에 재앙"이라고 묘사했다.[89]
한 유명한 미국 논평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카불 주재 미 대사관 지붕에서 헬리콥터가 탈출하는 미국인들을 잡아 끌어올렸을 때 미 국무장관 안토니 블링컨은 ”이것은 당연히 사이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미국의 세계 위상에 비할 바 없이 나쁘다. 샘 쿡 노래에 나오는 친구처럼 블링컨은 역사나 지리에 대해 잘 모른다. 노래의 남자와는 달리, 그는 1 더하기 1은 2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러시아 더하기 중국말이다. 리처드 닉슨은 남베트남이 함락되기 3년 전에 중국과 수교하여, 혁명을 그 밖의 동남아시아 나라들에 수출하는 것으로 공산주의 승리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중국의 암묵적인 동의를 확보했다.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패배는, 비록 피해가 있었지만 그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중국과 러시아를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역할로 당길 것이다. 탈레반 비정규군에 의한 미국 대리 정권의 패배는 184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 원정군이 전멸한 이후 성전주의 (지하드) 군대가 서방 군대에 맞서 거둔 첫 승리다. 이 승리는 러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중동 등지의 성전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90]
그리고 또 다른 논평가는 뉴욕타임스에 미 제국의 쇠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의 실패는,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서 로마제국이 겪은 실패 ㅡ 제국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메소포타미아 사막이나 독일 삼림 속에서 로마 장군들이 겪은 패배 같은 ㅡ 와 더 흡사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처음에 1960년대 동남아시아에서, 그 다음에는 9/11 이후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 제국 시대의 가장 분명한 패배들인 이 미국의 패배들은, 우리가 단지 제국 외곽을 확장시키는 것으로 세계 제국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그리하여 나토식 협정을 보편화하고 2차대전 전후의 일본·독일 모델을 남베트남이나 이라크나 힌투쿠시에 적용할 수 있을 거라는 거만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먼 변경 지역에서의 패배는 제국 중심부에 더 가까운 데서도 결과를 미칠 수 있다. 아메리카 제국은 탈레반에 의해 무너질 수 없다. 그러나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우리 제국 외곽에서는, 감지된 미국의 약점이 1945년 이래로 존재해 온 바의 아메리카 체제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사태발전 ㅡ 독일-러시아 앙탕트 (우호조약)에서부터 일본의 재무장, 중국의 대만 침공에 이르는 ㅡ 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사태발전은 제국 내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데, 이 내부에서는 제국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의 모든 국내 논쟁에 스며들 것이고, 가뜩이나 크게 벌려진 이데올로기적 분열을 더 벌려 놓을 것이며, 붕괴와 내전이 임박한 느낌을 부추길 것이다.”[91]
물론, 우리는 탈레반이 반제국주의 아젠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점령이 그들을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비유하자면, 피델 카스트로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도 처음에는 쿠바와 미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모색했다. 그러나 1959년 혁명 이후 워싱턴의 적대적인 행동이 그들을 반제국주의적 방향으로 밀어 넣었다.[92]
마찬가지로, 힘 관계와 객관적 과정이 이제 새 탈레반 정부를 밀어붙여 중국·러시아 제국주의와 보다 긴밀한 경제적·정치적 관계를 수립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탈레반 승리의 반제국주의적 내용은 탈레반의 강령에도, 그들의 목표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최대 제국주의 세력과 그들의 현지 대리인들을 패퇴시키고 굴욕을 안긴 그 행동에 있다. 이것은 미국의 동맹들을 두려움에 빠뜨리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든 피억압 인민을 더 자신감 있게 만드는 교훈이다! 이러한 사실들만으로도 아프가니스탄 2021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역사적인 패배고 피억압 인민들에게는 역사적인 승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론
이 팜플렛을 일련의 테제 형태로 요약 정리하여 마무리하겠다.
1. 관련국들의 서로 다른 계급적 성격을 인식하지 않고서 미국/나토와 탈레반 간 전쟁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한편으로 최강의 서방 제국주의 열강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가장 가난한 반식민지 나라 인민대중을 대표하는 게릴라 운동이 있었다.
2.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국주의 상전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인 미국/나토 점령에 대한 저항은 바로 그 본성상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3. 20년에 걸친 게릴라 투쟁 동안에 탈레반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제국주의 세력 ㅡ 중·러든 서방이든 어느 누구든 ㅡ 의 대리인이 아니었다. 탈레반은 1990년대에 미국과 접촉했지만, 이것은 적어도 2001년에는 ㅡ 그 이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ㅡ 분명히 끝이 났다. 탈레반은 러시아 제국주의의 대리인도, 중국 제국주의의 대리인도 아니었다. 탈레반 지도부가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단순한 이유로 이들 강대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긴 했지만 말이다. 탈레반이 파키스탄 비밀정보국과 접촉하고 제한된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저항 투쟁의 본질적 성격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특징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것 외에도 파키스탄 자신이 낙후된 반식민지 나라다.
4. 탈레반이 봉건세력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사실이 아닌데, 왜냐하면 아프간 농촌 ㅡ 탈레반의 대중적 지지 기반이 위치한 ㅡ 에서의 계급관계는 봉건적인 것으로 성격규정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토지소유가 존재하지만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그렇듯이), 대부분의 아프간 농민들은 자신들 소유의 작은 땅을 가지고 있고, 대토지소유자를 위한 소작인으로 일하지 않는다 (또는 제한된 정도로만 소작인으로 일할 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소농들은 가난하며, 임금노동자로 일해 (또는 시장에 농산물을 내다 팔아) 추가적인 수입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에 있다. 탈레반의 사회적 대중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반(半)프롤레타리아, 반소부르주아, 가난한 농민 계급이다.
5. 서방 언론의 프로파간다와는 달리, 아프간 인민 일반도, 특정해서 아프간 여성들도 미국의 점령으로 득을 본 것은 없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살인과 강간을 일삼고 부패로 악명 높은 군벌들을 되살려놓았다. 여기에 나토군에 의한 끝없이 이어지는 공습과 폭격이 더해졌다. 그 결과로, 2001년에서 2021년 사이에 약 25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아프간 인민과 아프간 여성들에게 이득일 수 있을까?!
6. 제국주의 점령의 반동적 성격은, 또한 여성 억압을 비롯한 사회적 억압의 구체적 측면들에서도 선연히 드러난다. 그 한 예가 지속적이고 만연한 아동 결혼의 존재다. 여성과 어린 소년들 (바차 바지)에 대한 강간의 경우, 2001년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군벌들이 다시 권력에 앉혀진 이후 대폭 증가하고 확산됐다. 탈레반의 그 반동적인 여성 정책 및 사회 정책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언제나 여성과 소년에 대한 강간을 엄격하게 반대했고 이러한 악폐들을 근절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강간과 바차 바지에 대한 탈레반의 반대는 탈레반이 민중적 기반을 갖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7. 서방 점령의 반동적인, 진보적이지 않은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생산이다. 탈레반은 이 악폐에 엄격히 반대하고 2001년까지는 거의 근절했지만, 나토/군벌 체제는 아편 생산을 그 체제의 주요 경제자원으로 삼았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아편 재배가 급격히 증가했다.
8. 탈레반은 서방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여 20년간의 무장 반란을 벌인 소부르주아 이슬람주의-민족주의 운동이다. 탈레반은 외국의 점령 없는 독립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 토후국을 수립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제국주의 점령에 대항하는, 그리고 자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탈레반의 프로파간다에서뿐만 아니라 탈레반의 민중적 표상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이끈 데서 탈레반이 담당한 역할은 인민대중 속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9 탈레반이 지난 20년 동안 수행한 반제국주의 투쟁은 그들의 전략이나 강령의 결과라기보다는 서방 열강의 침략에 의해 그들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이제 다시 권력에 오른 탈레반 지도부는 중국, 러시아와, 그리고 어쩌면 서방 강대국들과도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수립하려 할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각각의 강대국들의 정책 (및 강대국들 자신의 모순)뿐만 아니라 아프간 국내 모순의 발전에도 달려 있다. 그러나 권력을 유지한다면, 탈레반은 하나 또는 복수의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ㅡ 이런 저런 형태로 ㅡ 종속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자본주의 반식민지 나라의 꼭대기에 있는 부르주아 세력으로 움직이고 행동할 것이다.
10. 거대한 민중적 지지를 받는 승리한 게릴라 투쟁에 의한, 서방 점령군 및 그들의 현지 대리인의 축출은 서방 제국주의의 역사적인 패배와 전 세계 피억압 인민들의 역사적인 승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오랜 강대국들에게 굴욕을 안겼고 그 위세를 실추시켰다. 이것이 모든 서방 압제국가들이 전율하고 있는 이유고, 이것이 미국의 동맹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유며, 이것이 해방을 위해 싸우는 모든 피억압 인민이 더 자신감을 갖게 된 이유다! 이 사실들만으로도 혁명가들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탈레반에 정치적 지지를 주지 않고서 아프간 민족저항 운동의 무장반란을 편 든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노선과 정책의 옳음을 말이다. 아프간 사태는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패배와 글로벌 계급투쟁의 한 걸음 전진을 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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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CI는 중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강대국 부상에 관한 수많은 문서를 발표했다. 다음의 RCIT 웹사이트 별도 하위 페이지에 이 문서들을 볼 수 있다.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china-russia-as-imperialist-powers/. 중국에 관해서는 특히 다음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Anti-Imperialism in the Age of Great Power Rivalry. 같은 저자의 다음 책에 실린 글도 보라. the second edition of The Palgrave Encyclopedia of Imperialism and Anti-Imperialism (edited by Immanuel Ness and Zak Cope), Palgrave Macmillan, Cham, 2020, https://link.springer.com/referenceworkentry/10.1007%2F978-3-319-91206-6_179-1; China‘s transformation into an imperialist power. A study of the economic, political and military aspects of China as a Great Power (2012),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4, http://www.thecommunists.net/publications/revcom-number-4; How is it possible that some Marxists still Doubt that China has Become Capitalist? (A Critique of the PTS/FT), An analysis of the capitalist character of China’s State-Owned Enterprises and its political consequences, 18 September 2020,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pts-ft-and-chinese-imperialism-2/; Unable to See the Wood for the Trees (PTS/FT and China). Eclectic empiricism and the failure of the PTS/FT to recognize the imperialist character of China, 13 August 2020,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pts-ft-and-chinese-imperialism/. 그 외 많은 문서들이 다음의 RCIT 웹사이트 별도 하위 페이지에 있다.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china-russia-as-imperialist-powers/.
러시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The Peculiar Features of Russian Imperialism. A Study of Russia’s Monopolies, Capital Export and Super-Exploitation in the Light of Marxist Theory, 10 August 2021,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the-peculiar-features-of-russian-imperialism/; Russia and China: Neither Capitalist nor Great Powers? A Reply to the PO/CRFI and their Revisionist Whitewashing of Chinese and Russian imperialism, 28 November 2018,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russia-and-china-neither-capitalist-nor-great-powers-reply-to-po-crfi/; 다음도 보라. 같은 저자: The Catastrophic Failure of the Theory of “Catastrophism”. On the Marxist Theory of Capitalist Breakdown and its Misinterpretation by the Partido Obrero (Argentina) and its “Coordinating Committee for the Refoundation of the Fourth International”, 27 May 2018,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the-catastrophic-failure-of-the-theory-of-catastrophism/; Lenin’s Theory of Imperialism and the Rise of Russia as a Great Power. On the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of Today’s Inter-Imperialist Rivalry in the Light of Lenin’s Theory of Imperialism. Another Reply to Our Critics Who Deny Russia’s Imperialist Character, August 2014, http://www.thecommunists.net/theory/imperialism-theory-and-russia/; Russia as a Great Imperialist Power. The formation of Russian Monopoly Capital and its Empire – A Reply to our Critics, 18 March 2014, in: Revolutionary Communism No. 21, http://www.thecommunists.net/theory/imperialist-russia/. 이 문제에 관한 여러 다른 RCIT 문서들이 다음의 RCIT 웹사이트 상의 별도 하위 페이지에 있다.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china-russia-as-imperialist-powers/
[2]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en King, Jeremy Singer-Vine: The Afghan War, By The Numbers. What 20 years of fighting in Afghanistan cost — in dollars and in lives, August 17, 2021, https://www.buzzfeednews.com/article/benking/the-afghan-war-by-the-numbers
[3] LRCI: Stop the Invasion of Afghanistan! 30/09/2001,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afghanistan-invasion-2001/#anker_1. See also the compilation of our articles on the US/NATO Attack on Afghanistan 2001,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afghanistan-invasion-2001/
[4] LRCI: Questions & Answers on the Afghan War, 30/09/2001,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afghanistan-invasion-2001/#anker_2
[5] 아프간에서 제국주의의 패배에 관한 RCIT 문서들이 다음의 우리 웹사이트 별도 하위 페이지에 있다.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sia/collection-of-articles-on-us-defeat-in-afghanistan/. 특히 다음의 두 주요 성명을 보라. Afghanistan: The Rats Are Fleeing! The fall of Kabul is a historic defeat for Western imperialism and a victory for the oppressed peoples! 17 August 2021,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sia/afghanistan-the-rats-are-fleeing/ [<아프가니스탄: 쥐떼들이 탈출하고 있다!>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sia/afghanistan-the-rats-are-fleeing/#anker_2]; Afghanistan: The Meaning of the Anti-Imperialist Victory and the Perspectives Ahead. Questions and Answers from a Marxist Point of View, 24 August 2021,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sia/afghanistan-meaning-of-anti-imperialist-victory-and-perspectives-ahead/ [<탈레반 승리: 의미와 전망>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sia/afghanistan-meaning-of-anti-imperialist-victory-and-perspectives-ahead/#anker_2]
[6] V. I. Lenin: The Socialist Revolution and 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1916); in: LCW 22, p. 147
[7] V. I. Lenin: The Revolutionary Proletariat and 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1915); in: LCW 21, p. 409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족자결권>, 레닌 전집 60권 <<사회주의와 전쟁>>, 양효식 옮김, 아고라, 244쪽]
[8] 다음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The Great Robbery of the South. Continuity and Changes in the Super-Exploitation of the Semi-Colonial World by Monopoly Capital. Consequences for the Marxist Theory of Imperialism, RCIT Books, Vienna 2013,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greatrobbery-of-the-south/; 위에서 언급한 다음 책도 보라. Michael Pröbsting: Anti-Imperialism in the Age of Great Power Rivalry.
[9] 다음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Semi-Colonial Intermediate Powers and the Theory of Sub-Imperialism. A contribution to an ongoing debate amongst Marxists and a proposal to tackle a theoretical problem, 1 August 2019,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semi-colonial-intermediate-powers-and-the-theory-of-sub-imperialism/ [<반식민지 중위권 열강과 아(亞)제국주의론> https://www.thecommunists.net/home/%ED%95%9C%EA%B5%AD%EC%96%B4/semi-colonial-intermediate-powers-and-theory-of-sub-imperialism/]; 같은 저자: The China-India Conflict: Its Causes and Consequences. What are the background and the nature of the tensions between China and India in the Sikkim border region? What should be the tactical conclusions for Socialists and Activists of the Liberation Movements? 18 August 2017,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china-india-rivalry/; RCIT: Turkey and the Growing Tensions in Eastern Mediterranean. Theses on the complex contradictions between imperialist and regional powers, the Arab Revolution and the consequential tactics of Marxists, 28 August 2020,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frica-and-middle-east/turkey-and-the-growing-tensions-in-eastern-mediterranean/.
[10] Wat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and Public Affairs, Brown University, August 2021, https://watson.brown.edu/costsofwar/figures/2021/human-and-budgetary-costs-date-us-war-afghanistan-2001-2022
[11]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CIT: The 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is a Project of Chinese Imperialism for the Colonialization of Pakistan! 22.1.2017, https://www.thecommunists.net/worldwide/asia/pakistan-cpec/
[12] 다음을 보라. Edward W. Said: Orientalism, Vintage Books, New York 1979
[13]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in the Early Post-Taliban Era, in: African and Asian Studies 6 (2007), p. 48, DOI: 10.1163/156921007X180578
[14]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A Report on the Winter Agricultural Survey 2002-2003, Kabul, August 2003,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15]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7
[16]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p. 26-28
[17]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28
[18] Lowder, S.K., Sánchez, M.V. & Bertini, R. 2019. Farms, family farms, farmland distribution and farm labour: What do we know today? FAO Agricultural Development Economics Working Paper 19-08. Rome, FAO, p. 50
[19] Tariq Farooq: Small farmers, peasants, landless workers and agriculture in Pakistan, 9 March 2019,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48071
[20]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3
[21]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p. 29-30
[22]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 103
[23]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3
[24]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 26
[25]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5
[26]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3
[27]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p. 22-23
[28]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7
[29]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 99
[30]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6
[31]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 100
[32]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 3
[33] Hector Maletta and Raphy Favre: Agriculture and Food Production in Post-War Afghanistan, p. 102
[34] Hector Maletta: Arable Land Tenure in Afghanistan, p. 43
[35]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는 것에 양해를 구한다. 필자는 지난 40년 동안 정치 활동을 하면서 30개국 가까이 방문했는데, 그 중에는 모든 대륙의 많은 반식민지 나라들이 있다. 필자는 반식민지 나라에서 많은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ㅡ 보통 수도에 살고 있는 ㅡ "후진적인 농촌 사람들"에 대한 강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부유한 제국주의적인 나라들로부터 오는 많은 오리엔탈리즘적 편견들을 흡수했다.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필자는 남아시아 지역의 지식인들과 몇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카불의 중간계급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1978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에 오른 이후의 스탈린주의 인민민주당의 악명 높은 역사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심지어 무슬림 남성들에게 수염을 자르도록 강요하려 했다! 카불의 소규모 중간계급의 상당 부분이 제국주의 점령자들의 협력자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6] UNDP: Human Development Report 2020. The next frontier. Human development and the Anthropocene, p. 364
[37] UNDP: Human Development Report 2009. Overcoming barriers: Human mobility and development, p. 184
[38] UNDP: Human Development Report 2020, p. 363; see also Table 5: Gender Inequality Index, 2021, http://hdr.undp.org/en/content/gender-inequality-index-gii
[39] Lida Ahmad and Priscyll Anctil Avoine: Misogyny in ‘post-war’ Afghanistan: the changing frames of sexual and gender-based violence, Journal of Gender Studies, 2016, p. 2, DOI: 10.1080/09589236.2016.1210002
[40] Lida Ahmad and Priscyll Anctil Avoine: Misogyny in ‘post-war’ Afghanistan, p. 8
[41] Shaista Wahab and and Barry Youngerman: A Brief History of Afghanistan, Second Edition, Facts On File, An imprint of Infobase Publishing, New York 2010, p. 208
[42] 같은 글, pp. 248-249
[43] Lida Ahmad and Priscyll Anctil Avoine: Misogyny in ‘post-war’ Afghanistan, p. 3
[44] Anand Gopal: The Other Afghan Women. In the countryside, the endless killing of civilians turned women against the occupiers who claimed to be helping them, 6 September 202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1/09/13/the-other-afghan-women
[45] Shaista Wahab and and Barry Youngerman: A Brief History of Afghanistan, p. 261
[46] Lida Ahmad and Priscyll Anctil Avoine: Misogyny in ‘post-war’ Afghanistan, p. 10
[47] Anand Gopal: The Other Afghan Women
[48] Yoshinobu Nagamine: The Legitimization Strategy of the Taliban’s Code of Conduct Through the One-Way Mirror, Palgrave Macmillan, New York 2015, p. 15
[49] 수치는 다음 출판물에서 따온 것이다. World Drug Report 2021 (United Nations publication, Sales No. E.21.XI.8), p. 69; 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World Drug Report 2014 (United Nations publication, Sales No. E.14.XI.7), Annex I, p. vii; 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 World Drug Report 2004, Volume 2: Statistics, p. 205.
[50] Shaista Wahab and and Barry Youngerman: A Brief History of Afghanistan, p. 264
[51] WHO: Opioid overdose, 4 August 2021, https://www.who.int/news-room/fact-sheets/detail/opioid-overdose
[52] Lida Ahmad and Priscyll Anctil Avoine: Misogyny in ‘post-war’ Afghanistan, p. 8
[53] Statement of the Islamic Emirate on the Fifteenth Anniversary of the American Invasion, Al-Emera (website), 6 October 2016, in: Alex Strick Van Linschoten and Felix Kuehn (Editors): The Taliban Reader. War, Islam and Politics,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8 (Text No. 122)
[54] Zamir Saar and Paula Bronstein: Taliban Move to Ban Opium Production in Afghanistan, The Wall Street Journal, 28 August 2021, https://www.wsj.com/articles/taliban-afghanistan-heroin-ban-opium-production-11630181316
[55] UNICEF: Early Marriage. Child Spouses, Innocenti Digest, No . 7 (March 2001), p. 4
[56] Girls Not Brides: https://atlas.girlsnotbrides.org/map/
[57] 같은 글, p. 6
[58] UNICEF: Child Marriage in Afghanistan. Changing the narrative, 2018, pp. 70-71
[59]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Gilles Dorronsoro: The Taliban’s Winning Strategy in Afghanistan,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2009, p. 12
[60] UNICEF: Child Marriage in Afghanistan, p. 56 and p. 58
[61] UNICEF: Child Marriage in Afghanistan, p. 56 and p. 21
[62] 이 참담한 현상의 의미에 주목하게 해준 볼리비아의 마리아노 동지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63] Kyle Rempfer: DoD IG: US troops were told to ignore child sex abuse by Afghan forces, 17 November 2017, https://www.militarytimes.com/news/your-army/2017/11/17/dod-ig-us-troops-were-told-to-ignore-child-sex-abuse-by-afghan-forces/
[64] Emma Graham-Harrison: US military fails to tackle sexual abuse of children by Afghan allies, report finds, The Guardian, 24 January 2018,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8/jan/24/us-military-sexual-abuse-children-afghanistan-allies
[65] Kyle Rempfer: DoD IG: US troops were told to ignore child sex abuse by Afghan forces
[66] Rod Nordland: Afghan Pedophiles Get Free Pass from U.S. Military, Report Says, New York Times, 23 January 2018, https://www.nytimes.com/2018/01/23/world/asia/afghanistan-militaryabuse.html [https://perma.cc/29S5-ZQG3].
[67] Rod Nordland: Afghan Pedophiles Get Free Pass from U.S. Military
[68] Rod Nordland: Afghan Pedophiles Get Free Pass from U.S. Military
[69] 다음에서 인용. 'We heard them screaming': US troops told to ignore Afghan soldiers abusing boys – report, 21 September 2015, https://www.rt.com/news/316062-afghan-soldiers-abuse-children/
[70] Shaista Wahab and and Barry Youngerman: A Brief History of Afghanistan, p. 212; 다음도 보라. Steve Coll: Ghost Wars: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Penguin Books, New York 2004, pp. 282–83 and p. 292.
[71] Annie Barry Bruton: Bacha Bazi and Human Rights Violations in Afghanistan: Should the U.S. Military Have Done More to Protect Underage Boys? In: Kentucky Law Journal, Volume 108 Issue 1 (2019), p. 181, https://uknowledge.uky.edu/klj/vol108/iss1/6
[72] How The U.S. Military Ignored Child Sexual Abuse In Afghanistan For Years, 24 January 2018, https://www.npr.org/2018/01/24/580433652/how-the-u-s-military-ignored-child-sexual-abuse-in-afghanistan-for-years?t=1630725447188
[73] Michael Pröbsting and Simon Hardy: Theses on Islamism, adopted by a congress of the League for the Fifth International in January 2011,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theses-on-islamism/
[74] Michael Pröbsting: Is the Syrian Revolution at its End? Is Third Camp Abstentionism Justified? 5 April 2017,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syrian-revolution-not-dead/
[75] Gilles Dorronsoro: Taliban's Winning Strategy in Afghanistan,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2009, p. 9
[76] Andreas Wilde and Katja Mielke: Order, stability, and change in Afghanistan: from top-down to bottom-up state-making, Central Asian Survey, 32:3 (2013), pp. 359-360, DOI: 10.1080/02634937.2013.843309
[77] Richard Tapper: Tribe and state in Iran and Afghanistan: an Update, in: Études rurales 184 (Juillet - Décembre 2009), p. 43, DOI: 10.4000/etudesrurales.10461
[78] Al-Emera (website): Response of the Islamic Emirate to the Victory of the Popular Uprising in Egypt, 14 February 2011, in: Alex Strick Van Linschoten and Felix Kuehn (Editors): The Taliban Reader, Text No. 82
[79] Khalil Aziz: A Number Of Important Factors For Jihad, 16 November 2014, in: Alex Strick Van Linschoten and Felix Kuehn (Editors): The Taliban Reader, Text No. 102
[80] Al-Emera (website): The Afghan People Wants Peace, Their Enemy War, 20 November 2014, in: Alex Strick Van Linschoten and Felix Kuehn (Editors): The Taliban Reader, Text No. 115
[81] Al-Emera (website): 9/11. An Incident and a Pretext, 19 September 2016, in: Alex Strick Van Linschoten and Felix Kuehn (Editors): The Taliban Reader, Text No. 120
[82] Yoshinobu Nagamine: The Legitimization Strategy of the Taliban’s Code of Conduct Through the One-Way Mirror, p. 25
[83] 같은 글, p. 24
[84] Antonio Giustozzi: The Taliban at War 2001–2018, C. Hurst & Co., London 2019, pp. 1-2
[85] Anand Gopal: The Other Afghan Women
[86] 같은 글
[87] Ahmed Rashid: Taliban. The Power of Militant Islam in Afghanistan and Beyond, New Edition, I.B.Tauris & Co, London 2010, p. 236
[88] Col Anil Athale: Is Afghanistan the First Domino?, 25 August 2021, Indian Defence Review, http://www.indiandefencereview.com/news/is-afghanistan-the-first-domino/
[89] Helene Cooper, Lara Jakes, Michael D. Shear and Michael Crowley: In Afghan Withdrawal, a Biden Doctrine Surfaces, New York Times, Sept. 4, 2021, https://www.nytimes.com/2021/09/04/us/politics/biden-doctrine-afghanistan-foreign-policy.html
[90] Spengler: Afghan debacle cedes Eurasia to the dragon and bear, 6 September 2021, https://asiatimes.com/2021/09/afghan-debacle-cedes-eurasia-to-the-dragon-and-bear/
[91] Ross Douthat: The American Empire in Retreat, New York Times, Sept. 4, 2021, https://www.nytimes.com/2021/09/04/opinion/afghanistan-withdrawal-america.html
[92] 쿠바 혁명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책의 1장을 보라. Michael Pröbsting: Cuba‘s Revolution Sold Out? The Road from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Capitalism, August 2013, RCIT Books, https://www.thecommunists.net/theory/cuba-s-revolution-sol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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