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레닌, 1916년 12월
스위스의 좌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현 전쟁에서 조국방위 원칙을 거부한다는 입장으로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프롤레타리아트도 — 어쨌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우수한 분자들은 — 마찬가지로 조국 방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이와 같이, 현대 사회주의 일반의, 특정해서는 스위스 사회주의 당의 이 가장 초미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필요한 통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그것은 단지 외견상의 통일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실제로, 조국 방위에 대한 거부 입장을 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혁명적 의식에 대해, 또 그와 같은 입장을 표명한 당의 혁명적 행동능력에 대해서도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라는 점 一 물론 그러한 입장 표명이 공문구로 전락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 에 대해 의견의 통일은 고사하고 명확한 인식조차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조국 방위 거부 입장을 표하는 것이 어떠한 요구를 수반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즉 모든 선전 · 선동 · 조직, 한 마디로 당 활동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경하고 ‘일신’(칼 리프크네히트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면)해서 보다 고도한 혁명적 임무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함이 없이 그저 조국 방위 거부를 선언만 하고 만다면 그러한 선언은 실제로 공문구가 되어버린다.
조국방위의 거부라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실제로 실현해야 할 중대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취급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모든 교전국과 전쟁 위협에 놓여 있는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와 피착취자에게 조국방위를 거부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전쟁 중인 몇몇 나라의 경험으로부터, 현 전쟁에서 조국 방위를 거부하는 것이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이제 명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기초를 부정하는 것, 단지 이론상으로만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현대 사회체제를 그 뿌리로부터 파괴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이것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즉, 자본주의는 이미 사회주의로 전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는 확고한 이론적 확신을 넘어서 그러한 전화, 즉 사회주의혁명을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 • 즉각적으로 수행할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러한 부정과 파괴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조국 방위 거부에 대한 논의에서 이것은 거의 항상 묻혀버린다. 기껏해야,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전화할 만큼 성숙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고작이다. 직접적으로 임박해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정신으로 당 활동의 모든 측면을 즉각 근본적으로 바꿔내는 것, 이것이 회피되고 있는 것이다!
인민은 그러한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턱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어느 쪽인가. 우리는 조국 방위를 즉각 거부한다고 선언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선언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직접적인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체계적인 선전을 즉각 전개해야(또는 전개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쪽인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인민’은 조국 방위를 거부하는 것도, 사회주의 혁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느 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민을 체계적으로 준비시키는 데 착수하는 것을 2년 一 2년이다! — 이나 연기하고 지체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조국 방위와 국내 평화[계급 휴전] 정책에 무엇이 대치(對置)되고 있는가? 전쟁에 대한 혁명적 투쟁이다. 즉, 1915년의 아라우(Aarau) 당 대회의 결의에서 승인된 바, ‘혁명적 대중행동’이 그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훌륭한 결의이지만, 그러나 ... 이 대회 이래 당의 기록은, 당의 현실 정책은 그것이 서류상의 결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혁명적 대중투쟁의 목표는 무엇인가? 당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도 없고, 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도 되고 있지 않다. ‘사회주의’가 목표라는 것을 당연시하거나, 아니면 솔직하게 승인하거나, 둘 중 하나면 된다. 그냥, 자본주의(또는 제국주의)에 사회주의가 대치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비논리적(이론적으로는)이며, 일체의 실천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비논리적이라 함은 너무 일반적이며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목표로서의 ‘사회주의’ 일반, 자본주의(또는 제국주의)의 대립물로서의 사회주의 일반이라면 이제는 카우츠키 일파와 사회배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부르주아 사회정책가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두 사회제도의 비교가 아니라, 구체적인 해악에 반대하는, 즉 현 물가폭등이나 현 전쟁위험, 또는 현 전쟁에 반대하는 구체적인 ‘혁명적 대중투쟁’의 구체적인 목표를 정식화하는 것이다.
1889년부터 1914년까지의 전 기간을 통하여 제2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에 사회주의 일반을 대치시켰는데, 바로 이 너무 일반적인 ‘일반화’가 그것을 파산에 이르게 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기 시대 특유의 해악을 무시했는데, 이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거의 30년 전인 1887년 1월 10일에 다음과 같은 말로 특징지었다.
“...어떤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는 다름 아닌 사회민주당 속에서, 심지어는 사회민주당 의원단 속에서도 자신의 대변자를 발견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현대 사회주의의 기본 견해와 모든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화 요구는 정당한 것으로 승인되는 반면에, 이의 실현은 오직 먼 미래,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시야에서 젖혀져버린 미래에나 가능하다고 선언된다. 그리하여 현재로선 한낱 사회적 짜깁기 식 개량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주택 문제>> 서문) ‘혁명적 대중투쟁’의 구체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주의 혁명의 구체적인 방책뿐이며 ‘사회주의’ 일반은 아니다. 네덜란드 동지들은 자신들의 강령(<<국제사회주의자위원회 회보>> 3호, 베른, 1916년 2월 29일)에서 이 구체적 방책들을 정확히 규정한 바 있다. 국가채무 무효화, 은행 및 대기업 몰수. 이러한 철저히 구체적인 방책들을 당의 공식적인 결의 속에 채택하여, 집회에서의 일상적 당 선전에서, 의회 연설에서, 입법 제안에서 가장 대중적인 형식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하자고 제의했을 때 우리가 받은 답변은, 인민은 아직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등등의 똑같은 대답, 질질 끌고 둘러대며 철두철미 궤변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인민을 준비시키는 일에 지금 바로 착수하는 것, 그리고 이 일을 확고히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당은 혁명적 대중투쟁을 ‘승인’했다. 훌륭하다 그러나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당에 있는가? 당은 그것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가? 당은 이러한 문제들을 연구하고,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에 맞는 기구와 조직을 설치하고 있는가? 인민 속에서, 그리고 인민과 함께 이 문제를 토론하고 있는가?
그러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당은 낡은 궤도, 즉 철저히 의회주의적인, 철저히 노동조합주의적인, 철저히 개량주의적인, 철저히 합법주의적인 궤도에 완강히 매달리고 있다. 분명하게도 당에는 여전히 혁명적 대중투쟁을 촉진하고 이끌 능력이 없다. 명백하게도 당은 이러한 것에 대한 그 어떤 준비도 하고 있지 않다. 과거의 관행이 지배하고 있고, ‘새로운’ 말(조국 방위 거부, 혁명적 대중행동)은 그냥 말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좌파는 그것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좌파는 이 해악과 싸우기 위해 당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들의 힘을 체계적으로 끈기 있게 결집하려 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전쟁 문제에 관한 R. 그림의 테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구(마지막 문구)를 읽을 때 우리는 어깨를 움츠릴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당의 기관들은 이 상황에서는 (즉 전쟁의 위험이 있는 경우, 대규모 철도 파업을 호소하는 것 등) 노동조합 조직들과 함께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테제는 여름에 발표된 것인데, 편집국원 슈네베르거와 뒤르의 연명으로 발행된 <<스위스 금속노동자 신문>> 9월 16일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나는 하마터면, 그림의 테제 또는 그의 경건한 소망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식 회답이라고 말할 뻔 했다)가 실렸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문구는 지금과 같은 때에 아주 천박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 전 유럽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가 2년 동안 조국의 ‘적들’에 대항하는 전장에서 부르주아지와 어깨를 걸고 싸우고 있고,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난과 고통이 있더라도 ‘견뎌내’고자 애쓰고 있다. 이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외국의 공격을 받는다면 우리 스위스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에서는 “노동조합 조직들과 함께” 혁명적 대중파업을 호소할 것을 당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당내 및 노동조합 내부의 그뤼틀리(Grütli)적인, 즉 사회애국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이고 철저하게 합법주의적인 경향 및 그 지지자들에 대항해서 어떠한 투쟁도 수행하지 않을 때, 이것이 ‘카우츠키주의적’ 정책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무력한 공문구와 좌익적 호언장담과 기회주의적 실천의 정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슈네베르거, 뒤르, 플뤼거, 그로일리히, 후버 같은 ‘지도적’인 동지들 및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R. 그림(Grimm)이 그토록 ‘용감하게’ 폭로하고 질타한 — 단, 이것은 스위스 인이 아니라 (독일에서) 독일인의 일이 문제가 되고 있을 때의 폭로와 질타이지만 — 정책과 똑같은 사회애국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똑같은 사회애국주의적인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매일 대중에게 말하고 증명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대중을 ‘교육’시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부패, 타락시키고 있는 것인가?
외국인의 일은 욕하고 꾸짖지만, ‘자국’의 ‘동포’는 감싸주는 것.... 이것은 ‘국제주의적’인가? 이것은 ‘민주주의적’인가?
다음은 스위스 노동자들의 처지와 스위스 사회주의의 위기, 그리고 사회주의 당 내의 그뤼틀리적 정책의 본질을 그로일리히가 묘사하는 방식이다.
“...생활수준은 미미하게, 그것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층부 [잘 들어! 잘 들으라고!] 사이에서만 상승했다. 노동자 대중은 계속 곤궁 속에서 살고 있고, 불안과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올바른가 하는 의문이 문득 문득 생긴다. 비판자들은 새로운 길을 찾고 있으며, 보다 단호한 행동에 특별히 희망을 걸고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노력들을 쏟고 있지만, 대개(?)는 실패하고(??), 그래서 과거의 전술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커진다[여기서도 소망이 사상의 아버지가 되고 있는 경우인가?]. .... 그리고 이제는 세계 대전이다.... 생활수준의 극심한 하락은, 과거에는 아직 참을 만한 상태에 있었던 계층까지 철저하게 궁핍화하여 혁명적 정서가 퍼져나가고 있다.[잘 들어! 잘 들으라고!] 사실, 당 지도부는 자기 앞에 놓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해 왔고, 조급한 분자들(??)의 영향력에 너무 자주 끌려 다닌다(??).... 그뤼틀리 동맹 중앙위원회는 ‘실제적 민족 정책’ 수행이 맡겨져 있는데, 그것을 당 밖에서 실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 그뤼틀리 동맹 중앙위원회는 그것을 당내에서 추진하지 않는 것인가?[잘 들어! 잘 들으라고!] 왜 초급진파와의 투쟁을 거의 항상 나에게만 맡기는 것인가?”(<괴팅엔 그뤼틀리 동맹에게 보내는 공개장>, 1916년 9월 26일) 그로일리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몇몇 “음험한 외국인”이 (당내의 그뤼틀리 파가 은밀히 생각하고 있고 출판물에 슬쩍 내비치는 동안, 당 밖의 그뤼틀리 파는 그토록 공공연하게 떠들어대고 있듯이) 개인적으로 참을 수 없었던 나머지, 자신들이 “외국의 안경”을 통해 바라보고 있던 노동운동 속으로 혁명적 정신을 주입하려고 시도한,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니다. 아니, 노동자들의 상층부만이 현재 다소 상태가 개선된 반면 대중은 궁핍의 수렁 속에 빠져 있다고, 그리고 가증스런 외국인 “교사자” 때문이 아니라 “생활수준의 극심한 하락” 때문에 “혁명적 정서가 퍼져 나가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 아닌 헤르만 그로일리히 — 그의 정치적 역할은 작은 민주공화국의 부르주아 노동부장관의 역할에 다름 아니다 — 자신이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무조건 옳을 것이다.
스위스 인민은 한 주 한 주 갈수록 결핍과 부족으로 고통 받으며, 제국주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갈 위험, 즉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살육당할 위험을 나날이 직면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국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우수한 부분의 충고를 따라 그들의 모든 힘을 결집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든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공상이다! ‘실제로는 언제인지 보이지도 않는 먼 장래’에나 가능한 일이다!...
사회주의혁명은, 현 전쟁에서 조국방위의 거부나, 현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적 대중투쟁이 공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공상이 아니다. 자기 말에 귀가 멍멍해져서도, 남의 말에 놀라서도 안 된다. 거의 모두가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적 투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혁명에 의해 전쟁을 종식시키는 임무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눈앞에 그려보아야만 한다! 아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다.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성숙하고 있고, 이제 문제는 평온 속에서, 견딜만한 상태 속에서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어떤 무모한 모험에 뛰어들 것인가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문제는, 계속 궁핍으로 고통 받으며, 영문도 모르고 남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살육제 속으로 던져질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를 위해, 인류의 10분의 9의 이익을 위해 위대한 희생을 치를 것인가이다.
사회주의혁명은 공상이다! 라는 말이 들린다. 스위스 인민은 다행히 ‘별도의’ 또는 ‘독자적인’ 국어가 없고, 인접 교전국들의 세계어 3개를 쓴다. 그래서 스위스 인민이 이들 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6,600만 명의 경제생활을 지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6.600만 명의 나라의 국민경제가 조직되고 있다. ‘상층의 3만 명’이 수십억의 전쟁 이윤을 착복할 수 있기 위하여, 나라의 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귀한’ 대표자들의 풍요를 위해 수백만 명이 도살당하기 위하여, 절대다수 인민에게 거대한 희생이 부과된다. 이러한 사실들과 이러한 경험에 직면하고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공상일까? 군주제도 융커도 없는, 자본주의 발달 수준도 매우 높고 아마도 어느 다른 자본주의 나라보다도 각종 조합으로 잘 조직되어 있는 한 소 국민이, 기아와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고자 이미 독일에서 실제로 시험된 것과 똑같은 것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공상’인가? 물론, 독일에서는 소수를 풍요롭게 하고, 바그다드로 가는 길을 열고 발칸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는 데 비해 스위스에서는 최대치로 잡아 3만 명의 부르주아를 수탈하는 것이 문제라는, 즉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아와 전쟁 위험을 막기 위해 이들의 소득 중 6천 내지 1만 프랑‘만’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사회주의 노동자 정부에게 납부하게 하는 ‘끔찍한 운명’을 언도하는 것이 문제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국들은 결코 사회주의 스위스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바로 처음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그들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을 사용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우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첫째로 스위스에서 혁명의 시작이 인접국들에서 계급적 연대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경우. 둘째로 이들 대국이 가장 인내심 많은 민족들의 인내심을 실제로 고갈시키는 ‘소모전’에 매이게 되지 않을 경우. 현 상황에서라면, 상호 적대적인 대국들에 의한 군사적 개입은 전 유럽에 걸쳐 타오르고 있는 혁명의 서곡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혹시 여러분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 사회주의혁명 같은 문제를 ‘설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며, 그것도 그저 하나의 부분적인 문제만을, 즉 우리가 마땅히 기울여야 할 모든 진지함을 가지고 조국방위의 거부라는 문제에 접근하길 원한다면 일체의 당 선전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변화를, 예로써 설명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단지 예증일 뿐이고, 단지 하나의 부분적인 문제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 이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즉각적인 투쟁이 우리가 개량을 위한 투쟁을 방기할 수 있거나 방기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성공을 이룰 것인지, 객관적 조건이 얼마나 빨리 이 혁명의 발발을 가능케 할 것인지 미리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개선, 대중의 처지를 바꾸는 모든 실질적인 경제적 · 정치적 개선을 마땅히 지지해야 한다. 우리와 개량주의자들(즉 스위스의 그뤼틀리 파) 간의 차이가 그들은 개량을 찬성하는 데 반해 우리는 개량을 반대한다, 이런 것인가? 아니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개량에 자신을 가두며, 그 결과 허리를 굽혀 — <<스위스 금속노동자신문>>(40호)에 기고한 어떤 (희귀한!) 혁명적 필자의 적확한 표현을 빌리면 — “자본주의의 간호병” 역할을 구걸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례대표제 등에 찬성투표를 하시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마시오.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체계적으로 보급하고, 이 혁명을 준비하고 거기에 맞춰 당 활동의 모든 영역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여러분의 가장 으뜸가는 임무로 삼으시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조건들은 매우 자주 우리에게, 수많은 사소하고 하찮은 개량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량에 대해, — 명료함을 위해 문제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킨다면 — 매 30분 연설 중 5분은 개량에, 25분은 다가오는 혁명에 할애한다는, 그러한 입장을 (그러한 방식으로) 취할 수 있어야 하며, 취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힘든 혁명적 대중투쟁이 없이는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혁명적 대중투쟁과 전쟁의 즉각적 종결 열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다! 후자 없는 전자는 아무 것도 아니며 공허한 소리이다.
힘든 당내 투쟁 또한 피할 수 없다. 스위스 사회민주당 내에서 ‘내부 평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가장이고 위선이며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숨는’ 속물적인 정책이다. ‘당내 평화’냐, ‘당내 투쟁’이냐의 선택이 지금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가정이 왜 철저한 오류인지는 위에서 언급한 헤르만 그로일리히의 공개장을 읽어 보고, 지난 몇 년간 당에서 진행된 사태 전개를 검토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 선택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대중을 퇴락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는 현재의 은폐된 형태의 당내 투쟁인가, 아니면 국제주의적 • 혁명적 경향과 당 내외의 그뤼틀리적 경향 간의 공공연한, 원칙 있는 투쟁인가.
여기에 이른바 ‘당내 투쟁’이 있다. 이 ‘당내 투쟁’ 속에서는 헤르만 그로일리히가 “초급진파” 또는 “조급한 분자들”을, 이들 괴물의 이름도 대지 않고, 이들의 정책을 정확히 규정하지도 않은 채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당내 투쟁’ 속에서는 R. 그림이 백 명 당 한 명의 독자만 이해할 수 있는 잔뜩 암시로 가득 찬 <<베르너 타그바흐트>>의 기사들을 발표하고 있다. 또 “외국의 안경”을 통해 사태를 보고 있는 자들을, 또는 그림이 볼 때 그토록 짜증스런 결의 초안에 “실제로 책임 있는” 자들을 겨누어 그림이 비난 글을 발표하고 있는 것도 이 ‘당내 투쟁’이다. 이런 종류의 당내 투쟁은 대중을 퇴락시킨다. 대중은 그러한 당내 투쟁을 ‘지도자들 간의 언쟁’이라고 보거나 추측하거나 할 뿐, 그것이 실제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뤼틀리 파와 좌파, 이 양대 경향 모두가 어디서나 자신들의 독자적인 견해와 정책을 제출함에 따라 당 내부의 그뤼틀리적 경향 — 당 외부의 그뤼틀리적 경향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위험한 — 이 좌파와 공공연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 싸움은 서로 간에 원칙의 문제를 둘러싼 투쟁이 될 것이며, 따라서 단지 ‘지도자들’만이 아닌, 당원 동지 대중에게도 근본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투쟁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익한 것은, 자신의 세계사적으로 획기적인 혁명적 사명을 수행할 자립성과 능력을 대중 속에서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좌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현 전쟁에서 조국방위 원칙을 거부한다는 입장으로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프롤레타리아트도 — 어쨌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우수한 분자들은 — 마찬가지로 조국 방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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