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부하린의 팜플렛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에 붙이는 서문


부하린의 팜플렛 <제국주의와 세계경제>에 붙이는 서문


                                        V. I. 레닌, 191512
 
 니콜라이 부하린의 저작에서 다룬 주제가 시의적절하고 중요하다는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문제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최근 자본주의 형태 변화를 추적하는 경제과학의 영역에서 아마도 가장 본질적인 문제 그 자체일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생활의 어느 분야든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문제와 관련된 사실들, 여기서 저자가 최신 자료를 바탕으로 그토록 풍부하게 제시한 사실들을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현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평가분석은 그 평가분석의 기초로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요한다. 그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모두에서 제국주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함이 없이는 현 전쟁에 대한 구체 역사적 평가분석이란 가능하지 않다. 또한 지난 몇 십 년의 경제사와 외교사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그러한 이해 없이 전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대 과학 일반의 요건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맑스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근자에 유행하고 있는 한 방법의 과학적가치란 그저 우스울 뿐이다. 외교 문서나 현 정치 사건들 가운데 지배계급에게 기분 좋고 유리한 그런 사실들만 따로 골라내서 이것을 전쟁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랍시고 늘어놓는 방법 말이다. 예를 들어 폴레하노프가 그런 경우인데, 그는 제국주의의 근본적 특징과 경향을 경제관계 체제로 평가 분석하지 않고 있다. 즉 제국주의를 현대의 고도로 발달한, 성숙한, 과숙한 자본주의 경제관계 체제로 평가 분석하는 대신에 그는 푸리시케비치들과 밀류코프들을 기쁘게 해 줄 사실들을 찾아 나서면서 맑스주의와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는, 제국주의라는 과학적 개념은 방금 언급한 두 러시아 제국주의자가 당면의 경쟁자들, 라이벌들, 적수들에게 퍼붓는 욕설의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 두 러시아 제국주의자의 계급적 기초는 그들의 외국 라이벌들과 적수들의 계급적 기초와 완전히 동일하다! 앞서 한 말을 삼켜버리고 원칙을 부인하고 세계관을 뒤집고 결의와 엄숙한 선서를 내다 버리는 요즈음이니 이런 것에 놀랄 필요도 없다.
 
니콜라이 부하린의 저작이 가진 과학적 의의는 특히 이 점에, 즉 그가 전체로서의 제국주의와 관련된, 가장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의 한 발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와 관련된 세계경제의 기본 사실들을 조사했다는 데 있다.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자본주의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 자본주의는 유럽 선진국들에서 봉건제를 극복하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땅과 아직 자본주의 소용돌이 속에 최종 끌려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과 같은 광대한 영역으로 확장되어가며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조화롭게 평화적으로발전하는 위치에 있었다. 물론 그 시대에조차, 대략 1871년에서 1914년에 해당하는 그 시대에조차 평화적자본주의는 군사적 의미로나 일반적인 계급적 의미로나 진정으로 평화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생활 조건을 만들어 냈다. 선진국의 10분의 9 주민에게, 식민지와 후진국의 수억 명에게 이 시대는 평화의 시대가 아닌 억압과 고문과 공포의 시대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무시무시했을 그러한 억압과 고문과 공포 말이다. 이 시대는 영원히 가버렸다. 새로운 시대, 돌발적인 변화와 파국과 충돌로 가득 찬 보다 격동적인 시대가 뒤를 이었다. 더 이상 이 시대는 근로대중에게 끝이 없는 공포로 보이는 시대가 아니라 공포로 가득 찬 종말인 시대다.
 
이 변화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는 오직 자본주의 내의, 그리고 상품생산 일반 내의 가장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흐름들의 직접적 발전이자 확대이자 계속이다. 그 이외의 방식으로는 올 수 없다. 이 점이 극히 중요하다. 수 세기에 걸쳐 전 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이 기본 흐름들은 상품교환의 증대와 대규모 생산의 증대다. 교환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대규모 생산 증대의 일정 단계에서, 즉 대략 19세기의 끝 - 20세기 시작 무렵에 도달한 이 단계에서 상품교환은 경제 관계의 국제화와 자본의 국제화를 낳기에 이르렀다. 자유경쟁을 대신해서 독점이 들어서기 시작할 정도로 대규모 생산의 거대한 증가를 수반하는 그러한 국제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 지배적인 유형은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라들 간의 교통을 통해 자유롭게경쟁하는 기업들이 더는 아니다. 지배적인 유형은 기업가들의 독점적 연합, 즉 트러스트다. 세계의 전형적 "지배자"가 된 것은 금융자본이다. 이 금융자본은 유달리 이동이 자유롭고 유연하며, 유달리 국내적·국제적으로 뒤얽혀 있으며, 유달리 무인격적인 데다 직접적 생산과정으로부터 분리돼 있으며, 유달리 집적이 용이한 등등의 권능을 가진 존재다. 말 그대로 수백 명의 억만장자와 백만장자가 전 세계의 운명을 손에 쥘 정도로 이미 유달리 큰 걸음으로 집적의 길로 성큼 나아간 그러한 파워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추상 속에서 고찰하면 카우츠키가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맑스주의와 결별한, 그러나 방식은 다르게 결별한 카우츠키가) 도달한 것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본의 거두들이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통합할 날이, 이 세계 트러스트가 일국적·민족적 한계를 가진 금융자본의 경쟁과 투쟁을 국제적으로 통합된 금융자본으로 대체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결론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은 지난 세기 90년대의 우리나라 스트루베주의자경제주의자가도달한 결론만큼이나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틀린 추론이다. 당시 이들은 자본주의의 진보성으로부터,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으로부터,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로부터 곧장 나아가 때로는 자본주의 변호론자가 되거나 (자본을 숭배하기, 자본과 화해하기, 자본과 싸우는 대신에 자본을 찬양하기), 때로는 비정치적으로 되거나 (즉 정치 또는 정치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일반적인 정치적 격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등. 경제주의 특유의 오류), 때로는 파업 그 자체를 위한 파업의 전도사가 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총파업은 파업운동이 나아가야 할 이상이고 로망이었으며, 그 앞에서 다른 형태의 운동들은 잊거나 무시해도 좋은 그런 지위로 격상되었다. 단지 파업만으로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의 파괴로 일거에 도약할 수 있는 필살의 무기가 그들에게는 총파업이었다). 자유경쟁이라는 반()속물적 "낙원"과 비교했을 때 자본주의가 진보적이라는, 그리고 제국주의가 세계의 선진국들에서 평화적자본에 대한 제국주의의 최종적 승리와 함께 불가피하다는 다툼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부터 수많은 다양한 정치적·비정치적 오류들과 과실들로 나아갈 것임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있다.
 
특히 카우츠키로 말하자면, 그의 명백한 맑스주의와의 결별은 정치의 부정 또는 무시의 형태를 취하거나, 또는 제국주의 시대에 그리도 많고 다양한 정치적 충돌, 격변, 변혁을 뛰어넘는 "비약"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제국주의에 대한 변호론이 아니라 "평화적" 자본주의에 대한 몽상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카우츠키는 "평화적" 자본주의가 비평화적, 침략적, 격변적 제국주의에 자리를 내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맑스주의자로서 마지막으로 몇 가지 통합된 결론을 내놓은 논문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이미 인정했던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 무식하게 제국주의로부터 "평화적" 자본주의로 대놓고 후퇴하는 꿈을 꾸며 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꿈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이 "평화적" "초제국주의"에 대한 악의 없는 추측의 형태를 취하게 하면 어떨까? 민족적 (그 보다는, 민족적으로 분리된) 제국주의들의 국제적 통합을 초제국주의로 소부르주아가 볼 때 특히 불쾌하고 불안스럽고 두려운 전쟁이나 정치적 격변 등등과 같은 갈등을 없앨 "수도 있을" 초제국주의로 불러야 한다면, 이 경우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갈등이 부재하며 상대적으로 격변적이지 않은 초제국주의에 대한 악의 없는 꿈을 통해 현재의 극히 모순적이고 격변적인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여기 지금 존재하는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탈출을 해버리는 것은 어떨까? 유럽에 막 동튼 제국주의시대가 곧 지나가 버리고, 어떠한 "돌발적" 전술도 요구하지 않을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초제국주의" 시대가 뒤따를 가능성을 꿈꿔냄으로써 제국주의 시대가 제기했고 또 제기하고 있는 첨예한 문제들을 피하고자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카우츠키는 "자본주의의 그러한 [초제국주의적] 새로운 단계가 어쨌든 상상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 여부를 결정할 충분한 전제조건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말한다. (<<신시대>>, 1915430, 144).
 
지금 여기 있는 제국주의를 무시하고,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는 "초제국주의"의 왕국으로 도피하려는 이러한 충동에는 맑스주의는 눈곱만치도 없다. 이러한 정식화에서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그것의 발명자 자신은 그것에 대해 보증하지 않고 있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승인은 되고 있지만, 현 단계 (이미 여기에 있는)에서는 모순을 무디게 하려는 소부르주아적이고 뿌리깊이 반동적인 욕구가 맑스주의를 대체하고 있다. 카우츠키는 이 다가오는 첨예한 대재앙의 시대에 자신이 맑스주의자일 것임을 맹세했었다. 그가 이 다가오는 시대에 대해 쓴 1909년 논문에서 아주 분명하게 예견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대재앙의 시대에는 말이다. 이제 이 시대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도래하자 다시 한 번 카우츠키는 다가오는 초제국주의 시대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는 에 자신이 맑스주의자일 것임을 맹세한다! 요컨대, 지금이 아닌, 현 조건 하에서가 아닌, 이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자신이 맑스주의자일 것임을 약속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상 맑스주의, 약속뿐인 맑스주의, 오늘이 아닌 내일의 맑스주의, 오늘의 모순을 무디게 하는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 이론 단지 이론일 뿐만이 아니라 이다. 이것은 수출 국제주의와 같은 것이다. 적국 진영에서 표현되는 국제주의는 다 동조하지만 자국에서, 동맹국에서 표현되는 국제주의에는 동조하지 않는 열렬한 오 정말로 열렬한! 국제주의자들과 맑스주의자들 사이에 오늘날 만연해 있는 수출 국제주의 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동맹국"의 약속에 머물 때는 민주주의에 동조한다. 그들은 민족자결이 자국 (명예롭게도 민족자결 동조자 시민들을 가진 자국)에 종속된 민족들의 자결이 아닐 때만 민족자결에 동조한다. 한 마디로, 우리 시대에 만연한 수천 수만 가지 위선 중 하나다.

하지만 추상 속에서 제국주의 다음,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 말하자면 초제국주의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부정할 수 없다. 추상 속에서는 그러한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은 미래의 급박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꿈을 꾸기 위해 오늘의 급박한 문제에서 도망가 버리는 기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에서 이것은 그러한 꿈을 위해, 현실에서 전개되는 사태발전에 바탕을 두고 그로부터 길안내를 받길 거부하는 것, 그러한 꿈을 내세워 실생활의 전개로부터 자신을 유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외 없이 모든 기업을, 예외 없이 모든 국가를 홉수해버리는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 형성 방향으로 사태발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향으로의 사태발전은 그것이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발전하기 전에, 즉 일국적·민족적 금융자본이 초제국주의적세계 통합에 도달하기 전에,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발하고 자본주의는 자신의 대립물로 전화될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조건 아래서, 그와 같은 속도로, 그와 같은 모순과 충돌과 격동을 통해 그것도 단지 경제적 모순, 충돌, 격동만이 아니라 정치적, 민족적 등등의 모순, 충돌, 격동을 통해 ㅡ 진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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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V.I. Lenin: Preface to N. Bukharin’s Pamphlet, Imperialism and the World Economy (1915), in: LCW Vol. 22, pp. 10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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