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 100주년을 지나 - 오늘의 새김
1. 1917년 10월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현 시대의 노동자계급 · 피억압 인민의 해방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레닌과 볼셰비키 당이 이끄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킨다는 목표 하에 노동자·농민 공화국을 수립했다. 오늘, 스탈린주의가 아닌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레닌·트로츠키의 볼셰비키 당 전통과 1917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전통에 서 있다. 우리의 목표는 새로운 10월 혁명을 촉진하기 위해 볼셰비키 당을 일국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2. 사회주의 10월 혁명은 오늘날 근본적인 혁명적 변혁에 지극히 유효 타당한 일련의 맑스주의 명제들을 확인시켜주었다. 첫째는 혁명이 중단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즉 최종 승리를 이뤄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고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할 때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패배하거나 후퇴할 것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지 (또는 부르주아지의 분파)를 권력에 남겨둔, 또는 자본주의의 시종 노릇을 하는 개량주의·소부르주아 지도자들을 권력에 남겨두는 모든 미완성의 혁명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적대를 해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연속적인 혁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멈춰 서서 후퇴하고 결국은 패배할 것이다.
3. 연속혁명 이론은 인류의 발전이 역사적인 “불균등·결합 발전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맑스주의적 인식의 전략적 결론이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 관계 내에서 발전했다. 그 결과로 러시아는 농민이 주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노동자계급이 주로 대공장 (그 중 많은 것이 외국인 자본가의 소유다)에 기반해 있는 낙후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연속혁명 이론은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으로 시작할 것이지만, 노동자계급이 가난한 농민을 이끌고 권력을 잡기 위해 중단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일단 권력을 잡으면 세계혁명의 일부로서 사회주의적 과제를 떠안고 혁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4.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을 궁핍으로 몰아넣고, 실업, 저임금, 고용불안 등으로 고통 속에 내몬다. 이것이 오늘 이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서의 상황이다. 1917년 이전 러시아에서도 사정은 이러했고, 그 해에 있은 2월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그러했다. 노동자들은 차르 전제정을 타도했지만, 노동자권력을 수립하지 못했다. 개량주의적인 “사회주의” 당들과 부르주아 세력의 연합 (“인민전선”)에 의해 노동자권력 수립이 가로막힌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공장에서 노동자 통제를 실시하고 10월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을 때, 볼셰비키가 대기업과 은행을 노동자 통제 하에 국유화했을 때 비로소 노동자들의 삶의 결정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노동자들이 권리를 빼앗긴 것은 그 뒤에 스탈린주의 관료가 1924년 레닌 사후 볼셰비키 지도부를 대체해버리고 난 다음이었다.
5. 농업 문제에서도 그러했다. 노동자계급 혁명이 승리하지 못하는 한,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소유를 몰수·수탈하지 못하는 한 가난한 농민들은 언제나 피억압·피착취 계급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월 혁명이 가장 큰 소부르주아 농민당 ㅡ 이른바 “사회주의혁명가당”(SR) ㅡ 을 권력에 올려놓았을 때 그 당은 대지주를 수탈하고 토지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분배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10월 혁명이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했을 때 비로소 대지주를 수탈하는 것이 가능했다. 비로소 그 때서야 토지를 국유화하고 빈농위원회에게 넘겨 가난한 농민들 사이에 토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소비에트 공화국이 가난한 농민들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14개 외국 군대가 러시아 반혁명 세력의 편에 서서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항하여 싸운 그 파괴적인 내전 (1918~1921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농업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볼셰비키는 자발적인 협동조합과 국영농장 창설을 내걸고 추진했다. 그러나 스탈린 관료 독재가 1928-29년에 가난한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았다 (강제 집산화). 이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파멸적인 기근을 가져왔고, 이로써 사회주의적 목표로부터 농민을 완전히 분리, 소외시켰다.
6. 피억압 민족의 해방 문제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맑스주의적 지침이 오늘날 혁명 투쟁에서도 그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는 또 다른 예다. “민족들의 감옥”이라고 불린 차르 러시아는 주민의 57%가 기본권을 부정당한 비 러시아계 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 세력과 개량주의 당이 연합한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10월 이후 볼셰비키 정부가 비로소 피억압 인민들에게 민족자결권을 보장해주었다. 모든 민족이 완전한 동등권을 부여받았고, 학교에서 각 민족의 모어(母語)를 가르쳤으며, 각 민족의 문화도 억압 금지가 아니라 장려되었다. 나아가 각 민족은 자신의 국가를 창설할 권리도 보장되었다. 이 모든 것이 스탈린주의 반혁명 이후 되돌려졌다. 비 러시아계 민족들이 다시 억압받고, 대국 배외주의가 장려되었으며, 체첸인과 크림 타타르인, 고려인 등 많은 소 민족들이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벽지로 강제 추방되었다. 스탈린 반혁명 이전에 볼셰비키는 이미 1903년 포그롬 (유대인 대학살) 당시부터 계속해서 유대인을 일관되게 방어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당내 반대파를 겨냥해 반유대주의 캠페인을 펼쳤고, 나아가 유대인 박해를 조장했다.
7. 또 볼셰비키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 반(半)식민지 피억압 인민의 해방투쟁을 무조건 지지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지배의 종식을 요구했고, 반식민 봉기들을 지지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과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선 모로코 베르베르족의 봉기,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인도 인민의 봉기, 모든 열강에 맞선 중국 인민의 봉기, 영국에 맞선 터키의 봉기 등).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초과착취와 인종주의에 반대하여 아프리카와 미국에서의 흑인들의 투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호소했다. 그 투쟁들을 보통 비사회주의 세력,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 종교 세력 등이 주도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 투쟁들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는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전술”) 한편,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조직화를 내걸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끌던 당시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비혁명적 지도부는 필연적으로 해방투쟁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가 이러한 지도부를 대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 레닌과 트로츠키 당시의 소련은 여성에게 완전한 동등권을 부여한 세계 최초의 국가였다. 처음으로 여성들은 동등한 임금 (동일임금)과 투표권, 모성 보호, 이혼할 권리, 낙태의 권리 등을 보장받았다. 더욱이 혁명 자체에서 여성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었다. 여성들은 붉은군대에 속해서 싸웠고 인민 대중 속에서의 정치적·사회적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여성운동을 건설했다. 또 신생 소련은 동성애를 범죄화한 법령을 포함하여 성 문제와 관련한 모든 억압적 법령을 폐지했다. 그러나 다시 여성에게서 일련의 권리 (낙태의 권리를 포함하여)를 빼앗은 것은 스탈린주의 반혁명이었다. 이와 함께 스탈린은 1933년 형법에 한 조항을 추가해 남성 동성애를 중노동을 포함하는 5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다.
9. 레닌은 맑스·엥겔스를 따라, 승리한 노동자국가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성격 규정했다. 부르주아 데마고그들은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를 배제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것만큼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구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불구대천의 적들을, 승리한 혁명이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1918년 1월에 볼셰비키에 의해 해산된 제헌의회를 예로 든다. 그러나 제헌의회는 그 다수파인 소부르주아 당들 (우익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과 함께 혁명에 적대적인 기구로 판명나면서,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표명된 바의 노동자·빈농 다수자의 의지를 대표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신생 소련에서는 혁명의 진로에 관한 토론과 논쟁이 어디서나 활발하게 펼쳐졌고, 볼셰비키 당 내에서도 수많은 의견 그룹과 파벌이 존재했다. 레닌과 트로츠키 당시의 혁명적 노동자·농민 공화국에서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었다. 이견과 반대가 체계적으로 말살된 것은 다름 아닌 스탈린주의 관료가 권력을 잡고 난 뒤였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1927년 말에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를 축출했고, 이어서 수만 명의 반대자들을 ㅡ 나중에는 수백만 명까지 ㅡ 투옥했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스탈린주의는 볼셰비즘의 계속이 아니라 그 부정의 구현이다. 이 두 대척점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10. 혁명이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확산되는 데 실패하면, 타락하고 관료화하고 마침내 붕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첫째, 제국주의 적들이 혁명을 공격, 와해시키고 마침내 분쇄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힘을 동원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 현대의 생산력은 바로 그 본성상 민족국가의 모든 국경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혁명이 한 방에 여러 나라에서 승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계급은 먼저 일국에서 권력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 하에서 가능한 한 사회주의 민족국가의 공고화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우선순위는 혁명의 국제화에, 혁명을 타국으로 확산시키는 것에 두어져야 한다. 이것이 실패하고 혁명이 여러 해 동안 고립된 채 머물러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파멸하기 마련이다. 한 나라가 고립된 채 남아 있으면 낙후와 빈곤으로 고통 받게 될 것이다. 인류를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점차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는 오직 현대 생산력의 기초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스탈린이 1924년에 선언한 악명 높은 ‘일국 사회주의’론처럼 고립 상태에서 건설될 수 없고, 오직 국제적 수준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 이것은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그 밖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운명으로 증명된 바다. 먼저 이들은 관료화하여 노동자계급과 인민 대중을 억압하고 마침내 1989-91년에 붕괴하여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1917년 이후 혁명의 국제화를 최우선순위로 내걸고 1919년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띄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스탈린이 이 인터내셔널을 모스크바 대외정책의 부속물로 탈바꿈시키고 최종적으로 1943년에 해산시킨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1. 수많은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평화적인 수단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이룰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지배계급은 봉기한 노동자와 피억압자에 대한 대대적이고 폭력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10월 혁명 자체는 상대적으로 평화적으로 수행되어 당시에 사망자는 아주 제한된 수자에 그쳤을 뿐으로, 이는 노동자계급이 피에 목말라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서 있는 변혁에 관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에 뒤이어 지배계급과 그들의 제국주의 동맹군은 수년간의 유혈 내전을 연 사악한 반혁명을 조직했다. 반혁명 및 내전과 관련하여 볼셰비키의 경험과 유산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길 바라는 모든 피억압 계급은 조직화하여 노동자·인민 민병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야 하며, 나아가 성공적인 혁명 후에는 노동자·농민 적위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주의적인 “평화적 변혁” 전도사들은 오직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데 봉사할 뿐인 부르주아지의 시종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12. 10월 혁명의 또 하나 중대한 교훈은, 부르주아 당들과 함께 하는 모든 형태의 연립정부, 즉 암묵적으로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정부는 그 형태와 종류에 관계없이 사실상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의 이해를 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부르주아-개량주의 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ㅡ 그러한 정부에 실제로 입각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ㅡ 격렬히 반대했다. 같은 이유로 볼셰비키는 전쟁 동안 혁명적 패전주의 노선을 이어갔다. 2월 이후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이 특정 상황에서는 이 전략의 적용을 변경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케렌스키 정부가 독일군의 페트로그라드 점령을 허용하여 독일군에 의해 혁명적 노동자 · 병사들이 진압 당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이 경험을 단호히 일반화하여, 친자본가 정당들과의 연립정부 지지·참가 문제를 공산주의와 개량주의 간의 결정적인 구분선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이 교훈은 스탈린에 의해 짓밟혔는데, 스탈린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각국의 공산당들한테 자본가 정부를 지지하거나 공공연하게 자본가 정부에 입각하라는, 그리고 이러한 정부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 투쟁에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그리고 다시 1945-47년에 일어났던 바와 같이).
13. 또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국주의 국가와의 그 어떤 정치적 협력이나 지지에 대해서도 강력히 비난했다. 외교조약과 무역협정 같은 실무적 거래는 정당하며 불가피하지만, 결코 이것이 그러한 제국주의 정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1918년 3월 독일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이어서 1922년 라팔로 조약을 어쩔 수 없이 체결한 뒤에도 볼셰비키는 이 시기 동안 독일 혁명을 지지, 원조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잘 알다시피 이 시기는 일차로 1918년 11월 혁명과 이어서 최종적으로는 1923년 가을의 성공하지 못한 봉기가 있은 시기였다. 반면 스탈린은 이 또는 저 제국주의 진영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협력을 실행했다. (1935-39년에 프랑스, 영국, 미국 제국주의와, 그리고 1939-41년에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이러한 협력은 유럽의 스탈린주의 당들이 제국주의 정부를 지지하거나 심지어는 정부에 입각하는 것으로, 그리고 제국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을 중지시키려는 노력으로 (1942년 인도와 1945년 알제리에서의 반식민 봉기를 격렬히 비난한 것을 포함하여) 이어졌다.
14. 10월 혁명의 중대한 교훈 또 하나는 볼셰비키 당이 통일전선 전술을 사용하여 처음에 개량주의 당들을 지지한 대중을 어떻게 전취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1917년 2월 이후 권력에 오른 멘셰비키-에스에르 개량주의 정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할 것을 거부하는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이들 연립 당들에 대해 구체적인 요구들을 걸고, 개량주의 성향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거리와 공장과 촌락에서 투쟁을 조직하여 이들 당에게 압력을 가하라고 요구했다. 1917년 7월에 페트로그라드의 대중이 아직 때 이르게 권력을 잡으려고 했을 때 볼셰비키는 전국적으로 역관계가 혁명을 위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아 페트로그라드 대중을 제지하려 했다.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문이 개량주의자들에게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단 볼셰비키는 10명의 부르주아 장관들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8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에 의한 군사 쿠데타 위협에 뒤이어 군사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개량주의자들과 편을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정부에게 정치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부했다. 그러나 그러한 실무적 협력 속에서도 결코 레닌과 트로츠키는 혁명에 대한 개량주의자들의 후퇴적 행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반혁명이 인민전선 정부를 분쇄하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는 이와 같은 상황은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데 (1936년 스페인, 1973년 칠레), 혁명가들은 1917년의 볼셰비키와 동일한 전술 ·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15. 볼셰비키는 혁명에서 소비에트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평의회는 민주적 위계사다리 꼴로 존재한다. 모든 작업장과 마을, 촌락에서 노동자·피억압자를 조직하는 기초 단위 소비에트는 다음의 상위 단위 ㅡ 예를 들어 시, 군, 도 단위 소비에트 ㅡ 에 대한 명확한 권한을 가진 대표자들을 선출한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전국 단위 소비에트까지 이어진다. 이들 대표자는 그들을 선출한 기층의 통제 하에 남아 있고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든 소환, 해임될 수 있다. 대표자로서 그들은 평균적인 노동자의 소득 이상을 받지 않는다. 1905년 가을에 페테르부르크 시에서 이미 이러한 소비에트 ㅡ 트로츠키가 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ㅡ 가 존재했지만, 1917년에는 소비에트가 러시아 전체로,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들로도 번졌다. 1973년 칠레와 1979년 이란에서도 비슷한 노동자·인민 평의회가 생겨났었다. 2012년 8월 남아공 마리카나의 영웅적인 광원 파업 속에서 형성된 매일 총회조직과 의사결정 기구들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직접적인 노동자 민주주의가 존재했다. 실제로 모든 진정한 인민적인 혁명은 무장한 소수자에 의한 쿠데타와는 확연히 대조되는 이러한 유형의 대중적인 노동자·인민 평의회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한다. 각종 중도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빵, 토지, 평화”를 요구함으로써 혁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볼셰비키가 이러한 슬로건을 내건 것은 사실이지만, 중도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그 슬로건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슬로건과 결합시킨 사실은 누락한다. 중도주의자들은 이러한 누락에 의해 볼셰비키의 전략을 왜곡하고, 그것을 멘셰비키적 2단계 혁명으로 탈바꿈시킨다.
16. 사회주의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이끌어야 한다는 것 또한 10월 혁명의 중요한 교훈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부정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주어 온 현대 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은 혁명의 지도 계급이며, 또 지도 계급이어야 한다. 한 사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세력을 점하는 경우에조차도 말이다. 예를 들어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고, 압도적 다수의 러시아 인은 농민이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노동자계급이 이보다 더 작은 비중을 점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볼셰비키는 도시가 농촌을 이끌고, 노동자가 농민을 이끈다 ㅡ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중심적 역할로 인해 ㅡ 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이 교훈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타당하다.
17.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주민 가운데 여타 피억압 계급·계층과의 동맹 없이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이 점 또한 1917년 10월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새겨야 할 교훈인데, 오늘날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야만적인 착취를 당하며 인민대중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는 가난한 농민층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교훈이다. 또 하나 중요한 부문은 증대하고 있는 도시빈민층이다. 기존 제국주의 나라들 (북미, 서유럽, 일본)에서 인민대중의 사회적으로 억압 받는 층들 ㅡ 여성, 이주자, 청년, 민족 소수자들 ㅡ 의 투쟁에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18.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초창기 소련으로,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이 경험은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강령적 비전에 풍부한 교훈을 제공한다. 우리의 사회주의는 ㅡ 그 스탈린주의적 희화와는 정반대로 ㅡ 혁명적이고 자유로울 것이다! 21세기의 사회주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은 레닌과 트로츠키 당시 신생 소련의 혁명적 정신 ㅡ 나중에 스탈린주의 관료에 의해 절멸되어버린 그 혁명적 정신 ㅡ 에 고무 받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 농민, 도시빈민 (아직 학교에 다니며 취업하기 전의 청소년층 빈민들과 이미 퇴직하여 연금을 받는 노년층 빈민들을 포함하여)이 모든 직장과 학교와 빈민가과 마을·촌락 등에 존재하는 노동자·인민 평의회를 통해 사회를 지배하는, 그러한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 21세기 사회주의는 ㅡ 스탈린주의 독재와는 대조적으로 ㅡ 아래로부터 위로이지, 위로부터 아래로가 아니다. 모든 중요한 문제들이 이러한 평의회에서 토론되고, 대표자들은 보다 상위의 기관 ㅡ 지역 평의회, 권역 평의회, 전국 평의회, 국제 평의회 ㅡ에서 기층 성원들의 관점을 대표하도록 선출된다. 기층 성원들이 더 이상 이들 대표자에 의해 제대로 대표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경우에는 언제든 대표자 소환이 가능해야 한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관료층이 사회를 지배하는 그러한 ‘사회주의’여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는 결코 노동자들에 대한 관료들의 독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20세기의 중요한 교훈이다. 또 21세기 사회주의는 하나의 당만 있고 그 하나의 당만 집권하는 그러한 ‘사회주의’일 수도 없다. 그와는 달리,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은 평의회에서 다수 지위를 놓고 민주적으로 경쟁하는 서로 다른 당에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것이다. 21세기 사회주의는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의회주의와 보나파르트주의를 결합시킨 체제를 통해 사회를 지배하는 (베네수엘라의 경우처럼) 그러한 ‘사회주의’여서도 안 된다. 우리가 쟁취하려고 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전 세계적 계획경제와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구현되는 사회주의일 것이다. 21세기 사회주의는 부자들의 부, 국부(國富)가 아닌, 인류 전체의 일반적 부의 창출로 나아갈 것이며, 이 과정에서 국가구조들과 계급들은 점진적으로 고사(枯死)할 ㅡ 맑스의 비유를 사용하자면 ㅡ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기와 그에 뒤이은 과도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즉 구 지배계급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손에 놓지 않으려고 하는 또는 권력을 되찾으려고 하는 그러한 기간 동안에 노동자계급은, 길고 쓰라린 내전을 포함하여 일체의 계급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과도기에서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만이 구 지배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고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박살낼 것이다.
19. 우리가 쟁취하고자 싸우고 있는 21세기 사회주의는 경제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자의 수중에서 민주적으로 계획되는, 그러한 사회주의다. 성공적인 사회주의혁명 뒤 즉각 노동자계급은 은행과 주요 금융기관, 운송과 수도·전기·가스를 비롯한 그 밖의 주요 산업을 사회화할 것이다. 가족기업과 농민경제는 사적 소유로 남겨둔 채로 경제발전 계획 속에 통합될 것이다. 하지만 경제의 주요 부분들이 사적 소유로 남아 있는 한 결코 최적의 경제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물론 농가 · 소농장 같은 소규모 생산과 소유에 대해서는 사회화가 조심스럽게, 강제적으로가 (스탈린주의 관료 치하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아니라 자발적인 협약에 근거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21세기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함께 경제를 소유하고 함께 일하는 사회주의다. 우리는 자율 협동조합에 기초한 ‘사회주의’라는 비전을 거부한다. 물론 혁명 후 과도기 동안에는 충분히 협동조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협동조합의 내재적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협동조합 간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시장경제의 재발전으로, 결국에는 자본 축적 및 집적과 계급의 재출현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경제에서 어떠한 사적 소유도 존재하지 않을 때, “소유권”은 해당 수준에서 ㅡ 지역, 권역, 전국, 국제 수준 등의 각 수준에서 ㅡ 생산하는 사람들 및 이들 생산자가 생산물로 부양하는 사람들에게 부여될 것이다. 현지에서 결정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현지에서 결정할 것이다. 보다 광역의 자원 할당과 생산물 교환이 권역, 전국, 글로벌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윤을 위한 경쟁적 투쟁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관료나 전문가를 위한 보이지 않는 특권 같은 것도, 비밀 유지의 필요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원에 관한 정보와 결정은 모두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하에서 존재했던 바와 같은 기괴한 관료적 중앙계획, 즉 특권 관료층에 의해 한 곳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던 하나의 중앙계획 같은 것은 21세기 사회주의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 하에서 존재하게 될 것은, 각 해당 수준의 계획이 노동자 · 소비자 민주주의에서의 토론을 거쳐 결정되어 보다 상위의 수준으로 상향하는, 그러한 일련의 계획들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으로 계획된 경제는 부르주아 선전가들의 악선전과는 달리 결코 백일몽이 아니다. 현대 기술을 통해 몇 초 안에 전 세계 수요와 필수품에 관해 정보 소통을 하고 생산과 수송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현대의 다국적 기업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업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현대 기술의 성취를 소수의 이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인류의 부와 복리를 위해 이용할 것이다.
20. 10월 혁명의 최종 교훈, 아마도 가장 중요한 교훈은, 혁명당의 지도 없이 노동자계급 봉기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은 볼셰비키가 혁명적 전투당을 건설하여 15년 동안 그 혁명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오직 가능했던 혁명이다. 그러한 당은 이론에서 도출한 견고하고 과학적인 맑스주의 강령에 근거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한 당은 철의 규율과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내부 토론에서의 민주주의, 행동에서의 통일)를 기초로 해서만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한 당의 기간 당원들은 계급투쟁에 정규적으로 관여하고 노동자계급 속에 뿌리내림으로써만 단련될 수 있다. 그러한 당은 특별히 여성, 소수자, 청년 등의 조직화에 초점을 두는 노동자의 당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레닌이라면 개량주의자들도 사회주의혁명을 이끌 수 있다고 가르쳤을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테제는 역사의 날조다. 레닌은 개량주의자들이 압력을 받아 애초에 자신들이 원했던 것보다 더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세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절대 이끌 수 없다는 것을 레닌은 분명히 인식했다. 실제로 이후 혁명들의 실패는 그러한 볼셰비키 당의 부재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 새로 다시 그러한 당을 건설하는 것이 오늘 혁명가들의 주 임무다.
21. 10월 혁명은 또 역사에서 개인이,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레닌이 없었다면 10월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의 대다수는 레닌의 러시아 귀환 전에 인민전선 정부에 비판적 지지를 제공했다. 10월 혁명 직전 가을에는 많은 중앙위원들이 레닌의 무장봉기 요구에 반대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당을 배반하고 레닌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22. 레닌과 트로츠키는 혁명당은 일국적 고립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세계당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항상 강조했다. 자본주의는 오직 국제적 지평 위에서 존재하며, 또 그렇게만 존재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도 착취자에 대항하는 자신의 투쟁을 국제적으로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는 언제나 국제 노동자 당의 창건을 위해 분투했다. 볼셰비키가 1914년 가을부터 줄곧 제3 인터내셔널 창설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1919년 3월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또 트로츠키가 제4 인터내셔널 건설을 ㅡ 코민테른의 스탈린주의적 타락 이후 ㅡ 1930년대의 주 임무로 간주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제5 혁명적 인터내셔널 건설을 오늘 우리의 중심 과제로 삼고 있다! 우리는 모든 혁명적 노동자·청년들에게 이 투쟁에 우리와 함께 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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