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생산력인가?

무엇이 생산력인가
?


기술 발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미 AI 전부터 자본주의 기술 발전을 내세워,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 계속되고 있는데 무슨 생산력 정체 경향을 운운하냐고 빈정댄다. 그들은 이것이 맑스주의에 대한 결정적 논박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여기에 개량주의자들도 가세하여 맑스주의가 틀렸음을 말해주는 오늘날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단순하지만 중대한 몰이해 또는 왜곡된 인식이 깔려 있다. 부르주아 경제이론은 생산력 개념 자체를 재화의 생산 또는 고정자본의 축적과 등치시킨다. 그리하여 GDP2% 증가, 또는 자본재가 1.5% 증가할 때 이들 부르주아 경제이론가는 이렇게 꾸준히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디에 생산력 정체 경향이 있다는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맑스주의 이론에서 생산력은 노동과 생산자료 (물질적 생산수단과 생산 결과물)를 포함한다. 생산력은 생산수단 (기계, 원료 등)과 노동자 (생산수단을 운용하고 사회적 분업 속으로 들어가는 노동자) 둘 다다.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상호의존적이며, 자본가의 견지에서 볼 때 생산수단에 노동자를 투입하는 목적이 잉여가치를 담고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생산력은 단순히 물질적 대상들의 집합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들의 생활조건과 자연 노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이 또한 생산력에 포함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생산력을 자본주의 하에서 그것이 취하는 특수한 형태들 (기계설비와 건물, 기술, 그리고 GDP 수치로 그 증가량이 표현되는 생산물)과 등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인간 노동과 자연이 생산력의 핵심 구성부분이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 즉 인간 집단들 (계급들) 간의 관계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은 단지 생활수단과 노동도구와 원료로만, 즉 물질적 생산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로도 이루어진다. 자본을 이루는 모든 생산물은 상품이다. 따라서 자본은 일정량의 물질적 생산물일 뿐만 아니라, 일정량의 상품, 일정량의 교환가치, 일정량의 사회적 크기이기도 하다.” (임금노동과 자본)
 
달리 말하면, 자본과 상품은 교환가치의 관계로서 이것은 사용가치의 형태로 자신을 나타낸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 간의, 현상과 본질 간의 변증법적 관계다. 엥겔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경제학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계급들 간의 관계를 취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언제나 사물과 결부되어 있고 사물로 나타난다.“ (경제학 비판)
 
 엥겔스는 또 모순적 통일로서의 생산력 개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편으로 기계를 보다 완벽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기계가 노동자를 대신하는 정도가 끊임없이 증대되는 것 산업예비군의 확대 과 짝을 이룬다.), 다른 한편으로 무제한으로 생산을 확대시키는 것, 이 두 측면에서 전례 없는 생산력 발전, 수요에 대한 공급의 과잉, 여기서는 생산수단 및 생산물의 과잉생산, 저기서는 노동자 (고용 없는, 그리고 생존수단 없는)의 과잉. 그러나 이들 생산과 사회적 복리라는 두 지렛대는 함께 작동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가 생산력이 사용되는 것을, 생산물이 유통되는 것을 가로막기 (생산력과 생산물이 먼저 자본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때문이다. 그것들의 과다함 자체가 그것들의 사용과 유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모순이 성장해 터무니없는 부조리가 되었다. 생산양식이 교환형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부르주아지는 그 자신의 사회적 생산력을 더 한층 발전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맑스도 생산력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차지하는 중심 지위를 강조했다.
 
  “모든 생산도구 가운데 최대의 생산력은 혁명적 계급 자신이다. 혁명적 요소들이 계급으로 조직되는 것은 구 사회 내에서 생성될 수 있는 모든 생산력이 전면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철학의 빈곤성)

  생산제력(生産諸力)의 파괴제력으로의 전화
 
생산력 문제에 관해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 즉 생산력 (생산제력)이 파괴제력 으로 전환하는 문제로 들어가 보자. 맑스는 어떻게 생산력이 사적소유 체제 아래서는 일면적인 발전만을 이루게 되어 그 많은 부분이 파괴력으로 되어버리는지, 더욱이 그 생산력의 거대한 부분이 이 체제 내에서는 도무지 사용될 용처를 발견할 수 없게 되는지” (독일 이데올로기)를 설명했다.
 
  “사적소유의 지배 하에서 생산력이 파괴력으로 되어버린 지점까지 생산력과 교류형태가 발전했기 때문에, 그리고 계급 간의 모순이 그 극한에 도달했기 때문에 현 시대에 사적소유는 폐지해야 함을 우리는 보여준 바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생산력의 완전한, 자유로운 발전에 질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산력 발전 자체가 과정에서 점점 더 파괴력을 끌어들이는 지점으로까지 이미 생산력은 발전했다. 물론 이전에도 파괴력은 존재했지만, 그러나 이 파괴력이 전 세계를 포괄하는 성격을 띠게 된 것은 <제국주의시대>에 와서다. 파괴력으로 전화된 생산력은 여기 제국주의시대에서 인류 전체를 수십, 수백 세대 이전으로 후퇴시켜 놓을, 혹은 심지어 인류를 완전히 파괴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이윤체제가 몰아가는 환경파괴로 인해 인류에게 닥친 극적 위험 (지구 온난화, 삼림사막화, 자연자원의 고갈), 그리고 수억 수천만의 죽음을 가져 올 핵무기 위험은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력 발전이 어떻게 파괴력의 발전을 동반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여기에는 착취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도 포함된다. 이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각종 노동과정들을 하나의 사회적 전체로 통합시켜내는 것 [노동의 사회화, 생산의 사회화]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의 원천, 즉 토지와 노동자로부터 그 생명력을 쥐어짜내 고갈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모순적 과정이다.” (자본론 I권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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