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V. I. 레닌, 1915년 말
1914-15년의 전쟁에 의해 드러난, 제2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한 각 계급 · 당들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배우는 바가 많다. 한편으로, 부르주아지는 ‘조국 방위’에 찬성하는, 즉 전쟁에 찬성하고 부르주아지를 돕는 데 찬성하는 입장을 표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을 극구 칭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더 솔직하고 덜 외교적인 부르주아 대표자들은 인터내셔널의 붕괴, 사회주의 ‘환상’의 붕괴에 대해 고소해 죽겠다는 듯이 기쁨을 표하고 있다. “조국을 방어(옹호)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 중에도 두 가지 색조가 있다. 하나는 독일인 W. 콜프와 W. 하이네 같은 ‘극단파’로서 이들은 인터내서널의 붕괴를 인정하며, “혁명적 환상”을 불러온 책임이 인터내셔널에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훨씬 더 기회주의적인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실천 상으로는, 이들은 카우츠키와 르노델과 반더벨드 같은 ‘온건파’와 일치하고 있다. 이 ‘온건’하고 신중한 사회주의적 ‘조국 옹호자들’은 인터내셔널이 붕괴했다는 것을 완강히 부정하고, 단지 그것은 일시 기능이 정지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제2인터내셔널의 생명력과 생존할 권리를 옹호하고 있다. 각국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인정하고,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할 필요를 주장하고 있다.
기회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1914-15년의 전쟁에 의해 드러난, 제2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한 각 계급 · 당들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배우는 바가 많다. 한편으로, 부르주아지는 ‘조국 방위’에 찬성하는, 즉 전쟁에 찬성하고 부르주아지를 돕는 데 찬성하는 입장을 표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을 극구 칭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더 솔직하고 덜 외교적인 부르주아 대표자들은 인터내셔널의 붕괴, 사회주의 ‘환상’의 붕괴에 대해 고소해 죽겠다는 듯이 기쁨을 표하고 있다. “조국을 방어(옹호)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 중에도 두 가지 색조가 있다. 하나는 독일인 W. 콜프와 W. 하이네 같은 ‘극단파’로서 이들은 인터내서널의 붕괴를 인정하며, “혁명적 환상”을 불러온 책임이 인터내셔널에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훨씬 더 기회주의적인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실천 상으로는, 이들은 카우츠키와 르노델과 반더벨드 같은 ‘온건파’와 일치하고 있다. 이 ‘온건’하고 신중한 사회주의적 ‘조국 옹호자들’은 인터내셔널이 붕괴했다는 것을 완강히 부정하고, 단지 그것은 일시 기능이 정지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제2인터내셔널의 생명력과 생존할 권리를 옹호하고 있다. 각국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인정하고,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해야 할 필요를 주장하고 있다.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기 위해, 현 전쟁과 관련한 하나의 역사적인 문서를 검토해보자. 이 문서는 세계의 모든 사회주의 당들이 전원일치로 공식 채택한 1912년의 바젤 선언이다. 충분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 어떠한 사회주의자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각각의 전쟁에 대해 그것들을 하나하나 구체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할 필요를 감히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소수의 ‘좌익적’ 사회민주주의자 외에는 누구도 바젤 선언을 공개적으로 단호히 부인하거나, 선언이 오류라고 공언하거나, 또는 선언을 성실히 분석하여 선언의 명제들을 개전 후 사회주의자들의 행동과 대조해볼 만큼 대담함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젤 선언이 공식 사회주의자들 대다수의 논리와 행동이 완전히 기만적이라는 것을 무자비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언에는 ‘조국 방위’든, 방위 전쟁과 공격 전쟁을 구별하는 얘기든, 이런 얘기는 단 한 단어도 들어가 있지 않다! 독일과 4국협상 측 양 진영의 공식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외쳐댄 주제에 대해 선언에는 단 한 음절도 들어가 있지 않다. 바젤 선언은, 1912년에 전쟁을 유발하고 있던, 그리고 결국은 1914년에 전쟁을 야기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완전히 명료하고 정확하며 분명하게 평가하고 있다. 선언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이 충돌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기초 위에서 일어난 충돌이다. 발칸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간의 충돌,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간의 “소아시아에서의 정복 정책”(이들 모두의 정책이다!)을 둘러싼 충돌,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간에 “알바니아를 각자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지배” 하에 두려는 충돌, 영국과 독일 간에 상호 “적대”로 인한, 나아가 “아르메니아, 콘스탄티노플 등등을 탈취하려는 짜리즘의 시도”로 인한 영 · 독 양국의 충돌이 모두 제국주의적 충돌인 것이다. 이 모두가 현 전쟁에 일백 프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타 민족을 노예화하기 위해 수행되고 있는 이 전쟁이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약탈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성격이 선언에 아주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선언은 다음과 같은 불가피한 결론을 끌어낸다. “인민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는 구실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이 전쟁은 “자본가의 이윤과 왕조의 야망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는 전쟁이다. 또,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전쟁은 “서로를 향해 발포하는 범죄”다.
이들 명제에는 양대 역사시대를 나누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 원리가 담겨 있다. 그 하나의 시대는 1789년부터 1871년까지의 시대인데, 이 시대에 대부분의 경우 유럽에서의 전쟁들은 가장 중요한 “인민의 이익”과 명백히 결부되어 있었다. 즉, 봉건주의와 절대주의와 외세의 압제를 타도하기 위해, 수백 만 인민을 끌어들인 강력한 부르주아 진보적인 민족해방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오직 그 기반 위에서만, ‘조국 방위’ 개념, 즉 중세적 제도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가고 있는 부르주아 민족에 대한 방어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사회주의자는 ‘조국 방위’를 인정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나 영국에 대항하는 페르시아 또는 중국의 방어, 독일이나 러시아에 대항하는 터키의 방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대항하는 알바니아의 방어 등등.
1914-15년의 전쟁은, 바젤 선언에서 분명히 표현된 것처럼 전혀 다른 역사시대에 해당하며,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노획물의 분배를 위한, 타국을 예속시키기 위한 약탈자들 사이의 전쟁이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승리는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등등의 압살을 의미한다. 이 내용이 바젤 선언에 명시되어 있다. 독일의 승리는 소아시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등등의 압살을 의미한다. 이것도 같은 선언에 명시되어 있으며,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인정한 바이다! 세계 지배와 시장과 “세력권”과 타 민족의 노예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대국들(즉, 대 약탈자들)이 내세우는 방위전쟁과 조국방위에 관한 모든 언사는 사기이며 헛소리이고 위선이다! 조국방위에 찬성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바젤 선언을 상기하기를, 또는 정확히 인용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선언이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바젤 선언은, 1914-15년 전쟁에서 ‘조국 방위’ 입장에 서있는 사회주의자들은 단지 말로만 사회주의자일 뿐, 실제로는 배외주의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배외주의자다.
이 전쟁을 민족해방과 결부된 전쟁으로 보는 입장에서 나오는 한 가지 사회주의적 전술이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을 제국주의적이고 약탈적이며 침략적인 전쟁으로 보는 입장에서 나오는 다른 한 가지 사회주의적 전술이 있다. 바젤 선언에는 후자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경제적 • 정치적 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인데, “자본 지배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이 위기를 이용해야 한다. 이 말들은 사회혁명이 무르익었고, 가능하며, 전쟁과 관련하여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선언은 파리 코뮌과 1905년 혁명, 즉 혁명과 파업과 내란을 예로 들면서, “지배계급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한다. 누구든,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 대한 그들의 태도 문제를 “심의한 적도 없고”, “결정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바젤 선언은 이 문제를 결정했다. 전술 방침, 즉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동과 내란이라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바젤 선언이 한 편의 공허한 웅변이고 관료적 문구이며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위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얘기는 선언에 의해 폭로된 자들이 언제나 하는 얘기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바젤 선언은 제2인터내셔널 시대 전체, 즉 1889년부터 1914년까지의 전 기간에 걸친 방대한 양의 선전 · 선동 자료를 총괄하고 있다. 이 선언은 조금의 과장도 없이,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낸 수백만 종의 전단과 신문 논설, 저서와 연설문을 요약하고 있다. 이 선언을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제2인터내셔널 전체가 다 오류라고, 모든 사회민주당들의 수십 년 동안의 활동이 다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젤 선언을 기각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전 역사를 기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젤 선언은 생소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선언은, 사회주의자가 대중을 이끄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오로지 그것만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즉 ‘평화적인’ 활동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준비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다. 바젤 선언은 게드가 1899년 대회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한 것일 따름이다. 여기서 게드는 시장 획득을 위한, “자본가의 약탈”(brigandages capitalistes)을 위한 전쟁 시에는 언제나 고개를 쳐드는 사회주의자의 입각주의(入閣主義)를 조소하고 있다.(<<앙 가드!>> 175-76쪽). 또 바젤 선언은 카우츠키가 1909년에 그의 소책자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 여기서 그는 “평화적인 시대”의 종언과 전쟁 · 혁명 ·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투쟁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 말한 것을 되풀이한 것일 따름이다.
바젤 선언은 전쟁공채에 찬성투표를 하고, 내각에 들어가고 1914~15년에 조국 방위를 인정한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철저하게 배반했음을 반박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변절임은 부정할 수 없다. 오로지 위선자만이 이것을 부인할 것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문제를 개인에게 귀착시켜, 카우츠키, 게드, 플레하노프를 인용하는 것(그리고 “‘심지어’ 그와 같은 인물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하고 우스운 짓이다. 그것은 형편 없는 속임수이다. 그들의 변절에 대한 진지한 설명이라면, 먼저 이 정치의 경제적 의의를 검토하고, 다음으로 그들의 기본 사상을, 끝으로 사회주의 내 유파들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1914-15년 전쟁에서 ‘조국방위’의 경제적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젤 선언 속에 주어져 있다, 모든 대국은 약탈과 세계 분할, 시장 획득 그리고 타 민족의 예속을 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에게 전쟁은 더 고율의 이윤을 가져다준다. 한줌의 노동관료와 노동귀족, 그리고 노동운동의 “동반자”인 소부르조아지(인텔리겐차 등등)에게 전쟁은 그 이윤의 부스러기를 약속해준다. ‘사회배외주의’(이 용어가 사회애국주의라는 용어보다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후자는 죄악을 미화시켜 주기 때문이다)와 기회주의의 경제적 기초는 동일하다. 즉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적으로 하여 노동운동의 한줌의 ‘상층’과 ‘자’국 부르주아지가 맺은 동맹이며, 부르주아지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계급을 적으로 하여 부르주아지의 종복과 부르주아지 사이에 맺은 동맹이다. 사회배외주의는 완성된 기회주의이다.
사회배외주의와 기회주의는 그 정치적 본질에서 동일하다. 계급협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부인, 혁명적 행동의 폐기, 부르주아적 합법성에 순종하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불신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신뢰 등에서 동일하다. 정치적 사상도 동일하고, 그들 전술의 정치적 내용도 동일하다. 사회배외주의는 밀레랑주의와 베른슈타인주의와 영국의 자유주의 노동자정치의 직접적인 계속이자 완성이고, 그것들의 총화이자 총결산이며 최고의 성취물이다.
1889년에서 1914년까지의 전 기간 내내 사회주의에는 두 유파, 즉 기회주의 유파와 혁명적 유파가 있었다. 지금도 사회주의에 두 유파가 있다. 부르주아 거짓말쟁이와 기회주의 거짓말쟁이들이 실시하고 있는, 문제를 개인에게 귀착시키는 방법을 따르지 말고,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파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유럽 10개국을 살펴보자. 독일 • 영국 • 러시아 • 이탈리아 • 네덜란드 • 스웨덴 • 불가리아 • 스위스 • 벨기에 • 프랑스 중 앞의 8개국 에서는 기회주의 유파와 혁명적 유파 간의 구분이 사회배외주의자와 혁명적 국제주의자 간의 구분과 일치한다. 사회적 • 정치적 의미에서 사회배외주의의 기본 중핵은 다음과 같다. 독일에서는 <<월간 사회주의>> 일파, 영국에서는 페비언 파와 노동당(독립노동당도 양자와 함께 블록을 이루고 있는데, 이 블록에서 사회배외주의의 영향력은 영국 사회당에서보다 상당히 강하다. 영국 사회당에서는 약 3/7[즉, 66대 84]이 국제주의자이다), 러시아에서는 <<나샤 자리야>>와 조직위원회(또한 <<나세 델로>>도), 이탈리아에서는 비솔라티의 당, 네덜란드에서는 트뢸스트라의 당, 스웨덴에서는 브란팅 일파, 불가리아에서는 ‘쉬로키’ 파, 스위스에서는 그로일리히와 ‘그의’ 사람들. 사회배외주의자들을 향한 크든 적든 날카로운 항의가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들 모든 나라에서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이다. 10개국 중 두 나라는 예외인데, 그러나 거기에서조차도 국제주의자는 약할 뿐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없다기보다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맞다.(바이양은 국제주의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은 사실을 시인했는데, 이 편지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회배외주의는 완성된 기회주의이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은 보통 이데올로기적이고 내밀한 형태를 취했는데, 이제는 공개적이고 노골적이다. 사회배외주의는 이러한 부르주아지 및 총참모부와의 동맹에서 말고는 어디에서도 그 힘을 끌어내지 못한다. 누구든(카우츠키를 포함하여),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배외주의를 선호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어디서도 대중은 그런 의사에 대해 질문 받아 본 적이 없다(아마 이탈리아만 예외일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선전포고 이전 9개월 동안 논쟁이 계속되었고, 대중 또한 비솔라티 당에 반대했다). 대중은 질겁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분열되었으며, 계엄령에 의해 짓눌렸다. 자유로운 투표는 오로지 지도자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반대하여 부르주아지에게 찬성투표를 했다! 기회주의를 당 내부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그 밖의 나라들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회주의는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표현으로서, 부르주아적 노동자정치이자, 한줌도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주변 분자들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동맹이라고 항상 말하고 주장해왔다. 수십 년 동안 ‘평화적’ 자본주의의 조건 속에서 성장해온 기회주의는 1914-15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부르주아지와의 공공연한 동맹군임을 입증할 정도로 성숙했다. 기회주의와의 단결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자’국 부르주아지 간의 단결, 즉 ‘자’국 부르주아지에게의 종속과 국제적인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분열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나라에서 기회주의자들과의 즉각적인 분립이 바람직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는 심지어 현재 가능하다고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분립이 무르익었다는 것, 불가피해졌다는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또 역사는 ‘평화적’ 자본주의를 벗어나 제국주의로 향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분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Volentem ducunt fata, nolentem trahunt.(운명은 하고자 하는 자는 인도하지만, 마지못해 하는 자는 끌고 간다.)
개전 이래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 특히 교전 당사자들은 ‘조국 방위’ —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제국주의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의 약탈적 이익을 방어하기 — 를 인정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칭송하는 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제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본질적인 이익이 어떻게 길을 열어, 사회주의 당 내부에, 노동계급운동 내부에 침투하여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보라! 독일의 예는 이 점에서 특히 가르치는 바가 많은데, 왜냐하면 제2인터내셔널 시대에 가장 큰 당이 성장한 나라가 독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동일한 현상이 형태와 양상과 외형상의 사소한 편차만 띤 채 다른 나라들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적인 독일 잡지 <<프로이센 연보>>는 1915년 4월호에, 사회민주당 당원으로서 모니토르(Monitor)라는 필명 뒤에 정체를 숨긴 한 사회민주주의자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 기회주의자는 20세기의 노동계급운동에 대해 전 세계의 부르주아지 전체가 취하고 있는 정책의 본질에 관한 진실을 발설해버렸다. 오늘날 노동계급운동은 무시할 수도, 난폭한 힘으로 진압할 수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노동계급운동은 내부로부터, 그 상층을 매수함으로써 타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영-불 부르주아지가 수십 년간 바로 이런 방식의 정책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밀레랑, 브리앙 일파를 매수해 온 것이다. 독일 부르주아지가 지금 취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방식이다. 모니토르는 부르주아지를 앞에 놓고(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회민주당의 행동은 현 전쟁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즉, 프롤레타리아트를 적으로 하여 부르주아지에게 나무랄 데 없이 봉사하고 있다). 사회민주당이 민족적 자유주의 노동자당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아주 훌륭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당이 우익화하면 부르주아지에게는 위험할 것이라고, 모니토르는 덧붙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진 노동자당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해야만 한다. 당이 그것을 폐기하는 날에는 새로운 당이 등장하여 그 폐기된 강령을 받아 안고, 훨씬 더 급진적인 정식을 강령에 집어넣을 것이다.”(<<프로이센 연보>> 4호 1915년 50-51쪽).
이 말들은 부르주아지가 언제나, 어디서나 내밀하게 해온 것을 공공연하게 표현한 것이다. 대중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말들이 필요하다. 기회주의자들은 위선적으로 그러한 말들을 되풀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당들과 같은 그런 당들은 기회주의자들에게 쓸모 있고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그와 같은 당들이 있어서 1914-15년의 위기 동안에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를 옹호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모니터가 제시한 것과 똑같은 종류의 정책을, 영국에서 페비언 파와 자유주의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취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기회주의자들과 조레스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다. 모니터는 거침없이 말하는 냉소적인 기회주의자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부류 가 있다. 내밀하고 ‘성실한’ 기회주의자들이다.(엥겔스는 ‘성실한’ 기회주의자들이야말로 노동계급운동에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은 옳았다). 카우츠키가 그와 같은 기회주의자의 견본이다.
그는 1915년 11월 26일자 <<노이에 차이트>> 9호에서 공식 당의 다수파가 당의 강령을 위반하고 있다고 썼다(카우츠키 자신은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한 해 내내 ‘조국 방위’ 거짓말을 정당화하면서 다수파의 정책을 지지해 왔다!). 그는 “다수파에 대한 반대파가 성장하고 있다”(272쪽)고 말한다. 대중은 “반대파 입장”이다. “전후에 [전후에만?]... 계급적대가 더욱 더 첨예화되어 급진주의가 대중 사이에서 우세를 차지할 것이다(272쪽). ... 우리는 전후에 [전후에만?] 급진분자가 당에서 뛰쳐나가 반(反)의회적인 [?? ‘의회의 틀을 뛰어넘는’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대중행동 흐름에 합류하러 대거 몰려가는 사태를 맞게 될 위협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당은 공통점이 없는 양 극단으로 분해되고 있다.”
카우츠키는 중용을 대표하여, “공통점이 없는” “양 극단”을 화해시키고 싶어 한다! 오늘 (개전 이후 16개월이 지난 시점에) 그는 대중이 혁명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더니 곧바로 그는 혁명적 행동을 “가두 모험주의”(272쪽)라고 비난하면서 혁명적 대중을, 이들 대중과 공통점이 없는 기회주의 지도자들과 “화해”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하여? 단지 말을 근거로 하여! 국회에서의 ‘좌익’ 소수파의 ‘좌익적’ 말들을 근거로 하여! 그 소수파 — 카우츠키 같은 — 가 혁명적 행동을 모험주의라고 비난하게 놓아두자. 그러나 그 소수파는 좌익적 말들로 대중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당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며, 쥐데쿰들, 레기엔들, 다비트들, 모니토르들과의 통일단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모니터의 강령과 일치하는 강령이며, 단지 감미로운 목소리와 달콤한 문구로 표현되었을 뿐, 부르주아지의 강령이다! 1915년 3월 18일 사회민주당 국회의원단의 회의에서 부름(wurm)도 이 강령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원단의 전술에 반대하여 노동자 대중들 사이에서 반대파가 성장하고 있으므로 대중의 인내를 너무 깊이 시험하려 들지 말라고 의원단에게 경고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중앙을 굳건히 해야 할 때다.”(<<전쟁에 반대하는 계급투쟁! ‘리프크네히트 사건’의 자료>> 67쪽. 초고로 출판).
“마르크스주의적 중앙”(카우츠키를 포함하여) 전체의 명의로 대중이 혁명적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자! 이것은 1915년 3월 18일의 일이다! 카우츠키는 8개월 보름 뒤인 1915년 11월 26일에 혁명적 대중을 좌익적 언사로 달래야 한다고 다시 제안했다!
카우츠키의 기회주의와 모니토르의 기회주의는 표현법과 말투에서, 그리고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상에서만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같은 목적이란 대중에 대한 기회주의자의(즉,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을 유지 보존하는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기회주의자에게(즉, 부르주아지에게) 계속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파네쿡과 호르터는 매우 적절하게도 카우츠키의 입장을 “수동적 급진주의”(이러한 종류의 혁명주의를, ‘국내산’ 모델을 가지고 철저히 연구해 온 프랑스인들의 말에 따르면, 장황함[verbiage]이다!)라고 불렀다. 나라면 그것을 내밀하고, 소심하고, 달콤한 위선적 기회주의라고 부르겠다.
본질적으로, 사회민주주의 내 두 유파가 지금 서로 달리하는 것은 결코 말과 문구에서가 아니다. ‘조국방위’(즉, 부르주아지의 약탈의 방위)를 사회주의, 국제주의, 인민의 자유 등의 문구와 섞어 조합하는 기술에서는 반더벨드, 르노델, 상바, 하인드만, 헨더슨, 로이드 조지 등이 결코 레기엔, 쥐데쿰, 카우츠키, 하제에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실질적인 차이는 이러한 기회주의자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전쟁에서 조국 방위를 철저히 거부하는가, 아닌가, 그리고 전시 및 전후에 전쟁과 관련하여 혁명적 행동을 인정하는가, 아닌가로 시작한다. 이 단 하나의 진지하고 실천적인 문제에서 카우츠키는 콜프와 하이네와 동일한 입장에 서있다.
영국의 페비언 파와 독일의 카우츠키 파를 비교해 보자. 전자는 거의가 자유주의자들로서, 마르크스주의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엥겔스는 1893년 1월 18일에 페비언 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혁명의 불가피성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상황 판단력은 있지만, 이 대사업을 미성숙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맡겨둘 용의는 절대로 없는 야심가 도당.... 그들의 기본적인 원칙은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다.....”1) 이어서 1893년 11월 11일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조야하고 교육받지 못한 대중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고, 저들 영리한 변호사, 문필가와 감상적인 여인네들의 자비심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프롤레타리아트가 기꺼이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오만한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자비롭게 강림한다.”2) 이들과 비교해 볼 때 카우츠키 파는 그들의 ‘이론’상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에 대한 태도에서 양자는 완전히 일치한다! 이것이야말로 어떻게 카우츠키 파의 마르크스주의가 시들어 말라서 죽은 문자로, 한 조각의 위선적인 빈말로 변해 버렸는지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다음의 예들은 바젤에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전원일치로 채택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행동의 전술을 논박하기 위해 카우츠키가 개전 이래 사용해 온 그 명백한 궤변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라는 이론을 꺼내들었다. 그가 말하는 초제국주의란 “몇몇 나라의 자본이 다른 나라들의 자본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기존의 형태를 지양하고, 그 대신 모두가 국제적으로 통합된 금융자본을 형성하여 세계를 공동으로 착취하는 것”을 뜻했다.(<<노이에 차이트>> 5호, 1915년 4월 30일, 144쪽). 동시에 카우츠키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자본주의의 그와 같은 새로운 단계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충분한 전제들이 여전히 부족하여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새로운 단계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공언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지만, 그것이 “생각해 볼 수는 있는” 것이라는 근거로 이제 그는 명백히 위기와 전쟁의 단계에 도달한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임무를 부정한다! 1909년에 <<권력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책을 쓴 제2인터내셔널의 바로 그 지도자에 의해 혁명적 행동이 부정된 것이다. 거의 모든 주요 유럽 언어들로 번역된 그 책은 임박해 있는 전쟁과 혁명 사이의 연관을 드러내주며, “혁명이 시기상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책이다!
1909년에 카우츠키는 ‘평화적’ 자본주의 시대는 지나갔고,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912년에 바젤 선언은 이 견해를 전 세계 사회주의 당들의 전술 전체의 기초로 삼았다. 1914년에 전쟁이 왔고,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예견한 “경제적 • 정치적 위기”가 뒤따랐다. 그러자 카우츠키는 혁명적 전술에 반대하여 사용할 이론적 ‘핑계거리’를 고안해냈다!
악셀로드가 제기한 것도, 단지 좀 더 ‘좌익적’인 언사로 포장되었을 뿐, 동일한 사상이었다. 그는 자유로운 스위스에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데, 러시아의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소책자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와 임무>>(취리히, 1915년)에는, 기회주의자와 전 세계 부르주아지를 그리도 기쁘게 해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대 발견이 나온다. “노동운동을 국제화 하는 문제는 우리의 투쟁 형태와 방법을 혁명화 하는 문제와 같은 문제가 아니며”[37쪽],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운동을 국제화 하는 문제의 핵심은 일상의 실천을 더욱 더 발전시키고 국제화하는 데 있다[40쪽].... 예를 들어 노동보호법과 보험법이 그들의[노동자들의] 국제적 행동과 조직화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39쪽).
이와 같은 ‘국제주의’는 반더벨드 파와 함께 쥐데쿰 파와 레기엔 파, 하인드만 파뿐만 아니라, 로이드 조지 파와 나우만 파와 브리앙 파에 의해서도 완전히 찬동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악셀로드는 조국 방위에 대한 카우츠키의 찬성 논의에 대해 일말의 인용이나 평가조차 없이 그의 ‘국제주의’를 옹호한다. 친불(親佛) 사회배외주의자들처럼 악셀로드는 바젤 선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혁명적 전술이라는 것을 거론하기조차 두려워한다. 악셀로드는 미래 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미래 一 에 대해서는, 가장 좌익적이고 요란하게 혁명적인 언사를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래의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폭풍을 방출하는 것으로, 사회주의혁명을 개시하는 것으로 (전쟁 위험에 처한 정부와) 조우할 것이다.”(14쪽) 이거 농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현 위기 동안에 혁명적 전술을 적용하는 문제에 이르면, 악셀로드는 완전히 카우츠키 식으로 이렇게 말한다. “혁명적 대중행동” — 이러한 전술은, “만약, 예컨대 절대주의와의 임박한 결전의 전조였던, 러시아에서 1901년의 학생 시위로 시작한 상황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사회혁명의 전야에 있다면, 일정하게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40-41쪽) 그런 뒤에 그는 완전히 콜프와 하이네와 쥐데쿰과 레기엔 식으로 ‘공상’과 ‘바쿠닌주의’를 맹렬히 비난한다. 러시아의 예야말로 악셀로드를 가장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실례다. 1901년과 1905년 사이에는 4년이라는 시간이 끼어 있었고, 1901년에 그 누구도 러시아에서의 혁명이 (절대주의에 대한 최초의 혁명) 4년 후에 일어날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혁명 전 유럽의 정세도 완전히 같다. 누구도 이런 종류의 최초의 혁명이 4년 안에 일어날 것인지 여부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혁명적 정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1912년에 예견되었고, 1914년에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노동자와 굶주린 도시 주민들의 1914년 시위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결정적 전투가 다가오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시위와 모든 종류의 혁명적인 대중행동(경제파업과 정치파업, 군대 내의 소요에서부터 봉기와 내란에 이르기까지)을 지지하고 발전시키는 것, 이 투쟁들에 명확한 슬로건을 공급하는 것, 대중에게 혁명으로 떨쳐 일어설 것을 호소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비합법 조직을 만들고, 비합법 문헌을 발행하는 것, 그들이 혁명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갖도록 도와주고 혁명을 위해 조직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자의 의무이다. 러시아에서 1901년에, 부르주아 혁명 — 1905년에 시작한, 그러나 1915년에도 끝나지 않은 — 전야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행동을 취했다.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14-15년에, “사회주의혁명 전야에” 바로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다. 혁명은 결코 미리 다 만들어져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주피터의 머리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혁명은 일거에 타오르지 않는다. 혁명에 앞서 언제나 소요 · 위기 · 운동 · 반란의 과정, 즉 혁명의 개시 과정이 선행하며, 이 혁명의 개시가 언제나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혁명적 계급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면). 악셀로드는 사회민주주의자가 혁명적 운동들을 발전시켜 현존하는 혁명적 정세 내에서 싹트도록 도와야 할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날 구실을 고안해낸다. 악셀로드는 그 자신의 기회주의를 좌익적 언사로 은폐하는 가운데 다비트와 페비언 파의 전술을 옹호한다.
기회주의자들의 지도자 다비트는 1914년 11월 1일에 발표된 우리 당(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언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세계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키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쓰고 있다.(<<세계전쟁에서 사회민주주의>>, 베를린, 1915년, 172쪽). 그러나 선언은 내란 슬로건을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일단 전쟁이 사실로 되면, 그러한 전화가 주어진 어느 시점에 아무리 어렵게 보일지라도, 사회주의자는 이 방향으로 체계적이고 불굴의, 정력적인 준비 활동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Wie gross die Schwierigkeiten dieser Umwandlung zur gegebenen Zeit auch sein mögen—die Sozialisten werden niemals ablehnen, die Vorarbeiten in der bezeichneten Richtung systematisch, unbeugsam, und energisch auszuführen, falls der Krieg zur Tatsache geworden ist.” 다비트의 인용, 171쪽). 다비트의 저서가 나오기(1915년 5월 1일) 한 달 전에 우리 당이 “현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시키는 도상의” 체계적인 “조치들”을 내건, 전쟁에 관한 결의(<<사회민주주의자>> 40호, 3월 29일)를 발표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들 조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전쟁공채 투표를 거부한다. 2) ‘계급휴전’을 거부한다. 3) 비합법 조직을 창설한다. 4) 참호 내에서 병사들 간의 교류, 유대를 지지한다. 5) 일반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종류의 혁명적 대중행동을 지지한다.
오 용감하신 다비트 씨! 1912년에 그는 파리코뮌의 예를 인용하면서 그것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에 그는 ‘미친 짓’이라고 떠들어대는 부르주아의 고함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4국협상 측 나라들에 속한 사회배외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대표자인 플레하노프는 혁명적 전술에 대해 다비트와 완전히 일치하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에 관한3) 사상을.... 더 정확히 말해서, 사회혁명의 전야 — 그로부터 결정적인 전투까지는 4년, 또는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 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것들은 바젤 선언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맹아들 —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맹아들인 — 로서, 결코 일거에 강력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미약한 맹아의 단계들을 불가피하게 통과할 것이다.
혁명적 대중행동과 혁명적 운동을 지지하고 확대 · 발전 · 강화시키는 것, 그리고 이 방향으로 선전 · 선동을 위한 비합법 조직을 만들어서 대중이 운동과 운동의 임무 • 방법 • 목표를 자각하도록 돕는 것 一 현 전쟁에서 사회민주주의적 활동의 그 어떤 실천적 강령도 필히 이 두 항목으로 귀착한다. 그 외의 것은 모두 기회주의적 · 반혁명적인 문구들이다. 그 문구들이 아무리 좌익적인, 의사(疑似)마르크스주의적인, 평화주의적인 분칠로 위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수구 완고파들이 우리에게 반박할 때 보통 쓰는 방식대로 이번에도 “오오 이런 러시아적 전술이라니!”(다비트 책의 8장)라고 탄성을 지른다면,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915년 10월 30일에 수백 명의 여성들이 당 중앙집행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대표단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중앙집행부에 전달했다. “오늘 거대한 조직 기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비합법 전단과 소책자를 배포하고, 불허된 집회를 개최하고자 한다면, 사회주의자탄압법 시절보다 훨씬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이탤릭 강조는 인용자). (<<베르너 타그바흐트>> 271호)
이들 베를린 여성 노동자들은 11월 1일자 러시아 당 중앙위원회의 “바쿠닌주의적”, “모험주의적”, “종파주의적”(콜프 일파 참조)인, “무모한” 선언에 현혹되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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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3년 1월 18일자 엥겔스가 조르게(F. A. Sorge)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Lenin
2) 1893년 11월 11일자 엥겔스가 조르게(F. A. Sorge)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Lenin)
3) 원고의 이 페이지가 여기에서 끊어진다. 다음 페이지가 시작하면서 단어가 몇 개 빠져 있다. 논문의 이어지는 부분은 이번에 처음으로 출판한 것이다. — 전집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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