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인터내셔널은 어떻게 재건될 수 있는가?
V. I. 레닌, 1914년 12월
수십 년 동안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한테는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하나의 모델이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모범으로 삼는 이러한 측면은 전 세계의 어느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보다도 더, 아마 훨씬 더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따라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지금 유행하는 사회애국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배외주의에 대해 의식적인, 즉 비판적인 태도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은 분명하다. 과거에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무엇이었는가? 현재에 그것은 무엇인가? 미래에 그것은 무엇일까?
죽은 배외주의와 살아 있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어떻게 재건될 수 있는가?
V. I. 레닌, 1914년 12월수십 년 동안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한테는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하나의 모델이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모범으로 삼는 이러한 측면은 전 세계의 어느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보다도 더, 아마 훨씬 더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따라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지금 유행하는 사회애국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배외주의에 대해 의식적인, 즉 비판적인 태도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은 분명하다. 과거에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무엇이었는가? 현재에 그것은 무엇인가? 미래에 그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들 중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대답은 1909년에 카우츠키가 저술하여 많은 유럽 언어들로 번역된 소책자 <<권력으로 가는 길>>(Der Weg zur Macht)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를 가장 총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소책자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하고 (그들이 내걸고 있는 약속이라는 의미에서) 있으며, 더군다나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권위 있는 저자의 펜에서 나왔다. 우리는 소책자를 다소 상세하게 상기해보는 것이 지금 특히 유익할 것이라고 믿는데, 왜냐하면 이 망각된 약속들이 정말 자주 뻔뻔스럽게 폐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증기기관이 혁명적이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도” ‘혁명적 당’ (소책자의 여는 문장에서 언명된 바) 이다. 소책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획득,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원한다. 카우츠키는 “혁명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조소를 한껏 퍼붓고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떤 중요한 운동과 봉기에서도 우리는 물론 패배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하기 전에 자신이 승리를 확신한다고 자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바보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승리의 가능성을 고려하길 거부한다면 이는 “우리의 대의를 직접적으로 배반하는 것”일 것이다. 전쟁과 관련하여서는, “혁명은 전쟁 중에, 그리고 전쟁 후에 모두 가능하다.”
저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급적대가 첨예화하여 어느 시점에 가서 혁명으로 이어질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전쟁이 불러오는 혁명이 전쟁 중에든 아니면 전쟁 직후에든 발발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성장 전화’라는 이론보다 더 저속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경제적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 의지의 약화를 의미한다는 의견보다 더 오류는 없다.... 투쟁 의욕으로서의 의지는 첫째로 투쟁의 대가에 의해, 둘째로 힘의 자각에 의해, 셋째로 실제 힘에 의해 결정된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엥겔스가 붙인 유명한 서문을 기회주의의 의미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 말하자면 <<포어배르츠>>에 의해 — 행해지자 이에 분개한 엥겔스는 자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합법성을 평화적으로 숭배하려는 자”[1]로 보고 싶어 하는 일체의 가정에 대해 수치스런 일이라고 비판했다. 계속해서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국가권력 쟁취투쟁의 시기에 진입하고 있다고 믿을 모든 이유가 있다.” 이 투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십중팔구 그것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것이다.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아니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이 상당히 강화될 것이다.” 또한 혁명적 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카우츠키는 선언한다. 1895년에 독일에서 유권자 1천만 명 가운데 600만 명이 프롤레타리아이고, 350만 명이 사유재산에 이해관계를 갖는 사람들이었다. 1907년에 후자는 3만 명 증가했고, 전자는 160만 명이 증가했다! “상승 속도는 혁명적 격동의 시기가 다가오자 비상하게 빨라졌다.” 계급적대는 무뎌지지 않고 오히려 뾰족해졌다. 물가가 치솟고 제국주의 간 경쟁과 군국주의가 맹렬한 기세로 휘몰아치고 있다. “혁명의 새 시대”가 근접하고 있다. 괴물 같은 증세(增稅)가, “만약 혁명이라는 대안이 무장평화 시기 뒤보다도 전쟁 뒤 쪽에 더 가까이 와 있지 않았다면, 혁명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전쟁을 야기 시켰을 것이다....” “불길하게도 세계전쟁이 임박해 있고, 전쟁은 또한 혁명을 의미한다.” 1891년에 엥겔스는 독일에서 시기상조의 혁명을 두려워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이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시기상조의 혁명을 말할 수 없다.” (강조는 카우츠키). 소부르주아지는 조금도 신뢰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더욱 더 적대적으로 되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위기의 시기에는 “우리 쪽으로 대거 넘어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회민주주의가 “계속 흔들림 없이 일관되며 비타협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혁명적 시기에 진입했다.
이것이 카우츠키가 먼, 먼 과거에, 만5년 전에 썼던 방식이다. 이것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같은 정체성을 약속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민주주의가 존경 받을 수 있었던, 그리고 존경 받아야만 했던 지점이었다.
동일한 카우츠키가 오늘은 뭐라고 쓰고 있는지 한 번 보자. 여기 가장 중요한 진술이 그의 논설 <전시의 사회민주주의> (<노이에 차이트>> 1호, 1914년 10월 2일)에 있다.
“어떻게 전쟁을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당이 많은 심의를 했지만, 전시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심의한 경우가 드물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난 지금처럼 이렇게 정부가 강했던 적이 없다. 지금처럼 이렇게 당들이 약했던 적이 없다.... 전시는 평화적인 심의에 전혀 유리하지 않다.... 오늘 실제 문제는 자국 정부의 승리인가, 패배인가 이다.” 교전국 당들 사이에 반전 행동에 관한 협정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종류의 것은 실제로 실험된 적이 없다. 우리는 항상 이 가능성을 놓고 다투어 왔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독일 사회주의자들 간의 차이는 “원칙의 차이가 아니다.” (양측이 모두 자기 조국을 방어하는 것처럼) ....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조국 방위에 참가할 동등한 권리 또는 동등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에 대해 조국 방위에 참가한다는 이유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인터내셔널은 파산했는가?” “당은 전시에 자신의 원칙을 직접적으로 옹호하기를 방기했는가?” (같은 호에 실린 메링의 질문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그와 같은 비관론은 전혀 근거가 없다.... 차이는 근본적이지 않다.... 원칙에서는 여전히 일치한다.... 전시법에 불복한다면, 그것은 우리 출판물에 대한 탄압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 전시법에 복종한다고 해서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탄압법이라는 저 다모클레스의 검 아래서 우리 당 출판활동이 했던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당 원칙의 사수를 포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믿기 힘들어서 의도적으로 원문 그대로를 인용했다. 문헌 (노골적인 변절자들로부터 나온 문헌은 제외하고) 속에서 발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어떻게 저런 부끄러운 줄 모르는 속악한 논리가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파렴치한 진실 호도가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음흉한 속임수가? 사회주의 일반에 대한 노골적인 부인만이 아니라, 다름 아닌 현 전쟁과 똑같은 유럽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바로 그 국제적 결정(예를 들어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리고 특히 바젤에서 채택한 바의)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부인을 덮어 가리기 위한 저따위 고약한 술수를 문헌 속에서 발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카우츠키의 논거를 진지하게 다루어 분석을 시도한다면 이는 독자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유럽전쟁은 단순한 ‘소규모의’ 유대인 집단학살과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그 같은 전쟁 참가를 옹호하는 ‘사회주의적’ 논거는 유대인 집단학살 참가를 옹호하는 ‘민주주의적’ 논거와 완전하게 닮아 있다. 아무도 집단학살을 옹호하는 논거를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논거의 장본인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그 논거를 적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독자는 물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제2인터내셔널의 최대 권위자가, 한 때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견해를 주창한 저자가 어떻게 변절자보다도 더 극악한 그 무엇으로 타락하는 일이 가능한가? 우리의 답은 이렇다. 평소와 다른 일은 일어난 바 없다고, 그리고 ‘용서하고 잊는’ 등등의 것이 어렵지 않다고 —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즉 문제를 변절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들만이 그것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충심으로 사회주의적 신념을 고백한 사람들, 그리고 이 글의 서두에서 제시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포어배르츠>>는 죽었다” (파리의 <<골로스>>지에서 마르토프가 한 표현), 카우츠키는 ‘죽었다’는 얘기를 접하고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개인들의 정치적 파산은 역사의 전환점에서 희귀한 일이 아니다. 카우츠키는 그가 끼쳐 온 거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대 위기 때에 즉각 전투적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중에 속한 적이 없다. (밀레랑주의[2] 문제에서 그가 동요했던 것을 상기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같은 시간을 거쳐 가고 있다. “부르주아 여러분, 부디 먼저 쏘아주시오!”[3] 1891년에 엥겔스는 이른바 평화적인 입헌적 발전의 시기에 우리 혁명가들이 부르주아적 합법성을 이용해야 할 필요성을 — 아주 정당하게도 — 주창하면서 이렇게 썼다. 엥겔스의 생각은 지극히 명료했다. 다음은 우리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이 쏠 차례이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이 세워 놓은 합법적 토대를 스스로 파괴하는 시점에는 투표용지를 탄환으로 교환하는 (내란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라고 엥겔스가 말했다. 1909년에 카우츠키가 유럽에서의 혁명은 이제 시기상조일 수 없으며, 전쟁은 혁명을 의미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모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유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적인’ 시기의 수십 년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 시기는 모든 나라에서 불가피하게 기회주의를 낳았고, 의회와 노동조합과 언론계 등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그 기회주의가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오염, 약화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부르주아지 전체가 달려들어 기회주의를 온갖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는 유럽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 기회주의에 대한 장기간의 완강한 투쟁이 수행되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다. 15년 전 베른슈타인 논쟁이 터졌을 때, 다름 아닌 그 카우츠키는 만약 기회주의가 일개 기질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되어버린다면 분열이 일정에 오를 것이라고 썼다. 러시아에서 구 <<이스크라>>[4] — 사회민주주의 노동자계급 당 창건의 주춧돌이 된 — 는 1901년 초 그 두 번째 호에 실린, <20세기의 문턱에서>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20세기의 혁명적 계급은 18세기의 혁명적 계급 — 부르주아지 —처럼 그 자신의 지롱드당과 그 자신의 산악당[5]을 가졌다.
유럽전쟁은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역사적 위기이다. 다른 모든 위기처럼 전쟁도 뿌리 깊은 적대를 격화시켜 수면 위로 밀어 올려서 모든 위선의 장막들을 찢어버리고 모든 인습을 거부하며 모든 오염되고 썩어가는 권위를 해체시킨다. (내친 김에 말하면, 이것은 모든 위기가 갖는 유익하고 진보적인 효과인 바, 오직 ‘평화적 진화’의 우둔한 숭배자들만이 깨닫지 못한다). 그 25년 혹은 45년의 존속 기간 (1870년부터인가, 혹은 1889년부터인가, 어느 시점부터로 계산할 것인가에 따라) 동안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해 주고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예비적이고 기초적인 초동 조직화를 가능케 해준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제2인터내셔널이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다하고 죽었다. 그러나 폰 클룩 [1차 대전 당시 독일 장군] 무리들에 의해 정복되어서가 아니라 기회주의에 의해 정복되어 죽은 것이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묻게 내버려두라. 이반 니키포로비치를 ‘숫거위’라고 욕했다가 친구들로부터 적과 화해하라고 종용 받게 된 또 하나의 이반 이바노비치가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6], 머리는 텅 비었으면서 참견하기만 좋아하는 자들(배외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의 흥미로운 종복들은 아니지만)이 반더벨드 · 상바와 카우츠키 · 하제를 화해시키는 임무로 수고하도록 내버려두라. 프랑스 노동자들을 쏴죽이라는 독일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조국 방위’라는 이름으로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정당화 하는 것,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을 쏴죽이라는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동일하게 ‘조국 방위’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정당화 하는 것, 그러한 것이 인터내셔널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쓴 위선적이고 사기적인 결의안을 같은 테이블에 앉아 통과시키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의미인가? 지금과 같은 중대한 시기에 행동으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 즉 힘을 내서 자기 ‘조국’의 정부와 지배계급을 향해, “차례가 되어 쏠” 수 있는 사람들이 결집하는 (먼저 이데올로기적으로, 그 다음으로는 때가 되면 조직적으로도) 것, 여기에 인터내셔널의 본령이 있다. 이것은 쉬운 과업이 아니다. 많은 준비와 큰 희생을 요하며, 때로는 실패가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과업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드시 그 과업은 그것을 수행할 의지가 있는, 그리고 배외주의자들 및 사회배외주의의 옹호자들과 철저히 단절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해내야만 한다.
파네쿡 같은 사람들은 온갖 위선에 맞서 충심으로 사회주의 — 배외주의가 아닌 —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하고 있다. 파네쿡은 <인터내셔널의 붕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도자들이 그들 간의 차이를 대충 봉합하려는 시도로 뭉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사실들을 밝히자. 내일이 아니면 모레라도 어떻게든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밝히도록 강요할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에 3개의 조류가 존재한다. a) 일관되게 기회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배외주의자들. b) 기회주의에 대한 일관된 반대자들로서, 이미 모든 나라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기회주의자들은 그들 대부분을 패퇴시켰지만, 그러나 ‘패배한 군대는 빨리 배운다.’), 내란을 향한 혁명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c)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동요하는 사람들로서, 현재 기회주의자들의 뒤를 좇고 있고,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위선적인 시도 — 그들이 이른바 과학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여 하고 있는 모종의 것 — 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세 번째 조류에 휩쓸린 사람들 중 일부는 구제될 수 있고 사회주의로 복귀할 수 있지만, 그러나 첫 번째 조류와의 가장 단호한 단절 · 분립 정책을 통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전쟁공채에 대한 찬성투표, ‘조국 방위’, ‘전시법에 복종’, 합법적 수단만으로 만족할 용의, 내란 거부 등을 정당화하는 자들 모두와 철저히 결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실제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중앙위원회의 러시아 국내위원회 및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운동의 지도적 분자들과 연락을 확립하여 그들과 의견을 교환한 결과, 주요 지점들에서 의견이 일치함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 방향으로 수행되는 활동만이 당 활동이자 사회민주주의 활동임을 중앙기관지 편집국으로서 우리가 당의 이름으로 선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운동의 분열이라는 상(像)은 그 ‘이례적인’ 면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우려스런 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례적인 일이 일어나거나 (결국 아들러와 카우츠키는 1914년 7월 국제사회주의사무국[7] 마지막 회기에서 자신들은 기적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유럽전쟁을 믿지 않는다고 실제로 선언했다!), 아니면 한 때 독일 사회민주주의였던 것의 고통스런 해체를 우리가 목도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객관 정세는 결국 보여주고 만다. 결론으로, 우리는 (이전의) 독일 사회민주당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싶은 사실이 있다. 많은 쟁점들에서 우리와 대립해 온 반대파 사람들이 그러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분열이라는 상에 도달한 사실 말이다. 마르토프는 <<골로스>>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포어배르츠>>는 죽었다.... 계급투쟁을 공개적으로 폐기하는 사회민주주의라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조직을 일시 해산하는 것과 함께 기관지도 폐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골로스>>의 보도에 따르면, 플레하노프는 한 공개강연에서 “나는 분열에 매우 반대하지만, 그러나 조직의 보전을 위해 원칙이 희생된다면, 허구적인 단결보다 분열이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플레하노프는 독일 급진파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 것인데, 그는 독일인들의 눈에 낀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에 박힌 들보는 보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특질이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플레하노프의 이론상의 급진주의와 실천상의 기회주의라는 그 특질을 모두가 아주 익히 보아 왔다. 그러나 그 같은 ‘특이함’을 지닌 인물들까지도 독일인들 사이의 분열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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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5년 3월 30일자 <<포어배르츠>>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1848-1850년>>에 붙인 서문으로부터 요약한 내용을 몇몇 초록과 함께 발표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역할에 관한 매우 중요한 명제들을 누락했다. 이것은 엥겔스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엥겔스는 1895년 4월 1일자로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오늘 <<포어배르츠>>에 실린 나의 ‘서문’ 초록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초록은 내가 앞에서 제시한 내용이 누락되고 앞뒤 맥락이 잘려나가 마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합법성을 평화적으로 숭배하려는 자’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568).
엥겔스는 ‘서문’을 전문 게재할 것을 요구했다. 1895년에 <<노이에 차이트>>지에 서문이 발표되었지만, 상당 부분 삭제된 채였는데, 이번에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의한 것이다. 자신들의 개량주의 전술을 정당화할 명분을 찾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그 후 ‘서문’에 대한 자신들의 판본을 만들어서 엥겔스가 혁명과 무장봉기와 바리케이드 전을 폐기한 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서문’의 원문은 1955년 소련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Marx and Engels, Selected Works, Moscow, 1962,Vol. I, pp. 118-38을 보시오.)
[2] Millerandism – 프랑스 ‘사회주의자’ Millerand의 이름을 따서 붙인 기회주의 조류. 밀레랑은 1899년에 프랑스의 반동적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하여 부르주아지가 그 정책을 수행하는 데 부역했다.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가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느냐 문제가 1900년에 열린 제2인터내셔널 파리 대회에서 심의되었다. 대회는 사회주의자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를 비난하지만, 그러나 어떤 ‘예외적인’ 경우에는 허용할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화해주의적 결의를 채택했다. 1차 대전 초기에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 단서조항을 이용하여 그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가담한 것을 정당화했다.
[3] F. Engels, Socialism in Germany, Section I을 보시오.
[4] Iskra (불꽃) - 1900년에 레닌의 주도로 창간된 러시아 최초의 전국적인 비합법 마르크스주의 신문. <<이스크라>>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노동자계급 당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첫 호가 1900년 12월에 라이프치히에서 나왔다. 그 후 뮌헨에 이어 런던에서(1902년 7월부터), 그리고 제네바에서(1903년 봄부터) 발행되었다. 레닌이 발의하고 직접 참여한 <<이스크라>> 편집국이 당 강령을 작성 (<<이스크라>> 21호에 발표)하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대회를 준비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당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대회 직후 멘셰비키가 플레하노프의 지원 하에 <<이스크라>>의 주도권을 획득함으로써 52호부터는 더 이상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기관지이기를 멈추었다.
[5] The Mountain (Montagne) and the Gironde –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혁명 당시 부르주아지의 두 정파. 산악파 또는 자코뱅파는 그 시대의 혁명적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좀 더 단호한 대표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들은 절대주의와 봉건제의 폐지를 옹호했다. 자코뱅파와는 달리 지롱드파는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군주제와 타협하는 길을 구했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내 기회주의 조류를 ‘사회주의 지롱드’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프롤레타리아 자코뱅’으로 불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한 뒤 레닌은 멘셰비키가 노동계급운동에서 지롱드파 경향을 대표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6] Ivan Ivanovich와 Ivan Nikiforovich는 Gogol의 Tale of How Ivan Ivanovich Quarrelled with Iran Nikiforovich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이다. 그 이름들이 속담에까지 나오게 된 이들 두 지방 지주 간의 분쟁은 극히 사소한 이유로 시작하여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7] The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 – 1900년 파리 대회의 결정에 의해 설립된 제2인터내셔널 집행기구. 1905년부터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대표하여 이 사무국의 성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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