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4월 테제: 사회주의혁명의 현실성을 밝히다
차례
1. 제국주의 세계대전과 2월혁명
2. 2월혁명 이후 전쟁과 권력 문제에 대한 4월테제의 대답
3.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 민주주의혁명 단계론의 극복
4. 인민전선인가, 노동자 통일전선인가?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인가, 소비에트권력/피티독재인가?
5. 세계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로서 러시아혁명
6.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필요하다” - 코뮌 형 국가
5. 세계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로서 러시아혁명
6.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필요하다” - 코뮌 형 국가
* * * *
1. 제국주의 세계대전과 2월혁명
1917년 1차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세계를 뒤흔든 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배경과 맥락으로 해서 이 혁명적 폭풍이 터져 나왔다는 데 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청년들이 전장으로 내보내져 식민 열강의 세계 지배를 위한 패권쟁투 속에 죽임을 당했고, 그 사이에 수천만 명의 민간인들이 포화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비극 가운데 아마도 가장 수치스런 것은 노동자계급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당들이 ‘자’국 제국주의 정부에 보낸 지지였다. 그 당들은 다름 아닌 수백만 명 규모를 가진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 당들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대중을 분기시키고 그리하여 자본가 계급지배의 몰락을 앞당긴다”는 결의를 배반하고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다.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부르주아지를 위해 사실상 징병관으로 나섰다. 각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운동 지도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서로를 쏴죽이기 위해 전장에 내보내진 것이다. 레닌/볼셰비키,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치머발트 좌파와 같은,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에 충실한 혁명가들은 한줌의 극 소수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솟아오른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의 참화와 고통을 이제 마침내 끝장낼 수 있다는 희망을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2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거대한 규모의 총파업과 봉기를 통해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끌어내렸지만, 결과는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대표들로 채워진 임시정부가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 당초부터 차르의 제국주의 전쟁 수행을 뼛속 깊이 지지했고, 독일과 오스만제국 영토 중 이윤 내는 부분을 탈취하고 연합군 승리의 전리품을 나눠가지질 바라면서 2월 혁명 이후에도 전쟁 계속을 밀고 가고자 한 러시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이중권력
이와 같이, 1917년 2월 차르 정권을 휩쓸어버린 분노의 폭발이 국가권력 차원에서는 뿌리깊이 모순적인 상황을 낳았다. 2월 봉기를 이끈 것은 고사하고 참가한 바도 없는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이 임시정부를 선포했지만, 그들은 대중의 봉기와 그 속에서 솟아나온 소비에트가 어디로 나아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부여해준 이 혁명을 이제 멈춰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지도자들도 질서의 복원을 원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맡고 있는 멘셰비키 (의장 치헤이제와 스코벨레프)와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그리고 케렌스키는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소비에트 대의원 다수도 여기에 동의했지만, 한편으론 소비에트를 대신해서 임시정부를 감시할 ‘감독위원회’를 (집행부와 독립적으로) 설립하기도 했다. 이는 임시정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불신과 동시에, 소비에트의 임무는 이 정부가 약속을 지키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라는 믿음 둘 다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력 배치는 부르주아지와의 협력관계 가능성에 대한 노동자 다수자 측의 환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이중권력이 유동하는 불안정한 투쟁의 한 계기임을, 따라서 서로 다투는 계급 어느 한 쪽으로 투쟁이 결판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중권력을 대등한 파트너들 간의 영구적인 협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중권력은 오직 어느 한 쪽이 교착상태를 깨고 다른 쪽에게서 모든 권력을 빼앗는 것으로 나아가는 서막일 수밖에 없다.
기존 볼셰비키 노선의 모순
사태전개의 초점이 거리를 벗어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관계 설정 문제로 이동하자 볼셰비키는 곧바로 운동의 주도력과 지도적 지위를 잃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볼셰비키 스스로 정세 인식과 혁명 진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 조건 때문이었다. 즉 2월 혁명 후 전쟁 계속 문제와 정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과 전술이 모호했다. 임시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하는가?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당 일선투사들의 모든 본능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누가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지, ‘전쟁 계속’을 밀고 가는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 물결에 대한 태도, 소비에트에 대한 방침 등, 2월 혁명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조건에 대해 그 어떤 분명한 방침과 슬로건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4월 3일 레닌이 러시아에 귀국할 때까지 볼셰비키 당은 2월 혁명의 중대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이 혁명의 결과물인 이중권력에 대해 강령적으로, 노선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혁명의 과제와 전망이 순 민주주의적 단계에 갇혀버렸다. 당내에 부분적인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혁명이 민주주의 단계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기존 입장이 극복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부분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기존 볼셰비즘 입장에 내재된 모순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이 노동자·농민 정부는 사회주의혁명과는 분리되고 구분되는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한정된 과제들을 (철저히) 수행하는 정부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는 별개의 것으로 상정된 독재였다. 그러나 이미 1917년 2월에 봉기 대중은 민주공화제를 넘어서 나아갔다. 소비에트와 민병과 공장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의 맹아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형식을 뚫고 나아간 노동자계급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1917년 1차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세계를 뒤흔든 것은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배경과 맥락으로 해서 이 혁명적 폭풍이 터져 나왔다는 데 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청년들이 전장으로 내보내져 식민 열강의 세계 지배를 위한 패권쟁투 속에 죽임을 당했고, 그 사이에 수천만 명의 민간인들이 포화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비극 가운데 아마도 가장 수치스런 것은 노동자계급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당들이 ‘자’국 제국주의 정부에 보낸 지지였다. 그 당들은 다름 아닌 수백만 명 규모를 가진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 당들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대중을 분기시키고 그리하여 자본가 계급지배의 몰락을 앞당긴다”는 결의를 배반하고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다.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부르주아지를 위해 사실상 징병관으로 나섰다. 각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운동 지도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서로를 쏴죽이기 위해 전장에 내보내진 것이다. 레닌/볼셰비키,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치머발트 좌파와 같은,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에 충실한 혁명가들은 한줌의 극 소수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솟아오른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 체제의 참화와 고통을 이제 마침내 끝장낼 수 있다는 희망을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2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거대한 규모의 총파업과 봉기를 통해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끌어내렸지만, 결과는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대표들로 채워진 임시정부가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 당초부터 차르의 제국주의 전쟁 수행을 뼛속 깊이 지지했고, 독일과 오스만제국 영토 중 이윤 내는 부분을 탈취하고 연합군 승리의 전리품을 나눠가지질 바라면서 2월 혁명 이후에도 전쟁 계속을 밀고 가고자 한 러시아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이중권력
이와 같이, 1917년 2월 차르 정권을 휩쓸어버린 분노의 폭발이 국가권력 차원에서는 뿌리깊이 모순적인 상황을 낳았다. 2월 봉기를 이끈 것은 고사하고 참가한 바도 없는 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이 임시정부를 선포했지만, 그들은 대중의 봉기와 그 속에서 솟아나온 소비에트가 어디로 나아갈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부여해준 이 혁명을 이제 멈춰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지도자들도 질서의 복원을 원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맡고 있는 멘셰비키 (의장 치헤이제와 스코벨레프)와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그리고 케렌스키는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소비에트 대의원 다수도 여기에 동의했지만, 한편으론 소비에트를 대신해서 임시정부를 감시할 ‘감독위원회’를 (집행부와 독립적으로) 설립하기도 했다. 이는 임시정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불신과 동시에, 소비에트의 임무는 이 정부가 약속을 지키도록 압력을 넣는 것이라는 믿음 둘 다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력 배치는 부르주아지와의 협력관계 가능성에 대한 노동자 다수자 측의 환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이중권력이 유동하는 불안정한 투쟁의 한 계기임을, 따라서 서로 다투는 계급 어느 한 쪽으로 투쟁이 결판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중권력을 대등한 파트너들 간의 영구적인 협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중권력은 오직 어느 한 쪽이 교착상태를 깨고 다른 쪽에게서 모든 권력을 빼앗는 것으로 나아가는 서막일 수밖에 없다.
기존 볼셰비키 노선의 모순
사태전개의 초점이 거리를 벗어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관계 설정 문제로 이동하자 볼셰비키는 곧바로 운동의 주도력과 지도적 지위를 잃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볼셰비키 스스로 정세 인식과 혁명 진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 조건 때문이었다. 즉 2월 혁명 후 전쟁 계속 문제와 정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과 전술이 모호했다. 임시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하는가?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당 일선투사들의 모든 본능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누가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지, ‘전쟁 계속’을 밀고 가는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 물결에 대한 태도, 소비에트에 대한 방침 등, 2월 혁명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조건에 대해 그 어떤 분명한 방침과 슬로건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4월 3일 레닌이 러시아에 귀국할 때까지 볼셰비키 당은 2월 혁명의 중대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이 혁명의 결과물인 이중권력에 대해 강령적으로, 노선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혁명의 과제와 전망이 순 민주주의적 단계에 갇혀버렸다. 당내에 부분적인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혁명이 민주주의 단계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기존 입장이 극복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부분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기존 볼셰비즘 입장에 내재된 모순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이 노동자·농민 정부는 사회주의혁명과는 분리되고 구분되는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한정된 과제들을 (철저히) 수행하는 정부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는 별개의 것으로 상정된 독재였다. 그러나 이미 1917년 2월에 봉기 대중은 민주공화제를 넘어서 나아갔다. 소비에트와 민병과 공장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의 맹아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형식을 뚫고 나아간 노동자계급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순의 해결은 레닌의 귀환과 귀환 직후 발표된 <4월 테제>를 둘러싼 논쟁을 기다려야 했다. 망명지에서 귀환하는 레닌을 맞이하는 핀란드 역 영접 자리에서 레닌은 군중을 향해 기존 볼셰비즘 입장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천명했다. “전세계사회주의혁명의 새벽이 이미 밝았습니다... 이제 유럽 자본주의 전체가 무너질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루어낸 러시아혁명이 그 길을 닦았고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제한된 과제들, 그것도 러시아 일국적 맥락으로 한정된 과제들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한 가운데에 “세계사회주의혁명”의 깃발이 내려 꽂혀진 것이다.
2. 2월 혁명 이후 전쟁과 권력 문제에 대한 4월 테제의 대답:
“혁명적 조국방위주의” 반대! ‘전쟁 계속’ 제국주의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1917년 2월 혁명이 터진 뒤, 레닌이 러시아로 귀환하자마자 발표한 4월 테제는 볼셰비키 당 내에 격렬한 논쟁과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레닌의 귀환 직전까지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공식 입장과 전술은 자칭 “구 볼셰비키”들의 주도 하에 나왔다. 이 때 “구 볼셰비키” 노선은, 혁명의 성격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전제 하에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하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전쟁 계속’ 제국주의 정부를 지지하며, 패전주의를 폐기하고 조국방위주의로 기운 이러한 “구 볼셰비키” 노선이 만약 볼셰비키 당을 계속 지배했다면 과연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 중대한 시점에, 볼셰비키라는 그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 4월 테제를 통해서 제 때 노선 전환과 강령·전술상의 재무장을 기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혁명이라는 행복한 성공적 결말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2. 2월 혁명 이후 전쟁과 권력 문제에 대한 4월 테제의 대답:
“혁명적 조국방위주의” 반대! ‘전쟁 계속’ 제국주의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1917년 2월 혁명이 터진 뒤, 레닌이 러시아로 귀환하자마자 발표한 4월 테제는 볼셰비키 당 내에 격렬한 논쟁과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레닌의 귀환 직전까지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공식 입장과 전술은 자칭 “구 볼셰비키”들의 주도 하에 나왔다. 이 때 “구 볼셰비키” 노선은, 혁명의 성격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전제 하에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하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전쟁 계속’ 제국주의 정부를 지지하며, 패전주의를 폐기하고 조국방위주의로 기운 이러한 “구 볼셰비키” 노선이 만약 볼셰비키 당을 계속 지배했다면 과연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 중대한 시점에, 볼셰비키라는 그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 4월 테제를 통해서 제 때 노선 전환과 강령·전술상의 재무장을 기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혁명이라는 행복한 성공적 결말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은 무슨 레닌의 권위로 ‘간단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레닌이 당내 반대로부터 4월 테제를 방어하는 가운데 “구 볼셰비즘” 노선을 “고물보관소에나 수용해야 한다”고 공격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테제가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과 발본적 쇄신의 내용을 담고 있어 볼셰비키 당 내에서도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논쟁적 문투로 <4월 테제>를 공세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전술에 관한 편지>와 <이중권력>, 이어서 테제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정교화 시킨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정세 보고와 결의안) 등이 이 시기 4월 테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쟁 글들이다.
압축적으로 정리된 아주 짧은 글인 <4월 테제>는 10개의 테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1순위의 긴박한 사안으로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및 그와 관련한 권력 및 국가체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2월 혁명 이후 신정부(임시정부) 하에서도 전쟁의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이 정부의 자본가적 성격 때문에 여전히 제국주의적 약탈적 전쟁이지, 결코 ‘혁명적 전쟁’이 아니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 문제에서 “혁명적 [조국] 방위주의”에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방위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 반대’/패전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이에 동조하는 빈농에게로 넘어갈 때에만, 즉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 경우에만 혁명적 방위주의가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자본을 타도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지 않고서는 이 전쟁을 끝장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소비에트 대중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해야 한다.
● 전(全) 국가권력을 소비에트로!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경찰, 군대, 관료의 폐지!
● 그밖에, △농업강령에서는 무게 중심을 ‘농민’이 아니라 ‘농업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토지 국유화! △모든 은행을 단일 국립은행으로 통합, 이에 대한 소비에트의 통제. 생산과 분배를 소비에트의 통제 하에! △당 강령 개정 (a.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하여, b.국가에 대한 태도 및 “코뮌 국가”라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c.시대에 뒤떨어진 우리 최소강령의 수정) △당명 변경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당의 재무장) △새로운 인터내셔널.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 발발 이래 1917년 2월 혁명 전까지 레닌이 발표한 글들에서 줄곧 제시되고 있는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적 방침, 특히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과 혁명적 패전주의(전쟁 반대/‘조국방위’ 거부/‘자’국 정부의 패전을 위한 투쟁) 전술을 상기해본다면, <4월 테제>의 이러한 내용이 볼셰비키 사이에서 특별히 생소하거나 낯선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4월 테제가 당내 논쟁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는가? 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그러한 정세인식·정치방침이 레닌 개인의 견해로 머물지 않고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로까지 표명되어 왔음에도 말이다. 정작 “내란으로의 전화의 시작”인 2월 혁명이 터진 상황에서 <4월 테제>를 “레닌 개인의 견해”일 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당 지도부 일각의 반대는 대체 어찌 된 것인가? 다른 어떤 노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테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기각한 것인가?
이후 우리는 이 논쟁의 전말을 살펴볼 것인데, 일단 이 반대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들 당 지도부 (당시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국인 카메네프, 스탈린, 무라노프)는 2월 혁명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제국주의 전쟁이 아닌 혁명적 전쟁, 즉 “혁명적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지켜야 하는 전쟁이 되었으므로 방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좌로부터 압력을 넣는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토지 문제 미해결 등으로 인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하며, 지금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서,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정세 국면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노선이 충돌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는지, 그 의미와 성격, 그리고 4월 테제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닌의 귀국 이전인 2월 혁명 직후 조성된 정세, 특히 이중권력으로 대표되는 모순적 정세를 면밀히 뜯어봐야 한다.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 발발 이래 1917년 2월 혁명 전까지 레닌이 발표한 글들에서 줄곧 제시되고 있는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적 방침, 특히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과 혁명적 패전주의(전쟁 반대/‘조국방위’ 거부/‘자’국 정부의 패전을 위한 투쟁) 전술을 상기해본다면, <4월 테제>의 이러한 내용이 볼셰비키 사이에서 특별히 생소하거나 낯선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4월 테제가 당내 논쟁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는가? 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그러한 정세인식·정치방침이 레닌 개인의 견해로 머물지 않고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로까지 표명되어 왔음에도 말이다. 정작 “내란으로의 전화의 시작”인 2월 혁명이 터진 상황에서 <4월 테제>를 “레닌 개인의 견해”일 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당 지도부 일각의 반대는 대체 어찌 된 것인가? 다른 어떤 노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테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기각한 것인가?
이후 우리는 이 논쟁의 전말을 살펴볼 것인데, 일단 이 반대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들 당 지도부 (당시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국인 카메네프, 스탈린, 무라노프)는 2월 혁명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제국주의 전쟁이 아닌 혁명적 전쟁, 즉 “혁명적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지켜야 하는 전쟁이 되었으므로 방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좌로부터 압력을 넣는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토지 문제 미해결 등으로 인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하며, 지금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서,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정세 국면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노선이 충돌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는지, 그 의미와 성격, 그리고 4월 테제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닌의 귀국 이전인 2월 혁명 직후 조성된 정세, 특히 이중권력으로 대표되는 모순적 정세를 면밀히 뜯어봐야 한다.
3.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 / 민주주의혁명 단계론의 극복
먼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세력 사이에 일시적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는 이러한 이중권력 정세를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어떻게 이해했는가? 노동대중은 소비에트를 단지 투쟁의 무기로뿐만 아니라 통치권력으로 보았다. 단순히 노동조합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협조적인 소비에트 집행부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 [SR 에스에르])가 불어넣고 있는 환상, 즉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 아래 부르주아지와의 협력관계를 이루어 이 혁명을 완수해나갈 수 있다는 환상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했다.
2월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이와 같은 이중권력 상황은 볼셰비키 당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1905년 혁명 이래 품어 왔던 혁명 전략 및 예측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멘셰비키와 달리 볼셰비키는 올바르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는 반혁명적 역할을 할 뿐으로, 민주주의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장애물로 나설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끌어낸 결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당이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농민과 동맹하여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주 권력인 차르 군주제를 타도하는 무장봉기를 이끌어 노동자·농민의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인데, 구체제를 겨냥하여 이 정부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적 조치들로 인해 이 임시혁명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농민과의 동맹을 통한)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화에서 보듯이, 이 정부가 취할 조치들은 1903년 강령의 최소강령 부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토대를 건드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강령의 최소요구 부분은 멘셰비키도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민주공화제’,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가 그 주요 항목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어떤가?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가 ㅡ 노동자 당과 농민 대표자가 아니라 ㅡ 담당하고 있는 정부가 아닌가. 이 임시정부는 우리의 전략 속에서 만들어내려고 했던 그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전히 현 국면은 무장봉기에 의해 그것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인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해야 하는 상황인 것인가?). 예측 시나리오에 맞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노동자와 병사가 만들어낸 권력은 민주공화제를 넘어서는 구조들을 취하고 있다. 실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그리고 그 지휘 하에 있는 민병과 공장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구현한 국가(“코뮌 국가”)의 맹아다. 그런데 이런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대의원 다수파로서 멘셰비키당 · 에스에르당에 의해 소비에트가 주도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자의 다수자가 지지하는 정부를 겨냥하여 봉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되는데, 우리가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를 지지하는 블랑키주의자가 아닌 이상 이건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맞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우리 예측 공식 의 핵심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위원회는 3월 4일, “임시정부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범민주 인민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 임시정부의 권력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임시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과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내 지배적인 멘셰비키 방침에 그 어떤 직접적 도전도 하지 않겠다는, 그냥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집행위원회 내 볼셰비키 위원들 대부분이 정부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한 멘셰비키의 결의안에 찬성투표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페트로그라드 시의 산업 중심지인 비보르그 지구 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대한 불신을 표하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 성명 역시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담고 있었다. 쉴리아프니코프, 몰로토프, 잘루츠키로 구성되어 있는 재외 중앙위원회 러시아 사무국은 좀 더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처음에 이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당들로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 당들 간의 협정으로 (위로부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대체한다는 이러한 구상은 곧바로 거부되었다. 멘셰비키와 에스에르는 노동자 정부나 노동자·농민 정부 같은 것은 지금 필요 없다며, 부르주아 당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를 지지하길 원했다. 나아가 멘셰비키당 다수파 (원래는 반전 입장이었던)는 이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혁명의 성과물을 지키는 전쟁이 되었다며 “전쟁 반대”를 내리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슐리아프니코프 등의 러시아 사무국은 왼쪽으로 더 이동하여 3월 22일에는 소비에트를 새로운 국가권력의 맹아라고 성격규정을 내리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레닌이 스위스에서 발전시키고 있던 입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반면,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국은 볼셰비즘 내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었다. <<프라우다>> 3월 7일의 논설에서는 “우리로서는, 지금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타도가 아니라, 전제정과 봉건제의 타도다”라고 선언했다. 또 카메네프와 함께 <<프라우다>> 공동 편집자인 스탈린은 이렇게 썼다. “임시정부는 실제로 혁명적 인민이 쟁취한 성과물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 현재로선 부르주아 층의 퇴출을 재촉하여 사태를 강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언젠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러한 지지 입장은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급기야 전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 3월 15일에 편집국의 카메네프는 <<프라우다>>의 지면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내걸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 우리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카메네프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군대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가장 정신 나간 정책일 것이다. 이것은 평화의 정책이 아니라, 자유 인민으로서는 혐오감을 느끼며 거부할 노예제의 정책이 될 것이다. 인민은 총탄에는 총탄으로, 포탄에는 포탄으로 응수하며 당당히 자신의 진지를 지킬 것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혁명의 무력을 해체시키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날 <<프라우다>> 지면에서는 스탈린이 ‘전쟁 중지!’라는 공허한 외침은 혁명적 군대의 해체를 요구하는 슬로건이 될 수 있다며, 직접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평화협상 개시에 앞장서도록 “요구”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해결책은,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즉각적인 평화협상 개시에 동의한다고 임시정부가 선언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은 집회와 시위를 배치하여 임시정부에게, 모든 교전국을 즉각 평화협상에 착수하도록 끌어내는 일에 공개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비판했듯이, “이 정부, 자본가의 정부에 제국주의적이기를 그만두라는 식의 환상을 심는 ‘요구’”로서, 사실상 임시정부 지지를 전파하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주장하는 논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시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향후 수립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최적의 투쟁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현재로선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카메네프-스탈린 지도라인에 의해 볼셰비키는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왼쪽 날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3월 17일에는, 2월 봉기에서 선봉 역할을 한 비보르그 지구의 평당원 노동자 세포들이 프라우다 편집국을 당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럼에도 당내에 협조주의 조류, 즉 임시정부를 수용하고 멘셰비키 · 에스에르의 소비에트에 대한 통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투쟁을 제한, 축소하는 조류 (이후의 용어로 말하면, ‘인민전선’주의적 조류)가 당 내에 확대되고 있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때 레닌이 스위스에서 긴급하게 써 보낸 <먼 곳에서 보낸 편지> ㅡ 그 주요 지침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일절 지지하지 말 것, 전쟁 반대 당론을 바꾸지 말 것, ‘전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을 위해 투쟁할 것 ㅡ 는 <<프라우다>> 편집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보내온 편지 네 편 중 하나만이 <<프라우다>>에 실렸는데, 그것도 중요한 내용이 삭제되는 등 편집된 상태로였다. 그 삭제된 내용 중 하나는, 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자는 그 누구든 “노동자에 대한 배반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 평화와 자유의 대의에 대한 배반자”로 낙인찍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레닌이 유명한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귀국하여 핀란드 역에 도착했을 때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당 지도부가 레닌을 맞으러 나왔다. 그 때 지도부의 일원으로 함께 나온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지도자 라스콜니코프는 레닌이 카메네프에게 보낸 첫 ‘인사’를 이렇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당신이 <<프라우다>>에 쓴 거, 그 쓰레기는 뭡니까? 우리가 몇 호 보면서 정말로 당신 욕을 했소.”
레닌은 당 회합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그의 소리를 들으러 핀란드 역에 나온 군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인 멘셰비키당의 치헤이제가 공식 환영단을 대표하여 레닌에게 “민주파 대열의 결속”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레닌은 둘러싼 군중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전 세계 사회주의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곧 유럽 자본주의 전체가 끝장날 것이다. 여러분이 이룩한 러시아 혁명이 그 길을 닦았고 새 시대를 열었다. 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다음날 4월 4일, 볼셰비키 당 소속 소비에트 대의원 70명이 모인 타우리드 궁 회합에서 레닌은 처음으로 4월 테제를 낭독했다. 이때의 반응을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회상>>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동지들은 일순 좀 당황했다. 많은 동지들이 일리치 [레닌]가 너무 투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아직 사회주의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는 심지어 한 친구에게 “일리치가 미쳐버린 걸로 보일까봐 두렵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같은 날 오후, 레닌은 지노비에프의 요청으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합동회의에서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연설했는데, 이 회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재통합 전망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것으로서 카메네프-스탈린 라인이 추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였다. 멘셰비키 쪽에서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미치광이의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의 지지도 냉담했고, 회의에 배석했던 콜론타이만이 레닌의 입장에 찬성 발언을 했다.
당내 투쟁이 뒤따랐다. 카메네프를 비롯한 일단의 지도부가 레닌의 “신” 볼셰비즘에 맞서겠다며 스스로를 “구 볼셰비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4월 테제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제시해달라는 당원들의 요청으로 이 때 레닌은 <전술에 관한 편지>와 이어서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부제: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를 제출했다. 4월 14-22일의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와 뒤이은 24-29일의 7차 전 러시아 협의회가 내부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레닌에게 이 투쟁은 혁명의 명운이 걸린 긴박한 순간에 신속히 “구 볼셰비즘”을 “고물보관소에 수용해”버리고, 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을 이루어내는 투쟁이었다. 그런 만큼 이러한 레닌의 투쟁은 당내 “구 볼셰비키”로부터의 쓰디쓴 저항에 부닥쳤다. 카메네프는 4월 7일 <<프라우다>>에 레닌의 <테제>를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달았다. “레닌 동지의 일반적 도식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도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료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서는 이 글이 “레닌 개인의 견해”이며, 당의 견해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역사적인 볼셰비즘 노선을 청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레닌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볼셰비키의 슬로건과 사상이 옳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역사에 의해 확증되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사태는 누구도 예상 못한 다른 꼴을 취했다. 사태는 누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독특하고 더 특이하며 더 복잡하다.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새로운 생생한 현실의 특수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대신에 암송한 공식들을 분별없이 되뇜으로써 우리 당의 역사에서 그리도 개탄스런 역할을 한 것이 이미 한 두 번이 아닌 저들 ‘구 볼셰비키’를 닮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어서 레닌은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러시아 혁명에서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이것이야말로 생활에 의해 이미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다. 그 공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버렸다. 생활은 그것을 공식의 왕국에서 현실의 왕국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것에 뼈와 살을 입혔고 그것을 구체화시켰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수정한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레닌전집 66권 <<4월 테제>>, 양효식 옮김, 아고라, 63-4쪽)
당의 모든 지구 및 세포 단위들에서 3주간의 논쟁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레닌의 ‘쇄신된 볼셰비즘’이 최종적 다수를 획득했다. 이제 혼란과 동요를 뒤로 하고 당은 모든(全)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즉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체하는) 제2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타도를 향한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방침 쪽으로 대중을 전취하기 위해 나섰다. 이미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경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모순, 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을 내걸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한 “구 볼셰비키” 노선은 고물보관소에 영구 수용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그것도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의 형태로 이미 “파리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정세에서) 여전히 민주주의 독재와 최소강령의 틀 안에 혁명을 한계 지으려 하고, 사회주의 혁명과의 사이에 차단벽을 쌓으려 한 “구 볼셰비즘”이 폐기, 극복된 것이다. 당이 이제 노동자권력/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의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무장했다.
4월 테제와 그 후속 글 <전술에 관한 편지>,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등은 10월 혁명으로의 길을 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획기적인 성취이자, 세계사회주의혁명으로 가는 길에 가로놓인 낡은 관성과 한계에 대한 단절과 돌파를 대표한다. 4월 테제를 둘러싼 당내 논쟁, 당의 재무장을 위한 레닌의 투쟁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새기기 위해 우리는 이 논쟁에서 정세인식/전술방침 상의 차이가 어떠한 전략 규정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특히 필요한 것은, 4월 테제의 의의를 최소화하고,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 · ‘돌파’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단지 ‘전술상의 착오’를 바로잡는 수준의 논쟁일 뿐이었다는 식으로 덮어버리려는 ‘평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의 원조가 이른바 ‘스탈린 당사’, 즉 1939년 스탈린의 “직접적 지도” 하에 작성된 악명 높은 <<소 교정>>(小 敎程 Short Course : 전 연방 공산당사 소교정)이다. 이 날조된 볼셰비키 당사는, 처음부터 스탈린은 논쟁에서 레닌의 편에 서 있었던 것으로 그려놓고, 논쟁은 단순히 ‘일시적인’ 전술 차이에 불과했던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또 4월 테제는 볼셰비키에게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기보다는 1905년 혁명 이래 줄곧 볼셰비키의 전략노선을 대표했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그 ‘돌파’, ‘쇄신’의 의의를 부정하고 있다.
먼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세력 사이에 일시적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는 이러한 이중권력 정세를 소비에트 노동자들은 어떻게 이해했는가? 노동대중은 소비에트를 단지 투쟁의 무기로뿐만 아니라 통치권력으로 보았다. 단순히 노동조합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협조적인 소비에트 집행부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 [SR 에스에르])가 불어넣고 있는 환상, 즉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 아래 부르주아지와의 협력관계를 이루어 이 혁명을 완수해나갈 수 있다는 환상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했다.
2월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이와 같은 이중권력 상황은 볼셰비키 당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1905년 혁명 이래 품어 왔던 혁명 전략 및 예측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멘셰비키와 달리 볼셰비키는 올바르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는 반혁명적 역할을 할 뿐으로, 민주주의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장애물로 나설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끌어낸 결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당이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농민과 동맹하여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주 권력인 차르 군주제를 타도하는 무장봉기를 이끌어 노동자·농민의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인데, 구체제를 겨냥하여 이 정부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적 조치들로 인해 이 임시혁명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농민과의 동맹을 통한)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화에서 보듯이, 이 정부가 취할 조치들은 1903년 강령의 최소강령 부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토대를 건드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강령의 최소요구 부분은 멘셰비키도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민주공화제’,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가 그 주요 항목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어떤가?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가 ㅡ 노동자 당과 농민 대표자가 아니라 ㅡ 담당하고 있는 정부가 아닌가. 이 임시정부는 우리의 전략 속에서 만들어내려고 했던 그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전히 현 국면은 무장봉기에 의해 그것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인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해야 하는 상황인 것인가?). 예측 시나리오에 맞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노동자와 병사가 만들어낸 권력은 민주공화제를 넘어서는 구조들을 취하고 있다. 실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그리고 그 지휘 하에 있는 민병과 공장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구현한 국가(“코뮌 국가”)의 맹아다. 그런데 이런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대의원 다수파로서 멘셰비키당 · 에스에르당에 의해 소비에트가 주도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자의 다수자가 지지하는 정부를 겨냥하여 봉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되는데, 우리가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를 지지하는 블랑키주의자가 아닌 이상 이건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맞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우리 예측 공식 의 핵심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위원회는 3월 4일, “임시정부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범민주 인민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 임시정부의 권력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임시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과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내 지배적인 멘셰비키 방침에 그 어떤 직접적 도전도 하지 않겠다는, 그냥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집행위원회 내 볼셰비키 위원들 대부분이 정부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한 멘셰비키의 결의안에 찬성투표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페트로그라드 시의 산업 중심지인 비보르그 지구 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대한 불신을 표하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 성명 역시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담고 있었다. 쉴리아프니코프, 몰로토프, 잘루츠키로 구성되어 있는 재외 중앙위원회 러시아 사무국은 좀 더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처음에 이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당들로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 당들 간의 협정으로 (위로부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대체한다는 이러한 구상은 곧바로 거부되었다. 멘셰비키와 에스에르는 노동자 정부나 노동자·농민 정부 같은 것은 지금 필요 없다며, 부르주아 당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를 지지하길 원했다. 나아가 멘셰비키당 다수파 (원래는 반전 입장이었던)는 이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혁명의 성과물을 지키는 전쟁이 되었다며 “전쟁 반대”를 내리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슐리아프니코프 등의 러시아 사무국은 왼쪽으로 더 이동하여 3월 22일에는 소비에트를 새로운 국가권력의 맹아라고 성격규정을 내리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레닌이 스위스에서 발전시키고 있던 입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반면,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국은 볼셰비즘 내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었다. <<프라우다>> 3월 7일의 논설에서는 “우리로서는, 지금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타도가 아니라, 전제정과 봉건제의 타도다”라고 선언했다. 또 카메네프와 함께 <<프라우다>> 공동 편집자인 스탈린은 이렇게 썼다. “임시정부는 실제로 혁명적 인민이 쟁취한 성과물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 현재로선 부르주아 층의 퇴출을 재촉하여 사태를 강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언젠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러한 지지 입장은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급기야 전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 3월 15일에 편집국의 카메네프는 <<프라우다>>의 지면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내걸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 우리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카메네프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군대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가장 정신 나간 정책일 것이다. 이것은 평화의 정책이 아니라, 자유 인민으로서는 혐오감을 느끼며 거부할 노예제의 정책이 될 것이다. 인민은 총탄에는 총탄으로, 포탄에는 포탄으로 응수하며 당당히 자신의 진지를 지킬 것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혁명의 무력을 해체시키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날 <<프라우다>> 지면에서는 스탈린이 ‘전쟁 중지!’라는 공허한 외침은 혁명적 군대의 해체를 요구하는 슬로건이 될 수 있다며, 직접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평화협상 개시에 앞장서도록 “요구”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해결책은,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즉각적인 평화협상 개시에 동의한다고 임시정부가 선언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은 집회와 시위를 배치하여 임시정부에게, 모든 교전국을 즉각 평화협상에 착수하도록 끌어내는 일에 공개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비판했듯이, “이 정부, 자본가의 정부에 제국주의적이기를 그만두라는 식의 환상을 심는 ‘요구’”로서, 사실상 임시정부 지지를 전파하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주장하는 논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시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향후 수립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최적의 투쟁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현재로선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카메네프-스탈린 지도라인에 의해 볼셰비키는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왼쪽 날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3월 17일에는, 2월 봉기에서 선봉 역할을 한 비보르그 지구의 평당원 노동자 세포들이 프라우다 편집국을 당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럼에도 당내에 협조주의 조류, 즉 임시정부를 수용하고 멘셰비키 · 에스에르의 소비에트에 대한 통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투쟁을 제한, 축소하는 조류 (이후의 용어로 말하면, ‘인민전선’주의적 조류)가 당 내에 확대되고 있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때 레닌이 스위스에서 긴급하게 써 보낸 <먼 곳에서 보낸 편지> ㅡ 그 주요 지침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일절 지지하지 말 것, 전쟁 반대 당론을 바꾸지 말 것, ‘전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을 위해 투쟁할 것 ㅡ 는 <<프라우다>> 편집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보내온 편지 네 편 중 하나만이 <<프라우다>>에 실렸는데, 그것도 중요한 내용이 삭제되는 등 편집된 상태로였다. 그 삭제된 내용 중 하나는, 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자는 그 누구든 “노동자에 대한 배반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 평화와 자유의 대의에 대한 배반자”로 낙인찍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레닌이 유명한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귀국하여 핀란드 역에 도착했을 때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당 지도부가 레닌을 맞으러 나왔다. 그 때 지도부의 일원으로 함께 나온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지도자 라스콜니코프는 레닌이 카메네프에게 보낸 첫 ‘인사’를 이렇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당신이 <<프라우다>>에 쓴 거, 그 쓰레기는 뭡니까? 우리가 몇 호 보면서 정말로 당신 욕을 했소.”
레닌은 당 회합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그의 소리를 들으러 핀란드 역에 나온 군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인 멘셰비키당의 치헤이제가 공식 환영단을 대표하여 레닌에게 “민주파 대열의 결속”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레닌은 둘러싼 군중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전 세계 사회주의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곧 유럽 자본주의 전체가 끝장날 것이다. 여러분이 이룩한 러시아 혁명이 그 길을 닦았고 새 시대를 열었다. 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다음날 4월 4일, 볼셰비키 당 소속 소비에트 대의원 70명이 모인 타우리드 궁 회합에서 레닌은 처음으로 4월 테제를 낭독했다. 이때의 반응을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회상>>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동지들은 일순 좀 당황했다. 많은 동지들이 일리치 [레닌]가 너무 투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아직 사회주의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는 심지어 한 친구에게 “일리치가 미쳐버린 걸로 보일까봐 두렵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같은 날 오후, 레닌은 지노비에프의 요청으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합동회의에서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연설했는데, 이 회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재통합 전망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것으로서 카메네프-스탈린 라인이 추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였다. 멘셰비키 쪽에서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미치광이의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의 지지도 냉담했고, 회의에 배석했던 콜론타이만이 레닌의 입장에 찬성 발언을 했다.
당내 투쟁이 뒤따랐다. 카메네프를 비롯한 일단의 지도부가 레닌의 “신” 볼셰비즘에 맞서겠다며 스스로를 “구 볼셰비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4월 테제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제시해달라는 당원들의 요청으로 이 때 레닌은 <전술에 관한 편지>와 이어서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부제: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를 제출했다. 4월 14-22일의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와 뒤이은 24-29일의 7차 전 러시아 협의회가 내부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레닌에게 이 투쟁은 혁명의 명운이 걸린 긴박한 순간에 신속히 “구 볼셰비즘”을 “고물보관소에 수용해”버리고, 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을 이루어내는 투쟁이었다. 그런 만큼 이러한 레닌의 투쟁은 당내 “구 볼셰비키”로부터의 쓰디쓴 저항에 부닥쳤다. 카메네프는 4월 7일 <<프라우다>>에 레닌의 <테제>를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달았다. “레닌 동지의 일반적 도식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도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료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서는 이 글이 “레닌 개인의 견해”이며, 당의 견해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역사적인 볼셰비즘 노선을 청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레닌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볼셰비키의 슬로건과 사상이 옳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역사에 의해 확증되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사태는 누구도 예상 못한 다른 꼴을 취했다. 사태는 누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독특하고 더 특이하며 더 복잡하다.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새로운 생생한 현실의 특수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대신에 암송한 공식들을 분별없이 되뇜으로써 우리 당의 역사에서 그리도 개탄스런 역할을 한 것이 이미 한 두 번이 아닌 저들 ‘구 볼셰비키’를 닮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어서 레닌은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러시아 혁명에서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이것이야말로 생활에 의해 이미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다. 그 공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버렸다. 생활은 그것을 공식의 왕국에서 현실의 왕국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것에 뼈와 살을 입혔고 그것을 구체화시켰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수정한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레닌전집 66권 <<4월 테제>>, 양효식 옮김, 아고라, 63-4쪽)
당의 모든 지구 및 세포 단위들에서 3주간의 논쟁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레닌의 ‘쇄신된 볼셰비즘’이 최종적 다수를 획득했다. 이제 혼란과 동요를 뒤로 하고 당은 모든(全)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즉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체하는) 제2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타도를 향한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방침 쪽으로 대중을 전취하기 위해 나섰다. 이미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경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모순, 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을 내걸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한 “구 볼셰비키” 노선은 고물보관소에 영구 수용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그것도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의 형태로 이미 “파리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정세에서) 여전히 민주주의 독재와 최소강령의 틀 안에 혁명을 한계 지으려 하고, 사회주의 혁명과의 사이에 차단벽을 쌓으려 한 “구 볼셰비즘”이 폐기, 극복된 것이다. 당이 이제 노동자권력/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의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무장했다.
4월 테제와 그 후속 글 <전술에 관한 편지>,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등은 10월 혁명으로의 길을 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획기적인 성취이자, 세계사회주의혁명으로 가는 길에 가로놓인 낡은 관성과 한계에 대한 단절과 돌파를 대표한다. 4월 테제를 둘러싼 당내 논쟁, 당의 재무장을 위한 레닌의 투쟁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새기기 위해 우리는 이 논쟁에서 정세인식/전술방침 상의 차이가 어떠한 전략 규정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특히 필요한 것은, 4월 테제의 의의를 최소화하고,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 · ‘돌파’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단지 ‘전술상의 착오’를 바로잡는 수준의 논쟁일 뿐이었다는 식으로 덮어버리려는 ‘평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의 원조가 이른바 ‘스탈린 당사’, 즉 1939년 스탈린의 “직접적 지도” 하에 작성된 악명 높은 <<소 교정>>(小 敎程 Short Course : 전 연방 공산당사 소교정)이다. 이 날조된 볼셰비키 당사는, 처음부터 스탈린은 논쟁에서 레닌의 편에 서 있었던 것으로 그려놓고, 논쟁은 단순히 ‘일시적인’ 전술 차이에 불과했던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또 4월 테제는 볼셰비키에게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기보다는 1905년 혁명 이래 줄곧 볼셰비키의 전략노선을 대표했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그 ‘돌파’, ‘쇄신’의 의의를 부정하고 있다.
4. 인민전선인가, 노동자 통일전선인가?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인가, 소비에트권력/피티독재인가?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인가, 소비에트권력/피티독재인가?
<4월 테제>의 전술에 관해 설명하는 두 번째 편지인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1917년 2〜3월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출발점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 종결로의 제1보를 내딛었다. 제2보, 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것만이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적 규모로의 “전선 돌파”, 자본의 이익이라는 전선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선을 돌파함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평화의 축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이러한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긴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전집 66권 <<4월 테제>>, 양효식 옮김, 아고라, 101쪽)
여기에 레닌의 총괄적인 전략 규정이 있다. 제2의 혁명으로, 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완료로서,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할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가 될 것이다.)
이 점은 앞서 4월 테제에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4월 테제>, 레닌전집 66권 <<4월 테제>>,11쪽)
이러한 이행의 전략 규정은 주관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구 볼셰비키의 비판처럼,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공상적인 “도식”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레닌의 전략 규정의 전제는 지금 러시아에 존재하고 있는 코뮌 형 국가, 즉 노동자·병사·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다. 첫 번째 혁명이 만들어낸 (그리고 “명백히 인민 다수의 직접적인 조직”인) 이 소비에트가 이행의 객관적 근거이자 물질적 담보다. 소비에트는 계급들의 상호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구현하고 있지만, 국가 유형으로는 이미 민주주의 독재를 넘어선, “경찰, 군대, 관료 등 억압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 코뮌국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맹아다.
“소비에트는 국가의 새로운 형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유형이”다. “우리 혁명 속에서 성장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다.
“의회 부르주아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아주 쉽다. 군대, 경찰, 관료 등 억압 기구 전체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 코뮌과 노동자·병사·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는 이 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다.”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는 파리 코뮌이 만들어낸, 그리고 마르크스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라고 이름 붙인 국가 유형을 재현하고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같은 책 <<4월 테제>>, 102-4쪽)
노동자권력의 정치적 틀거리로서 코뮌 형 국가의 기초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중권력>에서는 이 점을 좀 더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혁명에 대해 서로에게 천 번이고 축하를 보내지만,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소비에트가 존재하고 있는 한에서,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인 한에서 러시아에는 파리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진실을, 그들은 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한에서”라는 단어를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맹아적인 권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력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와의 직접적인 협정에 의해, 그리고 일련의 사실상 양보에 의해 스스로 부르주아지에게 진지를 내주었고, 지금도 내주고 있다.
왜인가?.... 원인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자각과 조직화가 불충분한 것에 있다.” (<이중권력>, <<4월 테제>>, 53쪽)
2월 봉기를 주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소비에트를 만들어 “군대, 경찰, 관료 등 억압 기구 전체를 분쇄해서 없애버리”고 (적어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권력을 쥐었지만,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소비에트로 모든 권력을 이양하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는 것을 혁명 발전의 일반적인 전략 목표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주관주의적인, 머릿속에서 그려낸 ‘전략 구상’이 아니다. 레닌의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요구를, 예를 들어 ‘영구혁명론’을 처음 정식화한 파르부스의 “차르 반대, 노동자 정부!” 슬로건과 비교해 보라. 소비에트 같은 인민적 권력 근거를 전제하지 않음으로써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 요구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슬로건은 확실히 주관주의적 위험, 또는 블랑키주의적 모험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의 ‘소비에트 권력’/ ‘코뮌국가’ 요구는 명백히 노동자·농업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에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다수자를 건너뛰지 않는, “다수자의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지배와 대중의 활동성을 완전하게 보증”하는, 즉 이러한 “대표 소비에트 내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귀착”되는 요구다.
이와 같이, 권력을 임시정부에 양도하는 바람에 현재 맹아적인 국가권력으로 머물렀지만, 그 유형에서는 이미 파리코뮌 형 국가 (“인민으로부터 분리된 군대와 경찰을 인민 자신의 직접 무장으로 대체하는 국가”)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존재가 바로 이행의 물질적 담보다.
“실생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 부르주아지의 독재와 서로 얽히게 했다. 다음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지만,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충분히 조직되고 각성되어 있지 못하다. 프롤레타리아트를 각성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전국에 걸쳐서 이러한 대표 소비에트가 필요하며, 이것은 생활의 요구다. 이 이외의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부르주아지가 바라는 것과 같은 노동조합 조직이 아니다. 인민은 그것을 다르게,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보고 있다. 인민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통치권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인민은, 전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승리에 있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 아래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 국가 유형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4월 테제>>, 258쪽)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맹아적인 통치권력을 본연의 통치권력으로 성장 전화시키기 위해 남는 것은 ‘충분한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라는 과제다.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임시정부와 뒤얽혀서 그 부속물이 되고 있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타도/대체하는 소비에트로 탈바꿈시켜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를 소비에트 대중 속에서 이루어내는 과제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맹아’ 딱지를 떼고 실제 노동자권력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하기 위해 지금 충족시켜야 할 이 과제는 어떠한 구체적 정세를 매개로 하여, 어떠한 전술적 임무로 제기되는가?
“지금 일정에 올라 있는 것은 이제 별개의 새로운 임무다. 이 독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내부의 분립, 즉 프롤레타리아적 분자 (조국방위주의에 반대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에 찬성하는 국제주의적, ‘공산주의적’ 분자)와 소경영주적 또는 소부르주아적 분자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사회주의혁명가당, 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를 분리시키는 임무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생활에 뒤처진 사람이며,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 전 "볼셰비키" 고물보관소 ("구 볼셰비키" 보관소라 불러도 무방하다)에나 수용해야 마땅하다.” (<전술에 관한 편지>, 64쪽)
“구 볼셰비즘을 버려야 한다. 소부르주아지의 방침과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침을 분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혁명적 인민이라는 문구는 케렌스키에게는 어울리지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차르 니콜라이가 정리되어 버린 오늘에는, 혁명가라는 것은, 아니 민주주의자라는 것조차도 대수로울 게 없다. ‘혁명적 민주주의 파’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것은 공문구다. 그것은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덮어 가리기나 하지, 들춰내지 않는다.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을 이들 모순의 존재에 눈뜨게 해야 하지, 그것을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를 분별해야 하며,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든가, "혁명적 인민"이라든가 하는 말들은 케렌스키에게 줘버려야 한다. 러시아의 민주주의 파는 제국주의자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62, 263쪽)
소비에트 내에서 ‘혁명적 인민’이라는 문구 하에 소경영주·소부르주아지와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 간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이 덮어 가려지고 있다. 부유한 농민은 제국주의 약탈 전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여겨 임시정부의 전쟁 계속 결정과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조국방위주의에 찬성한다. 빈농 (농민층의 다수를 이루는 반[半]프롤레타리아)과 프롤레타리아트 (농업노동자 포함)에게 이 전쟁은 불필요하며, 그들의 계급 이익과 이 전쟁은 양립할 수 없다.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의 미비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대중을 바로 이러한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에 눈 뜨게 해야 한다.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눈에 한 묶음으로 처리되고 있는 국제주의자·공산주의자와 조국방위주의자·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사회제국주의자를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구 볼셰비키”를 자칭하는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이러한 ‘분리, 분별시키는 임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며,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단계를 건너뛰어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거냐’며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에 눈뜨게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간판 뒤에 숨고자 한다.
여기서 이러한 ‘분리, 분별시키는 임무’가 제기되는 구체적 정세,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를 레닌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좀 더 살펴보자.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의 단독 권력에 찬성한다.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는 노동자 · 농업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에 一 모험주의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명료하게 하고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가능해지는 단독 권력에 一 찬성한다.
소부르주아지 一 “사회민주주의자”, 사회주의혁명가당 등등 一 는 동요하며, 그와 같이 동요하는 것에 의해 이 명료화와 해방을 방해하고 있다.
이상이 우리의 임무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의 계급 세력관계다.” (<이중권력>, 56쪽)
“현 시기 평가”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모순을 일정 해결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모순, 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구 볼셰비키”를 비판한다.
“카메네프 동지의 오류는 1917년에 이르러서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과거만을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그 미래는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와 소경영주의 이해관계와 정책은 현실에서 이미 엇갈려 버렸기 때문이다. ‘조국방위주의’ 문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같은 극히 중요한 문제들에서도 이해관계와 정책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77쪽)
“우리가 1905년에 말한 것을 지금 반복해서 말하고, 농촌에서의 계급투쟁 [부농 대 빈농·농업노동자 간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대한 배반이다.
지금도 벌써 우리는 토지 문제의 해결을 제헌의회 소집 시까지 기다리려는 경향을 수많은 농민대회의 결정 속에서 발견하는데, 이것은 카데츠 쪽으로 기울고 있는 부유한 농민의 승리다.”
“우리의 임무는 이 소부르주아적 수렁으로부터 계급적 방침을 떼어내는 것이다.”
“소부르주아지는 완전히 그들에게 굴복했다. 만약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떼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53쪽)
또,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기본 슬로건이었던 1905년과 비교하여 1917년 지금의 정세 조건은 어떻게 다른가?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낡은 표현. 그러나 어떤 혁명을? 1905년의 객관적 정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유일한 혁명적 분자였던 반면.... 오늘의 조국방위주의는 농민이 소부르주아 전술로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것은 의미를 잃었다.”
“볼셰비즘 정치로부터 새로운 방침이 태어나고 있다. 소부르주아지와 대부르주아지가 결합했다. 우리는 제계급의 이익의 상충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농업노동자 농민과 소유자 농민은 서로 다른 입장이다. 전자는 제국주의 전쟁에 틀림없이 반대다. 후자는 조국방위주의에 찬성이다.
조국방위주의는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대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도시에서의 노동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빈농에게는 이 전쟁은 불필요하다. 이 계급은 전쟁의 반대자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61-2쪽)
“현재 러시아에서 지금 거의 모든 나로드니키 당들 (인민사회주의자, 트루도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파 사회민주주의자의 기회주의적 당 (조직위원회파, 치헤이제, 체레텔리 등)과 나아가 대다수의 무당파 혁명가를 사로잡고 있는 이른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그 계급적 의의에서 볼 때,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이윤을 끌어내고 있는 소부르주아지, 소경영주, 부농의 이익과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82쪽)
이러한 정세, 이러한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 속에서 구 볼셰비키는 여전히 농민이 권력에 올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할” 가능성만을 말하고, “부르주아지와 농민 간에 협정, 또는 계급협조가 존재함을 드러내주는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러면서 구 볼셰비키는 ‘농민과의 동맹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냐’, ‘여전히 가능성이 남아 있는 농민혁명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거냐’며, 소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분리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그와 같은 미래의 단계 [농민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농민이 부르주아지와 협정을 맺고 있는 현재에 자신의 의무를 망각한다면, 그는 소부르주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부르주아지를 신뢰하라고 설교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69쪽)
농민이 임시정부의 꼬리를 이루고 있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부르주아 정부의 부속물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정세 속에서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 가능성을 내세워 소부르주아지를 신뢰하라고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투쟁을 제한, 억제하고 소비에트를 임시정부에 계속 묶어두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생활에 뒤처진 사람이며,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64쪽)
이렇게 하여 구 볼셰비키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소부르주아 카우츠키 파로, “혁명적 민주주의파”의 좌익으로 되어버렸고, 과거에 혁명적 전술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구 볼셰비키의 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계급협조 인민전선 전술로 되어버렸다. (물론, 구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처럼 임시정부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는 아니다. 구 볼셰비키의 ‘지지’는 현 시기 전술로서의 지지다. 구 볼셰비키는 향후 농민혁명에 의해 임시정부를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한다는 가능성을 전략 시나리오 안에 포함해두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한다는 범위 내에서의 독재지, 그 틀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의 ‘전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독재는 아니다. 구 볼셰비키에게 이러한 ‘전화’란 “단계를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려는” 모험주의적인 발상이다. 구 볼셰비키의 전략 시나리오에서 두 독재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 ‘단계’로, 두 역사적 시대로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레닌은 구 볼셰비키기가 말하는 ‘농민혁명 → 소부르주아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지금도 가능한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 만약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소부르주아적 분자로부터 “즉각, 단호히, 돌이킬 수 없이 프롤레타리아적·공산주의적 분자를 분리시켜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에도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 당을 분리시키는 것에 의해서만이, 이들 소부르주아의 소심함으로부터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을 감행함으로써만이 그것은 가능해진다.”)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적 분자(방침)를 분리, 분별시키는 임무를 규정하는 현 시기 정세 조건은 다름 아닌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대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 간 것”, “농민이 소부르주아 전술로 넘어간 것”이다. 이 정세의 “특수성”을 레닌은 다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 들끓고 있다. 10년간이나 정치적으로 잠자고 있어 왔고, 차리즘의 끔찍한 압제와 지주, 자본가를 위한 고역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짓눌려 있던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깨어 일어나 정치에 돌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대부분은 소경영주, 소부르주아고,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러시아는 모든 유럽 나라들 중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다.
거대한 소부르주아적 파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있고, 계급적으로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쪽수의 힘으로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압도하고 있다. 즉 아주 광범위의 노동자에게 소부르주아적인 정치적 견해를 전염시키고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평화와 사회주의의 최악의 적인 자본가를 불합리하게도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적인 태도, 이것이 러시아의 현 시기 대중의 정치를 특징 짓는다. 이것은 유럽의 모든 나라 중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의 사회경제적 토양 위에서 혁명적 속도로 성장한 열매다. 이것은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와의 "협정"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형식적 협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사실상의 지지, 암묵적 협정,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적인 권력 양도임을 강조해둔다), 구치코프들에게는 두툼한 살코기 一 진짜 권력 一를 주고, 소비에트에게는 단지 케렌스키들의 말뿐인 약속과 존경 (잠시 동안의), 아첨, 미사여구, 맹세, 굽실거리기만을 준 그 협정의 계급적 기초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수적으로 힘이 부족하다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부족하다는 것, 이것이 동전의 이면이다.”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거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 소부르주아적 파도의 가장 중요한, 가장 두드러진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러시아 혁명이 더 한층 전진하고 성공하는 데 최악의 적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92-3쪽, 97쪽)
레닌은 이와 같은 계급 세력관계가 어떠한 종류의 전술을 요구하는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러한] 실제 정세의 특수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필요한 현 시기 전술의 특수성이 나온다. 이 특수성은 일차적으로 ‘혁명적 민주주의 미사여구의 설탕물에 식초와 담즙을 붓는 것’을 요구한다. 비판 작업, 사회주의혁명가당이나 사회민주당 등 소부르주아적 당들의 오류를 설명하는 작업, 의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당, 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을 훈련시키고 결속시키는 작업, ‘전반적인’ 소부르주아적 도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는 작업, 이것이 바로 그 식초와 담즙을 붓는 과업이다.”
“이것은 선전 작업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실천적인 혁명적 작업이다. 왜냐하면 혁명이 정지해버리고 공문구에 빠지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외부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의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혁명의 전진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과 싸우는 것에 의해서만 (그런데 이 싸움은 오로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지적 설득에 의해, 생활의 경험을 보이는 것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횡행하고 있는 혁명적 공문구의 광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의식도, 대중의 의식도, 현장에서의 대중의 과감하고 결연한 창의도 진정으로 북돋을 수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94-5쪽)
정세의 특수성에서 나오는 현 시기 전술의 특수성이란, 달리 말하면 경찰·상비군·관료 등 억압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 맹아적 통치권력으로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장’ 임시정부 타도에 착수할 수 없는, 무장봉기를 ‘직접적’ 일정으로 올릴 수 없는, 따라서 당장은 소부르주아적 도취로부터 깨워내는 쓰디쓴 “비판 작업”, “참을성 있게 오류를 설명하는 일”, “분리, 분별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는, 그러한 특수성이다. 우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도취를 깨는, 사실상의 임시정부 지지인 인민전선 “협정”을 깨는, 그리하여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인 당, 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이 분별정립하고 소비에트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으로 다수자를 획득하기 위해 “조국방위주의적 유행병”과 끈질기게 투쟁하는 것을 요구하는, 그러한 종류의 전술 (몇 년 뒤 초기 코민테른에서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로 정립된)이다.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죽은 공식을 부여잡고 매달리느라 지금 존재하는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이 같은 과업을 방기한다. 소비에트 내에서 “조국방위주의적·소부르주아적인 ‘대중적’ 도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끌어내 분별정립 시키는, 그러한 관건적인 임무”에 반대함으로써 소비에트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지배에 내맡기고 있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부속물로 남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당장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문제를 제출하여 그토록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 볼셰비키는 ‘당장 타도’ 아니면, ‘(비판적) 지지’로 문제를 “단순하게” 제출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고 싶어 하는” 블랑키주의적 위험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당장은 인민전선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레닌은 대답은 단호하고 명료하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게 하는 데는 살아 있는 힘이 소비에트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본가가 인민을 기만하여 계속하고 있는 이 전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나라가 지금 파멸의 벼랑에 서 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활로는, 사회주의혁명 이외에는 없다. 정부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모두가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 의거하고 있는 한, 그것을 "간단히" 타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수자를 획득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것을 타도할 수 있고, 또한 그 때는 반드시 타도해야만 한다. 전진하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할 것인가, 이 이외의 길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58-9쪽)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수자를 획득하는” (“살아 있는 힘이 소비에트를 밀어 올”리는)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을 통해 소비에트를 바꿔내는, 즉 임시정부와 뒤얽혀 그 부속물이 되고 있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타도/대체하는 소비에트로 재편하는 길만이 단 하나의 활로다. 이 길만이 맹아적인 노동자권력에서 실제 노동자권력으로의 이행, 코뮌 국가로의 이행을 보장하는 길이다. 그리고 전쟁으로부터, 임박한 파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소비에트 내부에서,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의 신봉자 대중 속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끈질기게 선전하자는 것, 그 자체야 구 볼셰비키로서도 반대할 부분은 없을 것이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선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조급하게 임시정부 ‘당장 타도’에 착수하자거나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자고 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문제는 선전의 방향, 내용이다. 어떤 방향, 무슨 내용인가? 레닌은 “자본의 이익과 이 전쟁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설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자본을 타도하지 않으면,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전 국가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옮길 필요를 선전”해야 한다고 한다.
“자본가들에 의해 시작된 전쟁을... 끝내는 것은, 자본가의 이윤을 보호하는 데 실제로 이익을 갖지 않는 계급, 진정으로 자본의 압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 반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중으로 전 국가권력을 이양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 이 진실을 우리 당은 참을성 있게, 끈덕지게 인민에게 설명할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85쪽)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코뮌국가로 대체해야 할 필요를 설명, 선전하자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이 내용 쪽으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 쪽으로 다수자 전취에 볼셰비키 당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구 볼셰비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며, 여전히 “단계를 건너뛰어”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험주의적 전술이다. “블랑키주의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며, 다수자의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지배와 대중의 활동성을 완전하게 보증하고 있”는 “명백히 인민 다수의 직접적인 조직”인 소비에트 내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노동자 통일전선의 과정을 거치자고 하는 데도 여전히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라고 한다. “이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쟁으로 귀착되는 작업은 블랑키주의의 늪으로 빠져들 염려는 절대로 없는”데 말이다.
구 볼셰비키도 ‘지금 당장’만 아니라면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데는 반대 입장이 아니다. 문제는 레닌이 그 타도/대체의 결과물로 상정하고 있는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코뮌국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 볼셰비키는 절대 반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분간하지 못하고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려 한 오류를 범했고 그래서 패배한 것이 파리 코뮌이 아닌가. 지금 레닌의 코뮌국가 요구는 그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자는 것 아닌가. 이러한 구 볼셰비키의 반론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카메네프 동지는 ‘참을성 없이’ 너무 나아간 나머지 파리 코뮌이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다는 식의 부르주아적 편견을 반복해서 표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코뮌은 불운하게도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데 너무 더뎠다. 코뮌의 진정한 본질은 흔히 부르주아들이 말하는 데 있지 않다. 특별한 유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 거기에 코뮌의 본질이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그러한 국가가 이미 생겨나고 있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그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78쪽)
레닌의 ‘코뮌으로의 이행’ 요구는 아무 전제도, 근거도 없이 무매개로 무언가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현실에서 “이미 생겨나고 있”는 것, 그것을 전제로 해서, 즉 현재 존재하는 소비에트를 전제로 해서, 싹으로 해서 그로부터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에트의 존재는 ㅡ 임시정부에 권력을 양도하는 바람에 맹아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ㅡ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경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 볼셰비키는 토지 재분배를 비롯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들 중 많은 것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혁명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여전히 권력체제는 그러한 과제에 걸맞게 민주주의 독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주의적 과제에 조응하지 않는 코뮌국가 요구는 결국 ‘단계를 건너뛰어’ 농민을 배제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구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노동조합 지도자인 미하일 톰스키는 4월 테제에 반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독재는 우리의 주춧돌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권력을 조직해야 하며, 이것을 코뮌으로부터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혼자만의 권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구 볼셰비키가 “사실을, 실재하는 소비에트의 의의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고, 죽은 도식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소비에트란 대체 무엇인가, 소비에트는 그 유형으로 볼 때 의회공화제보다도 한층 더 고도의 것인가 아닌가, 인민에게 더 유용하고, 더 민주주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투쟁에 더 적합한 것인가, 예를 들어 식량 부족 등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더 적합한 것인가 아닌가. 이와 같은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식의 공허한, 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 현학적인 죽은 문제로 주의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79쪽)
구 볼셰비키는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을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어제의 도식에서 찾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지 못해서 여전히 과제가 미해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이중권력 정세, 그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임시정부에게 넘겨준 정세,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에게서 떨어져나가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간 정세 등, 이러한 실제 사실, 현실의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는 그러한 민주주의적 과제조차도 전 국가권력이 소비에트의 손에 쥐어지는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 시기 모든 정세조건은 오직 노동자와 빈농의 손에 권력을 인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도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쟁과 자본가의 사보타지로 인한 당장의 기근과 닥쳐온 경제 붕괴와 전쟁 참화 앞에서 임시정부는 빵도, 토지도, 평화도 그 어느 것도 인민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다. 민주주의적 과제 등 최소요구와 ‘전쟁 중지’를 실행하고, 나아가 임박한 파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 카르텔 등 독점 금융단체에 대한 통제와 국유화를 도입하는 등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비에트 권력뿐이다. 민주주의적 과제 등 최소강령의 실행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걸음들[조치들]”이 서로 맞물려서 더 이상 그 양자를 시간적 선후(先後)의 과제로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소비에트로 대체하고, 맹아적 권력에서 본연의 권력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 모든 것은 가능하다. “전진하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할 것인가, 이 이외의 길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59쪽)
“1917년 2〜3월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출발점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 종결로의 제1보를 내딛었다. 제2보, 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것만이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적 규모로의 “전선 돌파”, 자본의 이익이라는 전선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선을 돌파함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평화의 축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이러한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긴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전집 66권 <<4월 테제>>, 양효식 옮김, 아고라, 101쪽)
여기에 레닌의 총괄적인 전략 규정이 있다. 제2의 혁명으로, 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완료로서,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할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가 될 것이다.)
이 점은 앞서 4월 테제에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4월 테제>, 레닌전집 66권 <<4월 테제>>,11쪽)
이러한 이행의 전략 규정은 주관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구 볼셰비키의 비판처럼,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공상적인 “도식”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레닌의 전략 규정의 전제는 지금 러시아에 존재하고 있는 코뮌 형 국가, 즉 노동자·병사·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다. 첫 번째 혁명이 만들어낸 (그리고 “명백히 인민 다수의 직접적인 조직”인) 이 소비에트가 이행의 객관적 근거이자 물질적 담보다. 소비에트는 계급들의 상호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구현하고 있지만, 국가 유형으로는 이미 민주주의 독재를 넘어선, “경찰, 군대, 관료 등 억압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 코뮌국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맹아다.
“소비에트는 국가의 새로운 형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유형이”다. “우리 혁명 속에서 성장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다.
“의회 부르주아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아주 쉽다. 군대, 경찰, 관료 등 억압 기구 전체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 코뮌과 노동자·병사·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는 이 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다.”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는 파리 코뮌이 만들어낸, 그리고 마르크스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라고 이름 붙인 국가 유형을 재현하고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같은 책 <<4월 테제>>, 102-4쪽)
노동자권력의 정치적 틀거리로서 코뮌 형 국가의 기초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중권력>에서는 이 점을 좀 더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혁명에 대해 서로에게 천 번이고 축하를 보내지만,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소비에트가 존재하고 있는 한에서, 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인 한에서 러시아에는 파리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진실을, 그들은 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한에서”라는 단어를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맹아적인 권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력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와의 직접적인 협정에 의해, 그리고 일련의 사실상 양보에 의해 스스로 부르주아지에게 진지를 내주었고, 지금도 내주고 있다.
왜인가?.... 원인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자각과 조직화가 불충분한 것에 있다.” (<이중권력>, <<4월 테제>>, 53쪽)
2월 봉기를 주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소비에트를 만들어 “군대, 경찰, 관료 등 억압 기구 전체를 분쇄해서 없애버리”고 (적어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권력을 쥐었지만,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소비에트로 모든 권력을 이양하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는 것을 혁명 발전의 일반적인 전략 목표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주관주의적인, 머릿속에서 그려낸 ‘전략 구상’이 아니다. 레닌의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요구를, 예를 들어 ‘영구혁명론’을 처음 정식화한 파르부스의 “차르 반대, 노동자 정부!” 슬로건과 비교해 보라. 소비에트 같은 인민적 권력 근거를 전제하지 않음으로써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 요구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슬로건은 확실히 주관주의적 위험, 또는 블랑키주의적 모험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의 ‘소비에트 권력’/ ‘코뮌국가’ 요구는 명백히 노동자·농업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에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다수자를 건너뛰지 않는, “다수자의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지배와 대중의 활동성을 완전하게 보증”하는, 즉 이러한 “대표 소비에트 내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귀착”되는 요구다.
이와 같이, 권력을 임시정부에 양도하는 바람에 현재 맹아적인 국가권력으로 머물렀지만, 그 유형에서는 이미 파리코뮌 형 국가 (“인민으로부터 분리된 군대와 경찰을 인민 자신의 직접 무장으로 대체하는 국가”)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존재가 바로 이행의 물질적 담보다.
“실생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 부르주아지의 독재와 서로 얽히게 했다. 다음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지만,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충분히 조직되고 각성되어 있지 못하다. 프롤레타리아트를 각성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전국에 걸쳐서 이러한 대표 소비에트가 필요하며, 이것은 생활의 요구다. 이 이외의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부르주아지가 바라는 것과 같은 노동조합 조직이 아니다. 인민은 그것을 다르게,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보고 있다. 인민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통치권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인민은, 전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승리에 있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 아래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 국가 유형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4월 테제>>, 258쪽)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맹아적인 통치권력을 본연의 통치권력으로 성장 전화시키기 위해 남는 것은 ‘충분한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라는 과제다.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임시정부와 뒤얽혀서 그 부속물이 되고 있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타도/대체하는 소비에트로 탈바꿈시켜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를 소비에트 대중 속에서 이루어내는 과제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맹아’ 딱지를 떼고 실제 노동자권력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하기 위해 지금 충족시켜야 할 이 과제는 어떠한 구체적 정세를 매개로 하여, 어떠한 전술적 임무로 제기되는가?
“지금 일정에 올라 있는 것은 이제 별개의 새로운 임무다. 이 독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내부의 분립, 즉 프롤레타리아적 분자 (조국방위주의에 반대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에 찬성하는 국제주의적, ‘공산주의적’ 분자)와 소경영주적 또는 소부르주아적 분자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사회주의혁명가당, 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를 분리시키는 임무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생활에 뒤처진 사람이며,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혁명 전 "볼셰비키" 고물보관소 ("구 볼셰비키" 보관소라 불러도 무방하다)에나 수용해야 마땅하다.” (<전술에 관한 편지>, 64쪽)
“구 볼셰비즘을 버려야 한다. 소부르주아지의 방침과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침을 분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혁명적 인민이라는 문구는 케렌스키에게는 어울리지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차르 니콜라이가 정리되어 버린 오늘에는, 혁명가라는 것은, 아니 민주주의자라는 것조차도 대수로울 게 없다. ‘혁명적 민주주의 파’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것은 공문구다. 그것은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덮어 가리기나 하지, 들춰내지 않는다. 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을 이들 모순의 존재에 눈뜨게 해야 하지, 그것을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를 분별해야 하며,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든가, "혁명적 인민"이라든가 하는 말들은 케렌스키에게 줘버려야 한다. 러시아의 민주주의 파는 제국주의자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62, 263쪽)
소비에트 내에서 ‘혁명적 인민’이라는 문구 하에 소경영주·소부르주아지와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 간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이 덮어 가려지고 있다. 부유한 농민은 제국주의 약탈 전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여겨 임시정부의 전쟁 계속 결정과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조국방위주의에 찬성한다. 빈농 (농민층의 다수를 이루는 반[半]프롤레타리아)과 프롤레타리아트 (농업노동자 포함)에게 이 전쟁은 불필요하며, 그들의 계급 이익과 이 전쟁은 양립할 수 없다.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의 미비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대중을 바로 이러한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에 눈 뜨게 해야 한다.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눈에 한 묶음으로 처리되고 있는 국제주의자·공산주의자와 조국방위주의자·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사회제국주의자를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구 볼셰비키”를 자칭하는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이러한 ‘분리, 분별시키는 임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며,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단계를 건너뛰어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거냐’며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에 눈뜨게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간판 뒤에 숨고자 한다.
여기서 이러한 ‘분리, 분별시키는 임무’가 제기되는 구체적 정세,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를 레닌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좀 더 살펴보자.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의 단독 권력에 찬성한다.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는 노동자 · 농업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에 一 모험주의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명료하게 하고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가능해지는 단독 권력에 一 찬성한다.
소부르주아지 一 “사회민주주의자”, 사회주의혁명가당 등등 一 는 동요하며, 그와 같이 동요하는 것에 의해 이 명료화와 해방을 방해하고 있다.
이상이 우리의 임무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의 계급 세력관계다.” (<이중권력>, 56쪽)
“현 시기 평가”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모순을 일정 해결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모순, 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구 볼셰비키”를 비판한다.
“카메네프 동지의 오류는 1917년에 이르러서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과거만을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그 미래는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와 소경영주의 이해관계와 정책은 현실에서 이미 엇갈려 버렸기 때문이다. ‘조국방위주의’ 문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같은 극히 중요한 문제들에서도 이해관계와 정책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77쪽)
“우리가 1905년에 말한 것을 지금 반복해서 말하고, 농촌에서의 계급투쟁 [부농 대 빈농·농업노동자 간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대한 배반이다.
지금도 벌써 우리는 토지 문제의 해결을 제헌의회 소집 시까지 기다리려는 경향을 수많은 농민대회의 결정 속에서 발견하는데, 이것은 카데츠 쪽으로 기울고 있는 부유한 농민의 승리다.”
“우리의 임무는 이 소부르주아적 수렁으로부터 계급적 방침을 떼어내는 것이다.”
“소부르주아지는 완전히 그들에게 굴복했다. 만약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떼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53쪽)
또,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기본 슬로건이었던 1905년과 비교하여 1917년 지금의 정세 조건은 어떻게 다른가?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낡은 표현. 그러나 어떤 혁명을? 1905년의 객관적 정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유일한 혁명적 분자였던 반면.... 오늘의 조국방위주의는 농민이 소부르주아 전술로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것은 의미를 잃었다.”
“볼셰비즘 정치로부터 새로운 방침이 태어나고 있다. 소부르주아지와 대부르주아지가 결합했다. 우리는 제계급의 이익의 상충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농업노동자 농민과 소유자 농민은 서로 다른 입장이다. 전자는 제국주의 전쟁에 틀림없이 반대다. 후자는 조국방위주의에 찬성이다.
조국방위주의는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대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도시에서의 노동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빈농에게는 이 전쟁은 불필요하다. 이 계급은 전쟁의 반대자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61-2쪽)
“현재 러시아에서 지금 거의 모든 나로드니키 당들 (인민사회주의자, 트루도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파 사회민주주의자의 기회주의적 당 (조직위원회파, 치헤이제, 체레텔리 등)과 나아가 대다수의 무당파 혁명가를 사로잡고 있는 이른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그 계급적 의의에서 볼 때,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이윤을 끌어내고 있는 소부르주아지, 소경영주, 부농의 이익과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82쪽)
이러한 정세, 이러한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 속에서 구 볼셰비키는 여전히 농민이 권력에 올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할” 가능성만을 말하고, “부르주아지와 농민 간에 협정, 또는 계급협조가 존재함을 드러내주는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러면서 구 볼셰비키는 ‘농민과의 동맹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냐’, ‘여전히 가능성이 남아 있는 농민혁명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거냐’며, 소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분리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그와 같은 미래의 단계 [농민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농민이 부르주아지와 협정을 맺고 있는 현재에 자신의 의무를 망각한다면, 그는 소부르주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부르주아지를 신뢰하라고 설교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69쪽)
농민이 임시정부의 꼬리를 이루고 있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부르주아 정부의 부속물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정세 속에서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 가능성을 내세워 소부르주아지를 신뢰하라고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투쟁을 제한, 억제하고 소비에트를 임시정부에 계속 묶어두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생활에 뒤처진 사람이며,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64쪽)
이렇게 하여 구 볼셰비키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소부르주아 카우츠키 파로, “혁명적 민주주의파”의 좌익으로 되어버렸고, 과거에 혁명적 전술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구 볼셰비키의 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계급협조 인민전선 전술로 되어버렸다. (물론, 구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처럼 임시정부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는 아니다. 구 볼셰비키의 ‘지지’는 현 시기 전술로서의 지지다. 구 볼셰비키는 향후 농민혁명에 의해 임시정부를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한다는 가능성을 전략 시나리오 안에 포함해두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한다는 범위 내에서의 독재지, 그 틀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의 ‘전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독재는 아니다. 구 볼셰비키에게 이러한 ‘전화’란 “단계를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려는” 모험주의적인 발상이다. 구 볼셰비키의 전략 시나리오에서 두 독재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 ‘단계’로, 두 역사적 시대로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레닌은 구 볼셰비키기가 말하는 ‘농민혁명 → 소부르주아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지금도 가능한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 만약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소부르주아적 분자로부터 “즉각, 단호히, 돌이킬 수 없이 프롤레타리아적·공산주의적 분자를 분리시켜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에도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 당을 분리시키는 것에 의해서만이, 이들 소부르주아의 소심함으로부터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을 감행함으로써만이 그것은 가능해진다.”)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적 분자(방침)를 분리, 분별시키는 임무를 규정하는 현 시기 정세 조건은 다름 아닌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대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 간 것”, “농민이 소부르주아 전술로 넘어간 것”이다. 이 정세의 “특수성”을 레닌은 다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 들끓고 있다. 10년간이나 정치적으로 잠자고 있어 왔고, 차리즘의 끔찍한 압제와 지주, 자본가를 위한 고역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짓눌려 있던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깨어 일어나 정치에 돌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대부분은 소경영주, 소부르주아고,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러시아는 모든 유럽 나라들 중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다.
거대한 소부르주아적 파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있고, 계급적으로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쪽수의 힘으로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압도하고 있다. 즉 아주 광범위의 노동자에게 소부르주아적인 정치적 견해를 전염시키고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평화와 사회주의의 최악의 적인 자본가를 불합리하게도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적인 태도, 이것이 러시아의 현 시기 대중의 정치를 특징 짓는다. 이것은 유럽의 모든 나라 중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의 사회경제적 토양 위에서 혁명적 속도로 성장한 열매다. 이것은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와의 "협정"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형식적 협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사실상의 지지, 암묵적 협정,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적인 권력 양도임을 강조해둔다), 구치코프들에게는 두툼한 살코기 一 진짜 권력 一를 주고, 소비에트에게는 단지 케렌스키들의 말뿐인 약속과 존경 (잠시 동안의), 아첨, 미사여구, 맹세, 굽실거리기만을 준 그 협정의 계급적 기초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수적으로 힘이 부족하다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부족하다는 것, 이것이 동전의 이면이다.”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거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 소부르주아적 파도의 가장 중요한, 가장 두드러진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러시아 혁명이 더 한층 전진하고 성공하는 데 최악의 적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92-3쪽, 97쪽)
레닌은 이와 같은 계급 세력관계가 어떠한 종류의 전술을 요구하는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러한] 실제 정세의 특수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필요한 현 시기 전술의 특수성이 나온다. 이 특수성은 일차적으로 ‘혁명적 민주주의 미사여구의 설탕물에 식초와 담즙을 붓는 것’을 요구한다. 비판 작업, 사회주의혁명가당이나 사회민주당 등 소부르주아적 당들의 오류를 설명하는 작업, 의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당, 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을 훈련시키고 결속시키는 작업, ‘전반적인’ 소부르주아적 도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는 작업, 이것이 바로 그 식초와 담즙을 붓는 과업이다.”
“이것은 선전 작업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실천적인 혁명적 작업이다. 왜냐하면 혁명이 정지해버리고 공문구에 빠지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외부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의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혁명의 전진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과 싸우는 것에 의해서만 (그런데 이 싸움은 오로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지적 설득에 의해, 생활의 경험을 보이는 것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횡행하고 있는 혁명적 공문구의 광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의식도, 대중의 의식도, 현장에서의 대중의 과감하고 결연한 창의도 진정으로 북돋을 수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94-5쪽)
정세의 특수성에서 나오는 현 시기 전술의 특수성이란, 달리 말하면 경찰·상비군·관료 등 억압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 맹아적 통치권력으로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장’ 임시정부 타도에 착수할 수 없는, 무장봉기를 ‘직접적’ 일정으로 올릴 수 없는, 따라서 당장은 소부르주아적 도취로부터 깨워내는 쓰디쓴 “비판 작업”, “참을성 있게 오류를 설명하는 일”, “분리, 분별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는, 그러한 특수성이다. 우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도취를 깨는, 사실상의 임시정부 지지인 인민전선 “협정”을 깨는, 그리하여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인 당, 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이 분별정립하고 소비에트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으로 다수자를 획득하기 위해 “조국방위주의적 유행병”과 끈질기게 투쟁하는 것을 요구하는, 그러한 종류의 전술 (몇 년 뒤 초기 코민테른에서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로 정립된)이다.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죽은 공식을 부여잡고 매달리느라 지금 존재하는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이 같은 과업을 방기한다. 소비에트 내에서 “조국방위주의적·소부르주아적인 ‘대중적’ 도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끌어내 분별정립 시키는, 그러한 관건적인 임무”에 반대함으로써 소비에트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지배에 내맡기고 있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부속물로 남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당장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문제를 제출하여 그토록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 볼셰비키는 ‘당장 타도’ 아니면, ‘(비판적) 지지’로 문제를 “단순하게” 제출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고 싶어 하는” 블랑키주의적 위험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당장은 인민전선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레닌은 대답은 단호하고 명료하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게 하는 데는 살아 있는 힘이 소비에트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본가가 인민을 기만하여 계속하고 있는 이 전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나라가 지금 파멸의 벼랑에 서 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활로는, 사회주의혁명 이외에는 없다. 정부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모두가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 의거하고 있는 한, 그것을 "간단히" 타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수자를 획득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것을 타도할 수 있고, 또한 그 때는 반드시 타도해야만 한다. 전진하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할 것인가, 이 이외의 길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58-9쪽)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수자를 획득하는” (“살아 있는 힘이 소비에트를 밀어 올”리는)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을 통해 소비에트를 바꿔내는, 즉 임시정부와 뒤얽혀 그 부속물이 되고 있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타도/대체하는 소비에트로 재편하는 길만이 단 하나의 활로다. 이 길만이 맹아적인 노동자권력에서 실제 노동자권력으로의 이행, 코뮌 국가로의 이행을 보장하는 길이다. 그리고 전쟁으로부터, 임박한 파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소비에트 내부에서,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의 신봉자 대중 속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끈질기게 선전하자는 것, 그 자체야 구 볼셰비키로서도 반대할 부분은 없을 것이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선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조급하게 임시정부 ‘당장 타도’에 착수하자거나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자고 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문제는 선전의 방향, 내용이다. 어떤 방향, 무슨 내용인가? 레닌은 “자본의 이익과 이 전쟁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설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자본을 타도하지 않으면,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전 국가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옮길 필요를 선전”해야 한다고 한다.
“자본가들에 의해 시작된 전쟁을... 끝내는 것은, 자본가의 이윤을 보호하는 데 실제로 이익을 갖지 않는 계급, 진정으로 자본의 압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 반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중으로 전 국가권력을 이양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 이 진실을 우리 당은 참을성 있게, 끈덕지게 인민에게 설명할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85쪽)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코뮌국가로 대체해야 할 필요를 설명, 선전하자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이 내용 쪽으로, 이러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 쪽으로 다수자 전취에 볼셰비키 당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구 볼셰비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며, 여전히 “단계를 건너뛰어”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험주의적 전술이다. “블랑키주의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며, 다수자의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지배와 대중의 활동성을 완전하게 보증하고 있”는 “명백히 인민 다수의 직접적인 조직”인 소비에트 내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노동자 통일전선의 과정을 거치자고 하는 데도 여전히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라고 한다. “이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쟁으로 귀착되는 작업은 블랑키주의의 늪으로 빠져들 염려는 절대로 없는”데 말이다.
구 볼셰비키도 ‘지금 당장’만 아니라면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데는 반대 입장이 아니다. 문제는 레닌이 그 타도/대체의 결과물로 상정하고 있는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코뮌국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 볼셰비키는 절대 반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분간하지 못하고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려 한 오류를 범했고 그래서 패배한 것이 파리 코뮌이 아닌가. 지금 레닌의 코뮌국가 요구는 그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자는 것 아닌가. 이러한 구 볼셰비키의 반론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카메네프 동지는 ‘참을성 없이’ 너무 나아간 나머지 파리 코뮌이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다는 식의 부르주아적 편견을 반복해서 표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코뮌은 불운하게도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데 너무 더뎠다. 코뮌의 진정한 본질은 흔히 부르주아들이 말하는 데 있지 않다. 특별한 유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 거기에 코뮌의 본질이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그러한 국가가 이미 생겨나고 있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그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78쪽)
레닌의 ‘코뮌으로의 이행’ 요구는 아무 전제도, 근거도 없이 무매개로 무언가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현실에서 “이미 생겨나고 있”는 것, 그것을 전제로 해서, 즉 현재 존재하는 소비에트를 전제로 해서, 싹으로 해서 그로부터 ‘이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에트의 존재는 ㅡ 임시정부에 권력을 양도하는 바람에 맹아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ㅡ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경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 볼셰비키는 토지 재분배를 비롯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들 중 많은 것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혁명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여전히 권력체제는 그러한 과제에 걸맞게 민주주의 독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주의적 과제에 조응하지 않는 코뮌국가 요구는 결국 ‘단계를 건너뛰어’ 농민을 배제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구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노동조합 지도자인 미하일 톰스키는 4월 테제에 반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독재는 우리의 주춧돌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권력을 조직해야 하며, 이것을 코뮌으로부터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혼자만의 권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구 볼셰비키가 “사실을, 실재하는 소비에트의 의의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고, 죽은 도식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소비에트란 대체 무엇인가, 소비에트는 그 유형으로 볼 때 의회공화제보다도 한층 더 고도의 것인가 아닌가, 인민에게 더 유용하고, 더 민주주의적인 것인가 아닌가, 투쟁에 더 적합한 것인가, 예를 들어 식량 부족 등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더 적합한 것인가 아닌가. 이와 같은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식의 공허한, 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 현학적인 죽은 문제로 주의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79쪽)
구 볼셰비키는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을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어제의 도식에서 찾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지 못해서 여전히 과제가 미해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이중권력 정세, 그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임시정부에게 넘겨준 정세,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에게서 떨어져나가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간 정세 등, 이러한 실제 사실, 현실의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는 그러한 민주주의적 과제조차도 전 국가권력이 소비에트의 손에 쥐어지는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 시기 모든 정세조건은 오직 노동자와 빈농의 손에 권력을 인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도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쟁과 자본가의 사보타지로 인한 당장의 기근과 닥쳐온 경제 붕괴와 전쟁 참화 앞에서 임시정부는 빵도, 토지도, 평화도 그 어느 것도 인민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다. 민주주의적 과제 등 최소요구와 ‘전쟁 중지’를 실행하고, 나아가 임박한 파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 카르텔 등 독점 금융단체에 대한 통제와 국유화를 도입하는 등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비에트 권력뿐이다. 민주주의적 과제 등 최소강령의 실행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걸음들[조치들]”이 서로 맞물려서 더 이상 그 양자를 시간적 선후(先後)의 과제로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소비에트로 대체하고, 맹아적 권력에서 본연의 권력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 모든 것은 가능하다. “전진하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할 것인가, 이 이외의 길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59쪽)
5.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로서 러시아혁명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했다.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이 수립됐다. “러시아 인민에게는 아직 코뮌을 ‘도입’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흔히 듣는 반론”을 거슬러 코뮌이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도입’은 아니다. 구 볼셰비키를 비롯한 많은 반대자들이 그렇게 혐의를 씌었지만, 코뮌은 정치적 틀거리, 즉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정치적 형태”일 뿐, 그 자체로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다. 코뮌을 ‘도입’하는 데는, 즉 전 국가권력을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옮기는 데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등의 전술과 정책이 완전히 틀렸고 유해하다는 것을 모든 (또는 대다수의) 소비에트의 대의원 다수자가 명확히 인식하”도록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조국방위주의 유행병”과의 투쟁을 거치는 것으로 가능했지만,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여전히 소농이 주민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있는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할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
“코뮌, 즉 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는 경제적 현실 내에서도, 인민의 압도적 다수의 의식 내에서도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개혁은 그 어떤 것도 "도입"하지 않고, "도입"할 의도도 없고, 또 도입해서도 안 된다.”
“소농의 나라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결코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할 수 없다.”(<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04, 111쪽)
‘코뮌으로의 이행’ 요구가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는 ‘혐의’에 맞서 레닌은 그렇지 않음을 누차 설명하고 논박해야 했다. 전쟁에서 벗어나고 토지를 농민의 손에 쥐어주고 식량 부족과 기근을 해결하고 임박한 붕괴에 맞서 싸우고 등등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가 코뮌으로의 이행/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지,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해서가 아니다.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볼셰비키 모두가 인정해온 바다. 레닌도, 구 볼셰비키도 모두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권력을 옮기는 것도 할 수 없는가? ‘사회주의의 도입’이라는 문제와 관계없이,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들”이 그것을 강제하고 모든 정세 조건이 그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더구나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겼는데 말이다.
“지금 세계의 교전국 중에 러시아 정도의 자유가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노동자·병사·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와 같은 혁명적 대중조직이 있는 나라도 하나도 없다는 것, 따라서 인민의 진정한 다수자, 즉 노동자와 농민의 수중으로 전 국가권력의 이전을 이와 같이 용이하게, 이와 같이 평화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86쪽)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권력을 다른 계급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러시아는 이 지점을 향해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이 가 있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64쪽)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하는 것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조금도 혼동할 일 없이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레닌이 러시아가 “이 지점을 향해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이 가 있다”고 한 ‘이 지점’은 권력을 노동자계급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구 볼셰비키는 왜 권력 장악을 한사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깔려 있는 가정은 이렇다. 설사 일시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그것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 결국은 농민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것은 ‘모험주의적’인 파리 코뮌처럼 패배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것이 권력 장악 반대에 깔려 있는 예측 시나리오다.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시나리오에 대해 확고한 만큼이나 이러한 예측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확고하다. 두 시나리오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총괄적인 전략 규정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구 볼셰비키가 걸고 있는 ‘혐의’와는 달리, 결코 주관주의적이거나 모험주의적이지 않음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 전략 규정 말이다.
“1917년 2〜3월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출발점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 종결로의 제1보를 내딛었다. 제2보, 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것만이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적 규모로의 “전선 돌파”, 자본의 이익이라는 전선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선을 돌파함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평화의 축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이러한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긴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01쪽)
러시아에서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제2의 혁명, 즉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 즉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구성부분이자 그 출발점이다. 그리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와 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이와 같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의 일환이자 그 출발점, 그 촉진자라면, 구 볼셰비키의 예측 시나리오는 그 전제부터 허물어진다. 러시아의 노동자권력은 유럽에서의 승리한 사회주의혁명의 원조를 통해 단지 ‘유지’만이 아니라 성공적인 사회주의 ‘도입’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문제와 관련해서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시범 집단농장에 결합하도록 유도할 기계화된 농업 기반을, 선진 유럽의 노동자권력으로부터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전쟁 전부터 모든 나라 사회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 대회 (바젤, 슈투트가르트)를 통해 전쟁이 야기하는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자본주의 전복을 앞당긴다는 결의를 거듭 반복해서 해 왔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결과로 인한 국제적 대격변 물결의 제1파(波)로 본 것은, 전쟁 발발 이래 줄곧 노동자운동 내 조국방위주의·사회배외주의와의 투쟁에 전력해 온 국제주의자로서 자연스런 것이며, 또한 발전하는 정세의 총체성을 담아낸 과학적인 정세인식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보길 거부하고, 러시아혁명을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와 관계없는 일국 혁명(‘특수 러시아적 혁명’)이라는 암묵적인 전제 하에 ‘후진국’ 러시아에서 ‘단계를 건너뛰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구 볼셰비키의 예측 시나리오야말로 죽은 공식에 매달려 있는, “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 현학적인” 도그마다.
4월 테제로 촉발된 당내 투쟁이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볼셰비키 당 7차 전국협의회(4월 24-29일)에서 레닌은 ‘현 정세에 관한 결의’ 내용의 일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사태의 전개는, 다름 아닌 바로 제국주의 전쟁과 관련하여, 1912년 바젤 선언에서 전원일치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천명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예측을 명확히 확인해주고 있다. 러시아 혁명 [2월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일 뿐이다.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계급에 대한 반란의 기운이 대중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넘기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시킴으로써만이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 가고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월) 전국협의회>,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7thconf/24c.htm)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했을 때 여기서 “혁명의 최초 단계”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전쟁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를 뜻한다. 이것은 역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했다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단계’ 따위는 없었을 것이고, 처음부터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코뮌 국가 수립으로) 세계적 자본 전선 돌파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임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구 볼셰비키는 죽은 ‘민주주의 독재’ 공식을 붙들고서, 러시아 혁명을 ‘세계적 규모로의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의 일환으로 위치 짓길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교전국 각국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을 러시아에서 실행하길 처음부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구 볼셰비키는 자본주의를 세계적 체제로 만들어놓은 제국주의 단계 이전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이전의, 말하자면 1905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제국주의론> 이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민주주의 독재 단계론에 고착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러시아 혁명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 즉 세계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이자 출발점이 되는 것도, 러시아 혁명의 승리 자체도 모두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 “고물보관소에나 수용해야 마땅한” 사회주의혁명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발전을 비약적으로 가속화시키고 계급 모순을 극도로 첨예화시킴으로써 혁명 과정의 거대한 촉진자가 된 전쟁은 단순히 ‘외부’에서 끼어든 우연적인 요인이 아니다. “전쟁은 세계 자본주의의 반세기에 걸친 발전의 산물이자, 그 무수한 끈들과 연관들의 산물이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산물로서, 제국주의가 우연이 아닌 것처럼 이 제국주의 전쟁도 정세의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 전쟁이야말로 배우들의 역할 및 위치와 무대 배치를 지휘하는, “세계사의 속도를 비상하게 높이”고 “역사의 방향을 순식간에 트는 전능한 무대감독”이다. (<먼 곳에서 보낸 편지>). 임시정부가 인민의 전쟁 종결 염원을 무시하고 전쟁 계속을 감행하여 평화도, 빵도, 토지도, 인민이 요구하는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것은 ㅡ 따라서 제2의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ㅡ 임시정부 각료들이 특별히 더 배외주의적이거나 주전파라서가 아니라, 임시정부가 맺고 있는 “러시아·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적 금융자본과의 커넥션” 때문이며, 그러한 제국주의 자본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제국주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닥쳐온 완전한 경제적 해체와 기근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긴급히 필요한 즉각적인 혁명적 방책들”, 즉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 도입,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에 대한 즉각적인 통제와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 강령’ (넉 달 뒤에 <<임박한 파국, 그것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될)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강제하는 것도 모두 전능한 무대감독인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로 나온 문제들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 모든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의 국유화, 아니면 적어도 그것들에 대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즉각적인 통제 실시 등과 같은 조치는 결코 사회주의의 "도입"은 아니지만, 무조건적으로 주장해야 하며, 가능한 한 혁명적 방법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이들 방책은 사회주의로 가는 몇 걸음에 지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완전히 실행 가능한 것이지만, 이들 방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닥쳐온 붕괴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다름 아닌 ‘전쟁 덕에’ 특히 괘씸한 방식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본가와 은행가의 전대미문의 높은 이윤에 손대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11쪽)
전쟁은 한편으로 자본의 집적과 국제화를 가속화시키고 독점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엄청난 속도로 성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레닌은 위에서 언급한 볼셰비키 당 7차 전국협의회에서 현 정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현 정세에 관한 결의에서 러시아의 조건만 말하는 것은 틀렸다. 우리가 국제적 제관계의 총체를 무시한다면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정도로 전쟁은 우리를 분리할 수 없게 한 데 묶어버렸다.
전 세계 운동이 사회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시에는 어떠한 과제들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놓이게 될 것인가, 이것이 결의에서 다루어진 주된 질문이다.
보다 발달한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전쟁 전에도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한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전쟁의 결과로 엄청난 속도로 성숙해졌다. 중소기업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밀려나서 파산하고 있다. 자본의 집적과 국제화가 거대하게 진전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많은 나라들에서 사회에 의한 생산·분배 통제가 도입되고 있다. 몇몇 나라는 보편적 노동 징집제를 도입하고 있다. 전쟁 전에는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의 독점이었는데, 전쟁 이후 국가독점이 형성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월) 전국협의회>,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7thconf/24c.htm)
전쟁의 결과로 형성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이러한 조건이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걸음들을 내딛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또한 내딛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리고 러시아가 “사회주의에 한 발을 걸칠”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 전제다. 또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의 출발점으로 되게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조건이다. 세계사회주의혁명 전략을 전제하지 않는, 한 나라의 조건만을 논하는 그 어떤 일국혁명 전략도 구체성과 현실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와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후진국 러시아에서도 혁명을 민주주의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전진하여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 계속과 반혁명으로 학살되어버릴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볼 때, 제국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한 나라의 조건만을 논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나라들이 상호 아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전시 하에서 이 결합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어 있다. 전 인류는 한 줄의 피투성이로 된 실구슬로 엮여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도 단독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선진국이 있으면 후진국이 있듯이, 현 전쟁은 그들 모든 국가들을 많은 실로 엮어버렸기 때문에 일국 단독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다른 모든 국가들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실구슬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학살되어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독일과 러시아, 이 양국에서 국가의 전 권력이 완전히, 남김없이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이양된다면, 전 인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인데, 왜냐하면 그 때는 전쟁의 가장 신속한 종결이, 모든 나라 국민들 간의 가장 영속적인,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평화가 실제로 보장될 것이고, 그와 함께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로의 이행도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월) 전국협의회>,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7thconf/24c.htm))
마지막으로 레닌은 권고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죽은 공식에 매달려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구 볼셰비즘의 집착을 떨쳐버리자.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의 첫 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세계를 개조하고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억 명의 사람을 끌어들인, 그리고 수천억, 수조 규모의 자본의 이익이 얽혀 있는 제국주의 세계전쟁을 끝장내고자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의하지 않고는.... 끝날 수 없는 이 전쟁에, 우리는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익숙하고 정든", 더러워진 셔츠에 집착하고 있다. 더러워진 셔츠는 이제 벗어던지고, 깨끗한 속옷을 입어야 할 때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41쪽)
6.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필요하다”
ㅡ 코뮌 형 국가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했다.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이 수립됐다. “러시아 인민에게는 아직 코뮌을 ‘도입’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흔히 듣는 반론”을 거슬러 코뮌이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도입’은 아니다. 구 볼셰비키를 비롯한 많은 반대자들이 그렇게 혐의를 씌었지만, 코뮌은 정치적 틀거리, 즉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정치적 형태”일 뿐, 그 자체로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다. 코뮌을 ‘도입’하는 데는, 즉 전 국가권력을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옮기는 데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등의 전술과 정책이 완전히 틀렸고 유해하다는 것을 모든 (또는 대다수의) 소비에트의 대의원 다수자가 명확히 인식하”도록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조국방위주의 유행병”과의 투쟁을 거치는 것으로 가능했지만,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여전히 소농이 주민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있는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할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
“코뮌, 즉 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는 경제적 현실 내에서도, 인민의 압도적 다수의 의식 내에서도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개혁은 그 어떤 것도 "도입"하지 않고, "도입"할 의도도 없고, 또 도입해서도 안 된다.”
“소농의 나라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결코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할 수 없다.”(<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04, 111쪽)
‘코뮌으로의 이행’ 요구가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는 ‘혐의’에 맞서 레닌은 그렇지 않음을 누차 설명하고 논박해야 했다. 전쟁에서 벗어나고 토지를 농민의 손에 쥐어주고 식량 부족과 기근을 해결하고 임박한 붕괴에 맞서 싸우고 등등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가 코뮌으로의 이행/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지,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해서가 아니다.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볼셰비키 모두가 인정해온 바다. 레닌도, 구 볼셰비키도 모두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권력을 옮기는 것도 할 수 없는가? ‘사회주의의 도입’이라는 문제와 관계없이,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들”이 그것을 강제하고 모든 정세 조건이 그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더구나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겼는데 말이다.
“지금 세계의 교전국 중에 러시아 정도의 자유가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노동자·병사·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와 같은 혁명적 대중조직이 있는 나라도 하나도 없다는 것, 따라서 인민의 진정한 다수자, 즉 노동자와 농민의 수중으로 전 국가권력의 이전을 이와 같이 용이하게, 이와 같이 평화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86쪽)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권력을 다른 계급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러시아는 이 지점을 향해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이 가 있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264쪽)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하는 것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조금도 혼동할 일 없이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레닌이 러시아가 “이 지점을 향해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이 가 있다”고 한 ‘이 지점’은 권력을 노동자계급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구 볼셰비키는 왜 권력 장악을 한사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깔려 있는 가정은 이렇다. 설사 일시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그것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 결국은 농민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것은 ‘모험주의적’인 파리 코뮌처럼 패배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것이 권력 장악 반대에 깔려 있는 예측 시나리오다.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시나리오에 대해 확고한 만큼이나 이러한 예측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확고하다. 두 시나리오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총괄적인 전략 규정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구 볼셰비키가 걸고 있는 ‘혐의’와는 달리, 결코 주관주의적이거나 모험주의적이지 않음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 전략 규정 말이다.
“1917년 2〜3월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출발점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 종결로의 제1보를 내딛었다. 제2보, 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것만이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적 규모로의 “전선 돌파”, 자본의 이익이라는 전선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선을 돌파함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평화의 축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이러한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긴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01쪽)
러시아에서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제2의 혁명, 즉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 즉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구성부분이자 그 출발점이다. 그리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와 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이와 같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의 일환이자 그 출발점, 그 촉진자라면, 구 볼셰비키의 예측 시나리오는 그 전제부터 허물어진다. 러시아의 노동자권력은 유럽에서의 승리한 사회주의혁명의 원조를 통해 단지 ‘유지’만이 아니라 성공적인 사회주의 ‘도입’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문제와 관련해서는, 농민이 자발적으로 시범 집단농장에 결합하도록 유도할 기계화된 농업 기반을, 선진 유럽의 노동자권력으로부터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전쟁 전부터 모든 나라 사회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 대회 (바젤, 슈투트가르트)를 통해 전쟁이 야기하는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자본주의 전복을 앞당긴다는 결의를 거듭 반복해서 해 왔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결과로 인한 국제적 대격변 물결의 제1파(波)로 본 것은, 전쟁 발발 이래 줄곧 노동자운동 내 조국방위주의·사회배외주의와의 투쟁에 전력해 온 국제주의자로서 자연스런 것이며, 또한 발전하는 정세의 총체성을 담아낸 과학적인 정세인식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보길 거부하고, 러시아혁명을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와 관계없는 일국 혁명(‘특수 러시아적 혁명’)이라는 암묵적인 전제 하에 ‘후진국’ 러시아에서 ‘단계를 건너뛰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구 볼셰비키의 예측 시나리오야말로 죽은 공식에 매달려 있는, “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 현학적인” 도그마다.
4월 테제로 촉발된 당내 투쟁이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볼셰비키 당 7차 전국협의회(4월 24-29일)에서 레닌은 ‘현 정세에 관한 결의’ 내용의 일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사태의 전개는, 다름 아닌 바로 제국주의 전쟁과 관련하여, 1912년 바젤 선언에서 전원일치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천명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예측을 명확히 확인해주고 있다. 러시아 혁명 [2월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일 뿐이다. 모든 나라에서 자본가계급에 대한 반란의 기운이 대중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넘기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시킴으로써만이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 가고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월) 전국협의회>,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7thconf/24c.htm)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했을 때 여기서 “혁명의 최초 단계”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전쟁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를 뜻한다. 이것은 역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했다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단계’ 따위는 없었을 것이고, 처음부터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코뮌 국가 수립으로) 세계적 자본 전선 돌파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임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구 볼셰비키는 죽은 ‘민주주의 독재’ 공식을 붙들고서, 러시아 혁명을 ‘세계적 규모로의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의 일환으로 위치 짓길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교전국 각국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을 러시아에서 실행하길 처음부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구 볼셰비키는 자본주의를 세계적 체제로 만들어놓은 제국주의 단계 이전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이전의, 말하자면 1905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제국주의론> 이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민주주의 독재 단계론에 고착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러시아 혁명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 즉 세계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이자 출발점이 되는 것도, 러시아 혁명의 승리 자체도 모두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 “고물보관소에나 수용해야 마땅한” 사회주의혁명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발전을 비약적으로 가속화시키고 계급 모순을 극도로 첨예화시킴으로써 혁명 과정의 거대한 촉진자가 된 전쟁은 단순히 ‘외부’에서 끼어든 우연적인 요인이 아니다. “전쟁은 세계 자본주의의 반세기에 걸친 발전의 산물이자, 그 무수한 끈들과 연관들의 산물이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산물로서, 제국주의가 우연이 아닌 것처럼 이 제국주의 전쟁도 정세의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 전쟁이야말로 배우들의 역할 및 위치와 무대 배치를 지휘하는, “세계사의 속도를 비상하게 높이”고 “역사의 방향을 순식간에 트는 전능한 무대감독”이다. (<먼 곳에서 보낸 편지>). 임시정부가 인민의 전쟁 종결 염원을 무시하고 전쟁 계속을 감행하여 평화도, 빵도, 토지도, 인민이 요구하는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것은 ㅡ 따라서 제2의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ㅡ 임시정부 각료들이 특별히 더 배외주의적이거나 주전파라서가 아니라, 임시정부가 맺고 있는 “러시아·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적 금융자본과의 커넥션” 때문이며, 그러한 제국주의 자본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제국주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닥쳐온 완전한 경제적 해체와 기근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긴급히 필요한 즉각적인 혁명적 방책들”, 즉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 도입,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에 대한 즉각적인 통제와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 강령’ (넉 달 뒤에 <<임박한 파국, 그것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될)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강제하는 것도 모두 전능한 무대감독인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로 나온 문제들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 모든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의 국유화, 아니면 적어도 그것들에 대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즉각적인 통제 실시 등과 같은 조치는 결코 사회주의의 "도입"은 아니지만, 무조건적으로 주장해야 하며, 가능한 한 혁명적 방법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이들 방책은 사회주의로 가는 몇 걸음에 지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완전히 실행 가능한 것이지만, 이들 방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닥쳐온 붕괴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다름 아닌 ‘전쟁 덕에’ 특히 괘씸한 방식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본가와 은행가의 전대미문의 높은 이윤에 손대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11쪽)
전쟁은 한편으로 자본의 집적과 국제화를 가속화시키고 독점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엄청난 속도로 성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레닌은 위에서 언급한 볼셰비키 당 7차 전국협의회에서 현 정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현 정세에 관한 결의에서 러시아의 조건만 말하는 것은 틀렸다. 우리가 국제적 제관계의 총체를 무시한다면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정도로 전쟁은 우리를 분리할 수 없게 한 데 묶어버렸다.
전 세계 운동이 사회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시에는 어떠한 과제들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놓이게 될 것인가, 이것이 결의에서 다루어진 주된 질문이다.
보다 발달한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전쟁 전에도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한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전쟁의 결과로 엄청난 속도로 성숙해졌다. 중소기업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밀려나서 파산하고 있다. 자본의 집적과 국제화가 거대하게 진전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많은 나라들에서 사회에 의한 생산·분배 통제가 도입되고 있다. 몇몇 나라는 보편적 노동 징집제를 도입하고 있다. 전쟁 전에는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의 독점이었는데, 전쟁 이후 국가독점이 형성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월) 전국협의회>,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7thconf/24c.htm)
전쟁의 결과로 형성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이러한 조건이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걸음들을 내딛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또한 내딛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리고 러시아가 “사회주의에 한 발을 걸칠”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 전제다. 또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의 출발점으로 되게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조건이다. 세계사회주의혁명 전략을 전제하지 않는, 한 나라의 조건만을 논하는 그 어떤 일국혁명 전략도 구체성과 현실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제국주의 세계체제와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후진국 러시아에서도 혁명을 민주주의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전진하여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 계속과 반혁명으로 학살되어버릴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볼 때, 제국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한 나라의 조건만을 논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나라들이 상호 아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전시 하에서 이 결합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어 있다. 전 인류는 한 줄의 피투성이로 된 실구슬로 엮여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도 단독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선진국이 있으면 후진국이 있듯이, 현 전쟁은 그들 모든 국가들을 많은 실로 엮어버렸기 때문에 일국 단독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다른 모든 국가들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실구슬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학살되어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독일과 러시아, 이 양국에서 국가의 전 권력이 완전히, 남김없이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이양된다면, 전 인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인데, 왜냐하면 그 때는 전쟁의 가장 신속한 종결이, 모든 나라 국민들 간의 가장 영속적인,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평화가 실제로 보장될 것이고, 그와 함께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로의 이행도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월) 전국협의회>,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7thconf/24c.htm))
마지막으로 레닌은 권고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죽은 공식에 매달려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구 볼셰비즘의 집착을 떨쳐버리자.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의 첫 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세계를 개조하고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억 명의 사람을 끌어들인, 그리고 수천억, 수조 규모의 자본의 이익이 얽혀 있는 제국주의 세계전쟁을 끝장내고자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의하지 않고는.... 끝날 수 없는 이 전쟁에, 우리는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익숙하고 정든", 더러워진 셔츠에 집착하고 있다. 더러워진 셔츠는 이제 벗어던지고, 깨끗한 속옷을 입어야 할 때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41쪽)
6.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국가가 필요하다”
ㅡ 코뮌 형 국가
“구 볼셰비즘”의 문제는 단순한 ‘일시적인’ 전술 차이가 아니라 이와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레닌이 “지금의 관건적인 임무”라고 말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내부의 분립”은 혁명의 발전과 승리에 있어 말 그대로 ‘관건’이었다. “프롤레타리아적 분자 (조국방위주의에 반대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에 찬성하는 국제주의적, ‘공산주의적’ 분자)와 소부르주아적 분자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사회주의혁명가당, 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를 분리시키는 임무” 없이는, 이 “관건적인 임무”가 선결되지 않고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도, 10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것도 다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 볼셰비키는 어떻게 했는가?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며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는 구 볼셰비키는 마찬가지로 이 관건적 임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 “생활에 뒤쳐진” 노선, 그 죽은 ‘공식’으로부터 나오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해당 국면에서는, 위의 “소부르주아적 분자”와 다를 바 없는 위치, 즉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사회주의혁명가당, 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과 같은 인민전선에 서 있는 것이었다. 레닌이 규정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이와 같이 레닌의 4월 테제 대(對) “구 볼셰비즘” 간의 이 시기 당내 투쟁은 러시아 혁명의 진로와 명운을 가르는 투쟁이었다. 10월 사회주의혁명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 길을 가로막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계속 나아가 결국 반혁명에 길을 내줄 것인가. 다행히 4월 테제가 당의 노선으로 정리되면서 구 볼셰비즘은 “고물보관소”로 영구 수용되고 마침내 10월 혁명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가 부르주아지와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는 인민전선 노선은 18년 뒤 스탈린이 당과 코민테른 내 좌익반대파 숙청을 완성한 직후 화려한 부활을 맞는다.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으로 등극한 것이다.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배외주의적이고 가장 군국주의적인 분파의 테러 독재”라고 규정하여, ‘그 이외의’ 금융자본 분파들, 그 이외의 부르주아와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함께 해야 한다며, 영·불 연합국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각국에서 “반파쇼 인민전선” 이름으로 공산당이 ‘자’국의 제국주의 지배계급을 지지하고, 부르주아지·소부르주아지와의 인민전선 협정을 지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데 앞장섰다. 실제로 1936년 프랑스 공장점거 파업물결에서, 그리고 스페인 혁명에서 인민전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계급협조 체제를 통해 노동자 투쟁과 나아가 노동자권력의 맹아를 파괴하는 반혁명적 노선으로서의 면모를 실물적으로 보여주었다. (이후 그리스에서, 한반도에서, 나아가 인도네시아에서, 칠레에서, 오늘날 남아공에 이르기까지 인민전선은 ‘민주주의혁명 단계’론과 한 세트를 이뤄 계급투쟁과 노동자혁명에 재앙적인 노선이 되어 왔다는 것은 여기서 다 상술할 수 없다.)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태도,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에 대한 태도, 소비에트에 대한 방침,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파와 농민에 대한 태도 등 모든 전술 문제에서의 차이는 인민전선 노선의 이러한 역사적 궤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혁명의 성격, 전략 목표, 세계 사회주의혁명과의 연관 등 근본적인 전략 규정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전략 규정의 차이를 가져온 근저에는, 전쟁 발발 이후 레닌이 발전시켜온 제국주의 이론과 코뮌국가론 (파리 코뮌의 경험에 기초해 새롭게 정립된 마르크스·엥겔스 국가 이론의 “재발견”이라고 그가 말한)을 구 볼셰비키가 수용, 공유하는 데 실패한 문제가 또한 놓여 있었다.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 즉 제국주의 세계 사슬 돌파와 분리된 일국혁명 전략과, 새로운 국가 유형으로서의 소비에트의 의의를 부인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을 가로막은 ‘민주주의’ 독재 단계론에 대한 집착은 명백히 이러한 실패와 관련이 있다. (레닌이 4월 테제 속에서 제국주의 문제와 코뮌국가 문제를 당 강령 개정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한 이유도 이러한 중대한 차이를 감지하여, 낡고 “생활에 뒤쳐져” 걸림돌이 된 ‘공식’과의 단절·쇄신을 명문화하고 당의 강령·전술적 재무장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망명지 스위스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제기하게 될 문제들과 이론적 고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에 대한 강령·전술적 답을 정식화하고 있었다. 특히 코뮌국가론의 경우, 그의 <<국가론 노트>>에서 보듯이 레닌이 2월 혁명 직전까지도 붙들고 씨름하고 있던 주제로서 자신의 이전 규정과의 명시적인 단절을 보여준다. 1905년의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에서 레닌은 파리 코뮌을 “당시에 민주주의 혁명의 요소와 사회주의 혁명의 요소를 구별하지 못했고, 또 구별할 수 없었던 정부, 공화제를 위해 투쟁하는 임무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임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 정부”라고 평가하며, “‘혁명적 코뮌’ 슬로건은 틀렸는데, 왜냐하면 역사에 알려진, 코뮌이 범한 바로 그 과오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과 혼동한 점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었다. 이러한 평가는, 위에서 우리가 본 1917년의 평가, 즉 “새로운 국가 유형”으로서의 코뮌의 의의에 대한 레닌의 적극적인 평가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4월 테제 논쟁 석 달 뒤에 발표되는 <<국가와 혁명>> (미처 완성 못한 <<국가론 노트>>를 이 때 완성한 것)에서는 이러한 적극적인 평가가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하고자 한 첫 시도다. 또한 분쇄된 국가기구를 대체할 수 있고, 또 대체해야만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파리 코뮌의 사업을 다른 상황에서, 다른 조건 하에서 계속하고 있고, 마르크스의 빛나는 역사적 분석을 확증해주고 있다.” 1917년뿐만 아니라 1905년에 대해서도 코뮌을 말하고 있다. 이제 레닌은 거슬러 올라가, 이러한 코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1905년 혁명에 투영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 빵,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면,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그것을 새로운 국가기구로 대체해야 ㅡ 경찰력, 군대, 관료를 무장한 전체 인민에 융합시킴으로써 ㅡ 한다. 1871년 파리 코뮌과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민 가운데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모든 층을 조직하고 무장시켜야 한다. 이들 자신이 국가권력 기관을 직접 자기 손에 장악하도록, 이 국가권력 기관을 이들 자신이 구성하도록 말이다.” (<먼 곳에서 보낸 편지> 중 ‘세 번째 편지’, 레닌전집 65권,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 이정인 옮김, 아고라, 311쪽)
구 볼셰비키가 이미 죽은 ‘민주주의 독재’라는 1905년 공식을 1917년에 투영하여 코뮌국가를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레닌은 “1905년 혁명의 경험이 가리키는” 코뮌국가의 길이야말로 1917년 혁명이 따라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코뮌국가 대 민주주의 독재’의 대립구도는 레닌의 4월 테제와 구 볼셰비즘 간의 차이가 ‘일시적인’ 전술 차이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해주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레닌은 코뮌의 ‘재발견’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도 코뮌의 시각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일 형태다. 그런데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종류의 국가에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국가 사멸론의 입장에서 ‘반대’]... 마르크스주의가 아나키즘과 다른 것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의회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 유형의 국가가 아니라, 1871년의 파리 코뮌 같은, 1905년과 1917년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같은 국가가 필요하다.
실생활은, 혁명은 이미 실제로 우리나라에 — 허약하고 맹아적인 형태로지만 — 바로 이 새로운 유형의, 본래 의미에서의 국가가 아닌 “국가”를 만들어냈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란 인민으로부터 분리한 무장한 인간 부대가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다.
태어나려 하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국가 역시 하나의 국가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무장한 인간 부대가 필요하며, 가장 엄격한 질서가 필요하며, 차리즘 반혁명이든, 구치코프-부르주아 반혁명이든 모든 반혁명 기도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나려 하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국가는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러시아의 많은 지점에서 이 무장한 인간 부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대중 자신, 인민 전체이지, 인민 위에 서 있는, 인민으로부터 분리한, 실제상 소환 불가능한 특권적 인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을 내다봐야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즉 낡은 군주제적 통치기관 — 경찰, 군대, 관료 — 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강화시킨 통상적인 부르주아 형(型)의 민주주의 쪽이 아니라, 앞을, 전방을 보아야 한다.
태어나려 하고 있는, 이미 민주주의이기를 그치고 있는 —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인데, 무장한 인민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 새로운 민주주의 쪽을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1917년 3월을 거친 오늘에는, 혁명적 인민의 눈을 가려, 그들이 새로운 것 — 즉 ‘국가’ 내의 유일 권력이자, 국가 일체의 ‘사멸’을 예고하는 전령으로서의 노동자·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 — 을 자유롭게, 대담하게, 자신의 주도로 건설하는 것을 방해하는 눈가리개가 되고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36-8쪽)
레닌이 당명 개정을 제안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코뮌이즘)로 “우리 이름을 대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 배경에도 “국가 일체의 ‘사멸’을 예고하는 전령으로서의” 코뮌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러한 ‘눈가리개’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인식이 깊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 사후, 특히 인민전선이 총노선으로 등극한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공산’당들의 전략·전술 어휘에서 ‘코뮌’은 사라지고 ‘민주주의 인민전선’, ‘반파쇼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반독점 민주주의’, ‘민주대연합’ 등 온통 ‘민주주의’ 판이 된다. 레닌이 경고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새 옷으로 위장하고 변신 부활에 성공했다. 1917년 4월에 레닌의 투쟁은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혁명의 승리를 위해 레닌이 당내로부터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극복해야 했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인민전선주의는 오늘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데서 마주하는 최악의 내부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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