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경제주의"에 관해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서로 딴소리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제가 제시한 정의를 회피하고, 그냥 넘어 가고, 다시 질문을 던지시네요.
"경제주의자들"은 (당신이 쓴 대로) 정치투쟁을 "방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정확합니다. 경제주의자들은 정치투쟁을 그릇되게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민주주의 요구를 완전히 배격하는 것도 정치투쟁을 배격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권력 쟁취를 위한 직접 투쟁은 정치투쟁이 아닙니까?"
문제는 부하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라데크도 마찬가지)의 경우, 이런 식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민주주의 요구를 완전히 배격"하면서 “권력 쟁취를 위한 직접 투쟁”을 한다는 것은 불명확하고, 생각 없는,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하린이 혼란스런 부분입니다....
사회주의혁명은 민주주의 투쟁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이며, 이것이 바로 라데크와 부하린의 약점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 특정 시기에 모든 민주주의적 목표 (자결권뿐만 아니라! 명심하세요! 잊으셨죠!)는 사회주의혁명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어떤 순간에? 언제? 어떻게? 예를 들어, 운동이 이미 발전했고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 우리가 은행을 장악해야 한다면.....
유니우스 [로자 룩셈부르크]에 반대하여:
정세는 제국주의전쟁입니다. 해결책은? 독일 사회주의혁명뿐입니다. 유니우스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사회주의혁명 없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 어떻게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켜야 하는지 [어떻게 민주주의 투쟁을 사회주의혁명 투쟁에 부차화(副次化)시켜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어려움이 있으며, 바로 여기에 모든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폐기합니다. 부하린과 라데크는 전자를 후자에 결합하는 데 실패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主 (사회주의혁명)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으십시오. (유니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민주주의 요구들을 제시하되, 그것들을 사회주의혁명에 종속시키고, 그것과 통합조정 [조율]하십시오 (라데크와 부하린은 어리석게도 그 중 하나를 배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主를 위한 투쟁은 비록 부분적인 것을 위한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불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제 생각에는 오직 이 관점만이 옳은 관점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투쟁을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지, 어떻게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켜야 하는지 [어떻게 민주주의 투쟁을 사회주의혁명 투쟁에 부차화(副次化)시켜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어려움이 있으며, 바로 여기에 모든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와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폐기합니다. 부하린과 라데크는 전자를 후자에 결합하는 데 실패해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主 (사회주의혁명)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으십시오. (유니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민주주의 요구들을 제시하되, 그것들을 사회주의혁명에 종속시키고, 그것과 통합조정 [조율]하십시오 (라데크와 부하린은 어리석게도 그 중 하나를 배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主를 위한 투쟁은 비록 부분적인 것을 위한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불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제 생각에는 오직 이 관점만이 옳은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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